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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숭(石崇)
목차
1. 개요
2. 생애
3. 전설의 사치 대결
4. 최후
5. 기타
1. 개요
서진(西晉)의 거부로 석포의 막내아들.
2. 생애
청주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아버지 석포가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거부(巨富)가 될 운명'이라며 석숭에게는 단 한 푼도 물려주지 않았다. 20세에 수무령을 지내 유능하다는 평판을 받았으며 조정에 들어가 산기랑을 역임하다가 성양태수로 전임하고 손오 토벌의 공적으로 안양향후에 봉해졌다.
성양군의 직무가 있었지만 학문을 좋아해서 병을 이유로 관직을 떠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황문랑이 되었으며 무제 사마염에게 중용되어 290년에는 시중·산기상시 등을 역임했고 1월 18일에 신하들에게 작위를 올리는 논공행상을 하자 산기시랑 하반과 함께 대를 이어 서진 계속될 것인데 이런 제도를 시작하면 몇 세대가 지나 모든 사람이 작위를 받으리라고 하면서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강(元康) 초 남중랑장을 지냈고 이어서 형주자사가 되어 가렴주구와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았고 외국사신이나 상인 습격, 상선 약탈 등 한 나라의 관리가 일개 산적이나 해적이나 할 짓을 저지르거나 아부와 뇌물로 무역로를 독점하여 많은 이익을 챙겼다.
이후 대사농에 초빙되었지만 초빙하는 서류가 도착하지 않자 마음대로 관직을 그만두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에 들어가 태복이 되었다가 정로장군·감서주제군사가 되었다. 별장에 금곡(金谷)이라는 이름을 붙여 잔치를 벌였다가 서주자사 고연과 서로 업신여겨 싸운 일로 면직되었다가 위위에 임명되었으며 291년 가밀과 곽창의 권세가 대단하자 가밀에게 아첨했고 가밀의 친구들인 24우 중 한 사람이 되었다.
3. 전설의 사치 대결
그는 이렇게 엄청난 재산을 모았으며 산기상시로 있었던 282년에 사마염의 외삼촌인 후장군 왕개와 벌인 사치대결이 유명하다. 왕개가 집안에서 그릇을 닦을 때 맥아당으로 닦자 석숭은 자기 집에서 밥을 할 때 짚 대신 밀랍을 땔감으로 썼다. 또 한 번은 왕개가 자기 집문 앞 대로 양쪽으로 40리(약 16㎞)에 걸쳐 붉은색 비단으로 천막을 치자 석숭은 더 비싼 비단으로 50리(약 20㎞)를 쳤다.
왕개가 적석지(赤石脂)로 천막을 장식하면 석숭은 무려 후추를 듬뿍 뿌려 천막을 장식했고 왕개가 외국에서 수입한 최고급 면포인 화완포(火浣布)로 옷을 지어 입고 이를 과시하자 석숭은 자신의 하인 50명에게 화완포를 지어 입혀 쪽을 주었다고 한다. 왕개가 딱 한 번 출산 경험이 있는 절세 미녀들의 젖만을 먹여 기른 돼지고기 구이를 즐긴다고 하자 이에 석숭은 비단 옷을 입히고 금싸라기와 제호탕만을 먹여 기른 닭고기 구이를 즐긴다고 응수했다.
이렇게 외삼촌인 왕개가 밀리자 황제인 사마염이 귀한 산호수를 하나 주었는데 크기가 두 자나 되는 것이었다. 왕개가 석숭에게 이 산호수를 보여주며 과시하자 석숭의 하인들은 이렇게 진귀한 보물은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는데 석숭이 콧방귀를 뀌더니 손에 쥔 등긁개인 철여의(鐵如意)를 던져 산호수를 부숴 버렸다. 그러자 왕개가 "황제께서 친히 하사하신 산호수를 부수다니, 이게 무슨 짓이오!" 하며 격노하자 석숭은 "걱정 마시오, 보상해주겠소. 내 지금 산호수를 가져올 테니, 마음에 드는 걸 가져 가시오." 라며 태연히 하인을 시켜 자기 산호수를 모두 가져오게 했다. 그 중에는 세 자짜리가 예닐곱 개 있었으며 모두 왕개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고 왕개의 것과 같은 두 자짜리는 아주 많았다. 결국 왕개는 완패를 인정했다.
석숭은 종들을 가혹하게 대했는데 연회에서 기녀들이 노래를 못 부르거나 기녀가 권한 술을 손님이 안 마시면 그 자리에서 참수했다. 한 번은 뒷날 동진의 공신 승상 왕도와 그의 사촌형 대장군 왕돈이 연회에 참가했다. 왕도는 술을 잘 못함에도 기녀들을 위해 열심히 술을 마셨지만 왕돈은 주당임에도 일부러 술을 안 마시는 바람에 기녀 셋의 목이 달아났다. 그래서 보다 못한 왕도가 "술 좀 마셔, 형 때문에 기녀들 다 죽게 생겼어." 라고 하자 왕돈은 "자기 집 기녀들 죽이는데 나랑 뭔 상관?" 이라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왕돈의 막장인 인간성이 드러났다. 왕도는 서진 동쪽으로 피난한 뒤 공신 외에 충신과 명신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지만 왕돈은 결국 반란을 일으키면서 공신 대신 역적으로 이름을 남겼다.
석숭은 화장실마저도 침실처럼 화려하게 꾸몄기 때문에 손님들은 석숭의 집 화장실을 침실로 착각해서 깜짝 놀라 황급히 돌아 나가려고 했다. 그의 집 화장실 바닥에는 최고급 양탄자가 쭉 깔려 있었으며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자색 비단 막을 늘어뜨려 놓았다. 향기가 나는 방향제를 비치한 것은 물론, 수십 명의 미녀들로 하여금 시중을 들게끔 항상 대기시켜 놓았다. 거기다 변기에도 오리털을 잔뜩 깔고 볼일을 보는 동안 여러 명의 시녀들로 하여금 향수를 들고 있도록 시켰다. 볼일이 끝나면 곧장 새 옷으로 갈아입곤 했다. 시녀를 시켜 손님들의 손을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게 해 줬기 때문에 손님들은 부담스러워 이를 꺼렸고 지방에서 온 관리들마저도 쩔쩔맸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나 우리의 왕돈은 이 서비스를 당당하게 받았는데 이에 시녀들은 왕돈이 엄청난 일을 할 거라고 말했다.
《세설신어》의 태치편에서 왕개와 돈지랄 경쟁하는 여러 가지 일화가 나온다. 석숭의 처첩은 100여 명이었고 하인만 800~1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석숭의 그 부가 한 나라에 맞설 만하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물론 전술한 사치 일화는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데 진서 자체가 세실신어 같은 일화류를 짜집기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냥 당시에 엄청난 사치를 부린 인물이었고 그것이 후대에 과장했다고 보는 게 더 가능성 있다.
인간성은 막장이어도 글재주는 왕희지에 비견될 정도로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금곡시서(金谷詩序)라는 것을 남겼는데 왕희지가 젊을 때 쓴 난정연집이 석숭의 금곡서문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있으며 왕희지도 금곡시서에서 영감을 받아 난정접서, 즉 그 유명한 난정서를 썼다. 진서 희지전에는 반악의 금곡시서가 석숭보다 뛰어났다고 나온다.
4. 최후
이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그의 부귀영화와 운명도 팔왕의 난에 접어들면서 종말을 맞았다. 조왕 사마륜의 심복 손수는 석숭의 심복인 황문랑(黃門郞) 반악(潘岳)에게 소시적에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어서 원한을 품고 있었다. 예전에 석숭이 아끼는 기생 녹주(綠珠)를 바라서 달라고 했지만 석숭에게 거절당했으며 석숭의 외사촌의 아들이었던 구양건(毆陽建)은 사마륜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손수는 석숭을 죽일 핑계를 찾았다.
가남풍을 죽인 사마륜이 혜제 사마충을 폐위시키며 황제가 되자 손수는 권세를 이용해 임의로 사람들을 살육했다. 이에 위위로 석숭은 반악과 함께 회남왕 사마윤(司馬允)과 제왕 사마경(司馬冏)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제거하려 했다. 손수가 이를 알고 대군을 이끌고 금곡원(金谷園)을 포위하고 석숭·반악·구양건을 체포했다.
석숭은 '저 노복 놈이 내 재산에 눈독을 들인다'고 한탄했는데 체포하러 온 사람이 '재물이 화임을 알면 어찌하여 그것을 흩어버리지 않았냐'고 하자 대답하지 못하고 참살당했다. 참살 당시 나이는 51세. 이때 그의 삼족이 멸족당하면서 막대한 재산은 전부 몰수되었으며 그가 참살당하기 전 녹주는 누각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다. 여기서 유래된 속담이 '석숭의 재물도 하루아침이다', '죽은 석숭보다는 산 돼지가 낫다'. 정약용도 "석숭의 잔치 자리에 지금 뭐가 남아있냐?" 고 한 적이 있다.
5. 기타
비록 말로는 비참했지만 그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부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으며 중국에선 복(福), 녹(祿), 수(壽)의 삼선(三仙) 가운데 녹(祿)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앙되었다고 한다.
그를 언급한 후대의 인물로 북위의 호태후가 있는데 '나는 석숭의 사치 같은 것은 보기 싫다. 다만 석숭에게 내 사치를 못 보여줘 유감이다.' 라고 했을 정도로 사치스러웠다.
낙양가람기와 태평광기에 실린 북위 종친의 돈지랄 썰에서도 언급된다. 장무무장왕 원융은 북위에서 재력으로는 재종형제 고양왕(高陽王) 원옹 빼고 지 미만이라며 돈지랄에 부심을 부렸다. 그러자 다른 재종형제 하간왕(河間王) 원침(元琛)이 석숭과 왕개가 그랬듯이 돈지랄 병림픽에서 이기려고 더욱 사치를 부리고 종친들을 잔치에 부르니 원융이 이걸 보고 기가 질렸다. 그러자 원침은 원융에게 "내가 석숭을 못 봄은 안 아쉽다만 석숭이 나를 못 보니 아쉽다." 고 부심을 부리고 원융은 지보다 더 한 돈지랄에 열폭해서 부자(負玆)하여 드러누웠다. 그래서 3종조부 강양왕 원계가 원융의 문안을 갔다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그대는 회남의 원술 같이 되어 세상에 유비가 있는 것도 모를려고 하시오?" 라고 하였고, 원융의 병은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원융과 원침은 모두 호태후에게 아첨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모두 육진의 난에서 전사하였다.
석숭의 행동이 유래가 된 고사성어가 있다. 살기유주(殺妓侑酒)가 그것인데 잔치를 열어서 손님한테 술을 권하는데 손님이 술을 받지 않으면 옆에 앉은 기생의 목을 쳤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지나치게 뭔가를 권하는 것을 지적하는 말인 듯? 또 하나는 금곡주수(金穀酒數)가 있는데, 금곡원에서 열린 잔치 도중에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시게 했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이문열 수호지에서 무송이 반금련을 죽일 당시 여태후의 연회에서 내리는 잔을 마다하면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났다는 표현이 있다.
석숭(石崇)
석숭(石崇, 249년 ~ 300년)은 중국 서진의 문인으로, 석포의 막내아들이며, 자는 계륜(季倫), 아명은 제노(齊奴)이며 발해군 남피현(南皮縣) 사람이다.
생애
무제 때 수무령(修武令)으로 관직을 시작해 성양태수 등을 지내고 안양향후(安陽鄕侯)로 봉해졌다. 혜제 때 중랑장(中郞將), 형주자사 등의 벼슬을 하였다. 형주자사에 부임하면서 항해와 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는데, <진서(晉書)>에는 "멀리 가는 상인과 상인을 위협하여 치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충의 황후인 가남풍이 조정에서 전권을 휘두르며 가씨(賈氏) 일족의 권세가 커지자 가남풍의 조카인 가밀(賈謐)과 가까이 지내며 이른바 '24명의 벗(二十四友)' 가운데 하나로 불렸다. 학문과 시에도 능통하여 문인으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6권으로 된 문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사귀인(思歸引)', '사귀탄(思歸歎)' 등의 시가 전해진다.
또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는데, <진서(晉書)>와 <세설신어(世說新語)> 등에는 황제의 인척인 왕개(王愷)와 부를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낙양 서쪽에 금곡원(金谷園)을 지었는데, 집안을 매우 호화롭게 꾸며 뒷간도 화려한 옷을 입은 십 여명의 시녀들이 화장품과 향수를 들고 접대하게 하여 손님들은 침실인 줄 알고 놀라 돌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금곡원(金谷園)에 관리와 문인들을 초대하여 주연(酒宴)을 자주 열며 풍류를 즐겼는데, 주연(酒宴)에서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세 말의 술을 마시게 하였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금곡주수(金谷酒數)'라는 말은 '술자리에서 받는 벌주'를 가리키게 되었다.
석숭에게는 녹주(綠珠)라는 애첩(愛妾)이 있었는데, 피리를 잘 불 뿐 아니라 악부(樂府)도 잘 지었다. 그는 녹주를 총애하여 '원기루(苑綺樓)' 또는 '녹주루(綠珠樓)'라고 하는 백장 높이의 누각을 지었다. 조왕(趙王) 사마륜의 측근이었던 손수(孫秀)가 녹주의 미색을 탐하였으나 석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300년, 사마륜이 가후(賈后)의 세력을 제거하고 전권을 장악하자, 석숭은 황문랑(黃門郞) 반악과 함께 회남왕 사마윤과 제왕 사마경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제거하려 했다. 손수가 이를 알고 대군을 이끌고 금곡원을 포위하자, 녹주는 누각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석숭은 반악 등과 함께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기타
석숭은 관직을 이용해 향료 무역 등을 독점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백여명의 처첩(妻妾)을 거느렸으며, 집안의 하인도 8백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은 물론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부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중국에서 석숭은 복(福), 녹(祿), 수(壽)의 삼선(三仙)의 가운데 녹(祿)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앙되었다.
석숭의 돈 자랑, 위진남북조는 살기 좋은 시대였나?
민앤차이나 ・ 2024. 12. 20. 22:57
중국 역사의 한 시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사람들은 위진남북조를 선택하는데, 그 이유는 살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해인 게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만약 상류 귀족이나 문벌의 신분으로 산다면 살기 좋은데, 확실히 다른 시기에 비해 귀족들의 삶은 최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족이 아니라 서민의 신분으로 위진남북조 시기를 살았다면 악몽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운이 좋으면 귀족들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는 전객인데, 전객은 적어도 굶어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만약 운이 나빠서 위진남북조 시기의 북방으로 돌아간다면, 16국 시기의 혼전을 만나 '군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귀족들은 어느 정도로 살기 좋았을까요? 대표적인 사례로 석숭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진 시기에 한 관료가 있었는데, 이름이 석숭이라고 유명한 부호였습니다. 그 당시 귀족들은 서로 부를 비교하는 게 유행이어서 한 번은 석숭은 황제의 외삼촌인 왕개와 누가 더 사치스러운지 비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석숭은 부를 자랑하기 위해 초를 땔감으로 사용하였고, 이를 알게 된 왕개는 자사포로 40리의 보장을 만들었습니다. 이어 석숭은 50리의 보장을 만들었는데, 소재는 고급 비단을 사용했습니다. 왕개를 질세라 적석제로 벽을 칠했고, 석숭은 더 비싼 화초로 벽을 칠했습니다.
이렇게 몇 차례 비교를 하다 보니 일이 점점 커져 결국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외삼촌을 도와주려고 궁에서 2자 길이의 아왜나무를 외삼촌에게 주면서 석숭에게 가져다가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석숭은 아왜나무를 보더니 바로 분질러버리고, 몇 그루의 아왜나무를 가져와서 왕개에게 고르라고 하면서 배상하겠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석숭이 가져온 아왜나무들은 왕개가 가져온 것보다 훨씬 컸습니다. 그럼 석숭은 왜 이렇게 돈이 많았고, 그의 돈은 어디에서 왔으며, 석숭과 왕개가 돈 자랑을 하는데 황제는 왜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왕개를 도왔을까요?
이게 바로 위진남북조 시기의 특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석숭의 돈은 상속을 받거나 장사를 해서 얻은 게 아니라 형주에서 자사를 할 때 지나가는 상인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범죄에 대해 서진의 조정은 관여도 않했고, 황제도 모른 체 했습니다. 다음은 석숭과 왕개가 돈 자랑을 할 때 황제가 제지하지 않은 이유는 석숭의 가문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석숭의 부친 석포는 서진의 개국공신으로 사마염이 찬위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게다가 사마염이 재위하던 기간에 석숭은 권신 가밀(贾谧)과 관계가 좋았는데, 가밀은 서진의 다른 개국공신인 가충의 외손으로 진혜제가 황제가 되었을 때 한때 서진의 조정 대권까지 쥐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사마 가문은 천하를 통일할 때 개국공신들과 세가의 힘을 빌렸기 때문에, 사마염은 서진을 세운 후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문벌 귀족들과 타협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서진부터 남부조까지 귀족 문벌들의 세력이 강해서 황제가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호강들을 제거하지 못한 채 최대한 타협을 하는 걸 택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문벌의 자제들은 점점 살기 편했고, 위진남북조만 이렇게 특별했던 이유였습니다. 만약 석숭이 돈자랑 하는 사건이 당나라 이후의 통일 시대에 있었다면, 황제는 아마 좌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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