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디오니소스,
오디션, 그리고 슬픈 열대
서울공대지 2019 Winter No.115
김성우 공학전문대학원
교수
700년을 사는 녀석
월E는 인간이 떠난 지구를 청소하기 위해 10만대 가량 생산되었으나, 죄다 망가지고 단 한 대만 남아 700년째 홀로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로봇이다. 700년이나 동작하는 로봇이라니……영화는 감동스럽지만, 그런 로봇을 만드는 것은 엔지니어 입장에서 꽤나 어려운 문제이다. 망가진 부품은 고장 난 다른 로봇에서 떼어다 자가 수리를 한다고 하지만, 문제는 기억공간이다. 700년 동안 보고 들은 것을 쌓아둘 도리는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대응할까? 70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70세가 넘어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분들도 많고 심지어 100세가 넘은 분들도, 기억력이나 판단에 별 문제가 없다. 오히려 찰나의 순간에도 깊은 통찰력을 뿜어낸다. 머리 속 유한개의 신경망을 100년 이상 쓰는 것인데, 이것은 기억의 압축을 통해 가능하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기억을 추상화 한다. 군더더기를 태워 몽타주처럼 핵심만 남기는 것인데, 스페인어로는 피카소, 영어로는 애브스트랙트, 즉 초록이다. 십여 페이지를 십여 문장으로 요약한 것 말이다.
요약을 더 증류한 뒤 이름을 붙이면 개념이 된다. 여러 개 개념들간에도 공통점을 또 찾아 요약하면, 개념에도 상사와 부하로 층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철학이라는 말을 붙인다. 공대에서도 참고문헌 100개 정도를 읽어 요약하고 실험을 더해 100페이지 정도 스스로 써내면, 피에이치디, 즉 철학박사라고 쓰고 공학박사라고 읽는 학위를 준다. 무작위 속에서 패턴을 볼 수 있고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은 현대를 살아가는 문명인에게만 있는 기능이라고 믿었다.
인간만이 사용하여, 동물 실험을 할 수 없는 언어라는 녀석을 좀 더 근본적, 즉 구조적으로 들여다 보기 위해서 1940~1950년대에 아마존의 원시부족을 연구하던 레비스트로스는 원시부족도 문명인과 마찬가지로 추상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화된 상징과 개념은 결국 신화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때 이 신화는 대립 관계를 가지는 신들의 서사이다. 그렇게 되면 사이가 좋지 않은 신들이 치고 받으며 이야기를 낳게 되고, 우리는 이것을 신화라고 부른다. 사이가 좋지 않을수록 전개는 더 극적이 된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 신화를 이성, 질서, 규칙을 상징하는 아폴론과 그 반대의 술과 파티를 좋아하는 디오니소스 간의 대립으로 설명한다. 현재 우리 반도의 사상적 바탕을 이루고 있는 주자학을 제안한 주자도 정확히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에 대응하는 리(理)와 기(氣)로 삼라만상을 설명해 낸다. 비슷한 시기에 교류가 별로 없던 지구 정반대편에서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무래도 공통적인 것이 있다는 것인데, 결국 호모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구조가, 인간지능 구조와 기능이 공통되어 드러난 현상이라고 하겠다.
결승전에 오르는 녀석들
복잡하고 무질서한 많은 경험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를 요약하며 추상화되는 여러 요소 중에 차이가 가장 두드러진 두 개 원인을 골라내면, 다른 것들은 이 두 개의 조합으로 설명이 된다. 이분법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 진보와 보수, 사용자와 노동자, 금수저와 흙수저. 좀 잘 안 맞아도 아무튼 구겨 넣어 설명해 낸다. 그래야 기억하기도 이야기 풀어내기도 좋다. 그래서 결국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가장 명암 대비가 큰 두 녀석이 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결승전에 오르는 최종 우승 후보자 2명 내지 2팀이 대비를 이루는 라이벌 전이 된다. 잘생김 대 실력파, 엄친아 대 자수성가, 댄스 그룹 대 그룹 사운드. 아무튼 대중에게 투표를 붙이면 아슬아슬 50대 50 균형이 맞도록 구분이 된다. 이게 정확히 우리 두개골 속 신경들이 다락으로 뭉쳐 해내는 일이다. 현역이건 왕년이건 한 가닥하는 가수들이 모여 하는 합창을 보자. 누구 하나 빠질 것없는 쟁쟁한 가수들 가운데 클라이막스를 부르는 이는 결국 음색이 가장 대비되는 두 가수이다. 내가 누구냐 도 중요하지만, 나의 대비는 누구이냐 도 중요한 것이다.
이 같은 대비 구조는 헤겔의 변증법에도 나타난다. 떼제와 안티떼제는 대비를 이룬다. 안티떼제는 처음에는 잡음으로 여겨지지만, 반복되다 보면 규칙을 내포하게 되고, 떼제가 설명해 내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 낸다. 이 잡음이라는 것이 결국 창의라는 정의와도 일치한다. 기존의 패턴이 아닌 것. 창의적이 되라는 것은 대중과 평균인 떼제에 멀어지고 대비가 큰 안티떼제가 되라는 말이다.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결국 많은 것을 설명해 내는 최소 규칙을 찾아내는 것인데, 이는 강력한 잡음 제거기가 된다. AI로 면접을 본다고 떠들어 대는 이들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과거의 기준으로 훈련된 평균을 뽑겠다는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와 분야에서는 동작하기 어려운 전략이다.
안티떼제가 제 역할을 하려면 가만히 두어도 돌도록 문턱 속도 이상을 내야 하고 떼제와의 거리도 멀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결국 떼제와 안티떼제가 합쳐진 크기가 최종 합이 되기 때문이다. 떼제는 돌지 않으니 안티떼제가 머얼리, 크게 도는 수밖에 없다.
안티떼제의 거리와 속도
공전원은 10년도 넘게 서울공대에 새로 생긴 유일한 과이다. 공대에 대한 일종의 안티떼제인 셈인데, 기존 공대에서 하기 어려웠던 온갖 시도를 다 해보고 있다. 산학협력이 잘 안되니 아예 산업체에서 학생을 받아다 직접 가르치고, 회사가 당면한 현장 문제를 연구주제 삼아, 최소 3명이상의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는데다가, 과가 하나밖에 없어 온갖 전공의 학생들이 단일 과에서 복작복작 같이 수업을 듣는다. 일견 멋져 보이지만, 교수로써 이 복잡도를 감내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제법 좋은 점도 있다.
조금 있으면 내가 입학식부터 가르쳤던 공전원 학생들이 졸업을 한다. 회사를 다니다가 공부하느라 한 사람 한 사람 정말 눈물 겹다. 나이와 회사 핑계를 댈 수 없도록 악플 각오하고 엄하게 하였는데, 점차 연구자 스러워져 가는 것을 보면 보람이 크다. 선배 중에 잘한 것을 사례로 하니, 대상과 거리를 좁히는 신경망이 동작을 한다.
공전원에서는 공대 모든 과를 다 포함하고 있어서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할 기초 과목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내가 가르치고 싶은 과목을 가르치면 되고 현재 사업을 하고 있는 치열한 현장의 문제로 연구를 한다. 몇 학기 가르치니 다양한 분야 학생들에게 공통되면서도 대비되는 몇 개 축이 추려진다. 이들을 각자 과목으로 만드니 교과서가 있을 수가 없다. 메디컬 분야에 AI를 접목하고 바이오 신약의 실험실 연구부터 대량 생산까지, 양자 암호, 조선, 화학 플랜트, 건설, 에너지 등 하도 분야가 달라 머리가 아프지만, 이들의 논문지도를 하다 보면 좋건 싫건 핵심을 알게 된다.
대한민국 제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큰 흐름부터 세부 그림까지 보게 된다. 그리고 차이도 보이지만, 공통점이 눈에 들어온다. 당연히 아이디어가 나온다. 공전원 학생들이 지도 받는 공대 교수님들은 물론 소속랩 연구원들과도 산학협력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서로 많이 배운다. 공전원 신입생도 꾸준히 늘고 있고 입학생 수준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공전원 학생들을 품어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의미. 생각의 원리
이세돌 9단의 은퇴로 상징되는 인간을 초월한 작금의 인공지능의 충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첫째, 아주 간단한 모델로 인간의 지능이 재현된다는 것이다. 둘째, 이것은 인간의 생각의 구조가 밝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설명이 너무나도 단순하기 때문에 다른 원인을 떠올리기 어렵다. 그리고 이 원리를 활용해 인간수준으로 생각하는 인공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녀석은 사람이 배우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 즉 경험으로부터 배운다. 무질서하고 무한의 감각 정보 흐름 가운데 스스로 질서를 뽑아내고 응축을 해낸다.
인간과 똑같이 생각할 수 있는 인공물을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바뀐 시대의 교육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인간지능이고 사람을 흉내 낸 인공지능이고, 결국 주위와 비슷해 진다. 주위란 결국 경험을 통칭하는 것인데, 나에게 직접 경험을 주는 주변인 그리고 간접 경험을 주는 미디어 저 너머의 누군가가 된다. 인공지능도 결국 경험을 요약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연결될수록 사람은 비슷해 지고 인공지능도 평균으로 수렴하게 된다.
인공지능은 숫자로 변화된 디지털 자료가 경험이 된다. 따라서 인간지능이 할 일은 아직 숫자화 되지 않은 것, 기존에 인공지능이 추상화 해두어 해석되지 않는, 즉 새로운 일이다. 인간지능은 감각과 근육을 이용해 이동하며 직접 경험을 하지만, 인공지능은 원자력 발전소와 수력 발전소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지능은 음식을 통해 탄소를 공급받아 떼었다 붙였다 하며 지능을 다루는데 쓸 수 있지만, 규소를 기반으로 하는 인공지능은 100만 배 정도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작은 기스 하나 내기 힘든 유리로 지능을 다루려니 그 강한 불산이 필요한 것이다. 당연히 가공에 많은 품이 든다. 밥을 엄청나게 먹지만, 아직은 앉아 있는 인공지능이 일어서 걷기 전에 인간들은 뇌와 감각기를 들고 바삐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측정되기 어려운 오감이 복합된 실경험을 해야 한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감정, 창의, 자아도 간단히 재현된다. 알파고가 바둑을 잘 두는 것도 지면 분하고 이기면 기쁜,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창의도 그렇다. 인공지능이 뭔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다른 것들과의 조합, 즉 덧셈으로 이루어 진다. 생명 활동이라는 것이 유기 물질이 더해지고 그만큼 빠지며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망이라는 것이 덧셈으로 설명된다. 선형대수, 선형대수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결국 하늘아래 표절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를 더하고 곱해서 하는 것이다. 단지 여기에 내 경험으로 얼마나 양념간을 하였냐 가 약간의 차이를 낼 뿐이다. 결국 새로운 것은 얼마나 이질적인 것을 섞느냐가 관건이 된다. 뭔가 참신한 것이 나오려면 어떤 형태가 되었던 융합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동작하는 인공지능을 당해낼 수 없다.
초인간으로의 면역 반응
서로 다른 것들이 섞이면 가렵고 골이 아프다. 그러나 복잡한 것을 뱉을 것이 아니라 품고 질서를 부여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
합쳐졌던 것을 가르는 것은 후퇴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옮겨 다니지 못하게 꽁꽁 싸맬 것이 아니라 전공과목을 공통과목으로 공유하고 잘 가르쳐서 관심 없던 학생들도 관심을 갖게 해야지, 선택지를 줄여 놓으면 우물 안 개구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훈련 받아 봐야 시야도 좁고 야심들도 없다. 다른 데도 기웃거려봐야 대부분 집 찾아 오게 되어 있다. 처음 문을 두드린 데는 이끄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황하다 돌아온 녀석은 선택지가 없음을 알고 혼신, 집중하게 된다.
기존에 연금술로 여겨지던 새로운 물질 탐색과 설계도 이제 인공지능의 영역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재료와 화학, 생명도 새로운 녀석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기 위해서 언어학과 인공지능이 도입된다. 건설환경, 에너지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이들 과에서 컴퓨터 언어를 중요히 하지 않거나 거의 배우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어만큼이나 잘해야 하는 말이며, 심리학개론과 같은 교양이자 공통기초이다.
AI 전공을 만들고 전공, 대학, 대학원을 만든다고 난리인데, 그럴 것이 아니라 공통되게 가르치고 각자 전공에 적용하면 된다. 왜냐면,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특정 전공과 기술이라기 보다 생각의 방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올해 초 총대를 매고 AI 대학원 제안을 하였지만, 되지 못했다. 그러나 소득도 있었다. 한 달을 끙끙대며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제안서에 담긴 내용이 사실 굳이 정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우선 인공지능과 기계 말(語)의 기초공통과목화이다. 공대라는 것이 다른 대학에 서비스하는 것이 별로 없는데, 덕분에 뭘 하나 추진하려고 해도 반대에 부딪힌다. 학내에 새로 뭘 만드는 것도 그렇다. 다른 단과 대에는 하등에 이득이 될 것도, 그렇다고 그간 대학에 희생과 기여한 것이 무엇인가? 설득이 될 리가 없다. 결국 물리적 실체가 없는 간판만 하나 더 세우는 가장 낮은 단계로 시작하게 되는데, 주인이 없는 구조는 대체로 부실하게 운영되고 이내 흐지부지 된다. 이 같은 인공지능 시대의 기초 공통 교육은 공대가 학교 전체에 서비스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공대 공통과목을 보강하고 대학원 역시 전공이 별로 관계 없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듣도 보도 못한 잡음 같은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사실 이미 그렇게 동작하고 있다. 학생들이 논문 내는 것만 봐도, 지도 교수님의 전공과 별 상관없는 논문들이 나오는데, 다들 독립적으로 연구한다는 증거이다. 강의와 전공 지식의 온라인화로 그런 것이 가능해 졌다. 그래서 전공이 별로 상관이 없다. 빠른 대신 교류와 움직임이 없는 온라인이 줄 수 없는 것을 주어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가 나은 부작용 중 하나는 인간들이 독립적인 알고리즘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쪽은 생각의 원리와 날카로운 전문지식을, 다른 한쪽에는 다른 이들과 조합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공감, 협력의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 한다. 자알 섞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들이다.
아직 인공지능에는 차별화와 독립을 추구하는 자아라는 것이 발생하지 않았다. 왜냐면, 자아를 가지려면 형상과 구조를 가져야 하는데, 이 분야는 아직까지는 사람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자아와 신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 자아 실현이다. 인공지능이 깨어나기 전에 높은 목표와 뜻을 세울 수 있는 뜨거운 가슴도 필요하다. 한쪽 가슴은 차갑고 한쪽 가슴은 뜨거운 사람을 초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가을 공대소식지, 그리고 2020년
작년 가을 공대 소식지에 스타타센터를 닮은 건물을 짓겠다고 운영 철학, 모습, 위치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 보였다. 맙소사! 반 년도 안되어 건축 기금이 모였고 위치 또한 원안대로 진행되고 있다. 그 안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오늘 좀 더 구체적으로 內在想을 그려보았다.
올 한 해도 응원해 주시고 힘주신 분들 덕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2020년도 사랑 받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서울공대, 공전원 그리고 서울대학교 되도록 집중할 것이다. 모두 멋진 2020년 되시길 바란다. 2020년도 기술과 예술에 취해 한판 잔치를 벌여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