무학대사 설화
무학1 간월도에 어리굴젓 장사를 하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이 해산을 앞둔 몸으로 장에 가는 길에 배가 아파 인지면의 양을 방목하는 곳에서 해산을 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은 몸이었음에도 여인은 매우 가난하였기에 젓을 팔러 시장에 가야 했다. 아이를 가랑잎으로 덮어둔 채 시장에 다녀와 보니 한 짐승이 아이를 감싸고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여인이 뛰어가 보니 아이를 감싸고 있던 학이 날아갔는데 아이에게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여인이 이를 보고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그 학이 주변을 맴돌며 ‘무학’이라 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아이에게 무학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되었는데 이 아이가 조선의 도읍지를 정한 무학대사였다. 무학 2 무학대사의 어머니는 간월도에 살며 시부모를 봉양했다. 굴을 캐다가 서산 시장에 내다팔아 시부모를 봉양하였는데, 만삭의 몸으로 서산 장에 가다가배가 아파 인지면 복당리 부근에서 해산을 하게 되었다. 시부모를 봉양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해당화나무 밑에 놓고 장에 가서 굴을 팔았다. 무학대사의 어머니는 아이가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아이를 둔 해당화 나무 밑으로 돌아왔는데 돌아와 보니 학들이 아이를 감싸고 춤추고 있는 것이었다. 무학대사의 모친이 이를 보고 귀한 아이라 생각하고 간월도로 데려와 키웠다. 무학대사의 부친은 죄를 짓고 서산 감영에 하옥되어 있었는데, 부인이 남편을 구하고자 보석금을 벌기 위해 굴을 팔러 다녔는데, 늦게 장에 다녀와 관하에 돈을 바치러 가게 되었다. 군수가 그 사유를 물으니 어머니가 아이 낳은 일과 학이 아이를 덮고 또한 춤을 춘 이야기를 하였다. 군수는 그 이야기에 감복하여 남편을 풀어주고 손수 아이의 이름을 무학(舞鶴)이라 지어주었다. 무학대사는 후일 무학(無學)으로 그 법명을 삼았다. 무학대사는 간월도에 와서 토굴을 파고도를 닦았는데 달을 보며 득도했다 하여, 이 섬의 이름을 간월도(看月島)라 하게 되었다. 무학 4
무학대사가 김종사의 마부로 있을 때의 일이었다. 무학은 김종사를 태운 말을 끌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말고삐를 소나무에 매어놓고는 많은 솔잎을 꺾어 오줌을 싸 솔잎에 묻히고는 공중으로 흩뿌리는 것이었다. 김종사가 이를 보고 양반 행차에 이 무슨 괴상한 짓이냐며 힐책하였다. 무학이 대답하기를, 지금 합천 해인사에 큰 불이 나서 그 불을 끄는 것이라고 하였다. 후에 김종사가 알아보니 과연 그 시간에 해인사에 큰 불이 일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어 불이 꺼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김종사는 무학에게 공부를 많이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이르고 노비를 면하게 해주었다. 무학 5 무학대사가 동자 하나를 데리고 간월도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무학대사는 동냥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쌀이 나오는 조그만 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샘에서는 쌀이 조금씩 떨어졌는데 하루를 받아 모으면 무학대사와 동자가 죽을 끓여 연명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학대사가 동자를 남겨둔 채 길을 떠나게 되었다. 무학대사는 떠나기 전에 자신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동자에게 이 지팡이가 마르면 내가 죽은 줄로 알라 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 후 한 화주승이 시주를 받으러 간월도에 와서 동자에게 동냥하지 않는 까닭을 묻고쌀이 나오는 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화주승이 동자에게 함께 지내자고 하며 이 샘이 좁아 쌀이 많이 나오지 않으니 샘을 키우자고 하였다. 그래서 그 구멍을 크게 뚫어버렸는데 그러자 그 이후로는 쌀이 단 한 톨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수년이 지나자 무학대사가 꽂아둔 지팡이가 말라버렸는데 후일 조선 말기에 와서 그 지팡이에 잎이 피었다가 지기도 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