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놓아버린 큰 죽음…가장 밝은 안목 갖춘 참된 삶”
죽음과 삶은 허구일 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의 차이
부처라 해도 깨닫지 못한 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 깨달은 자에겐 줄 것이 있을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함께 길을 가고 있다. 누가 죽은 사람이고 누가 산 사람인가?
강설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 내용이라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사서삼경, 코란, 성경, 불경 등에 있는 얘기를 모두 외워, 입만 벌리면 성현의 말씀을 읊조린다고 해도 그것은 참 영험 없는 짓이다.
만약에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는 판단을 마음대로 동시에 사용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있다면, 모든 경전의 말씀으로는 그를 설명할 길이 없다. 또 칭찬과 꾸중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사람들을 해탈케 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면, 부처의 지견으로도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가리기 어려운 법이다.
배움과 지식의 수준을 이미 넘어선 선지식이 있어서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빙판 위에서도 마음대로 걷고 칼날 위에서도 내달릴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이 남의 눈에 쉬 보이겠는가. 기린의 뿔을 본 사람이거나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혹여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리고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 등에 더 이상 속지 않는 경지가 되어, 배운 것과 기억한 것들을 초월하는 자리가 있음을 확실히 봐야 한다. 만약 태어나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간 사람이 있다면, 곧바로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 있음을 인정하겠다.
투자 대동선사(投子大同禪師, 819~ 914)는 취미 무학선사(翠微無學禪師)의 법제자이다. 서주(舒州) 회녕(懷寧) 출신인데, 처음에는 수식관(數息觀)을 익혔다. 뒷날 <화엄경>을 보다가 성품의 실체를 깨달았고, 취미선사 밑에서 공부하다가 크게 깨쳤다. 이로부터 발 닿는 대로 떠돌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투자산(投子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했다. 스님은 한동안 직접 깨를 길러 기름을 짜 팔아서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조주스님이 찾아가 만난 이후로 유명해져서 공부하는 이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경덕전등록> 제15권에 본칙의 대화가 있기까지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었다.
어느 날 조주화상이 동성현(桐城縣)에 온다기에 투자선사도 만나러 내려가 도중에서 만났으나 서로 몰라보고 지나쳤다. 조주스님이 사람들에게 물어서 투자스님임을 알고는 되돌아가서 말을 건넸다.
“투자산의 주인이 아니십니까?”
“차 마실 돈이나 한 푼 주시오.”
조주스님이 먼저 암자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투자스님이 나중에 기름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이에 조주스님이 한 마디 했다.
“투자의 소문은 들은 지 오래인데, 이제 보니 한낱 기름 파는 스님에 불과하군.”
“스님은 기름장사만 보았지 투자는 못 보시는군요.”
“어떤 것이 투자스님의 모습이오?”
“기름사시오, 기름!”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는 어떠하오?”
“밤에 가지 마십시오. 날이 밝으면 틀림없이 도달합니다.”
“나는 일찍이 후백(侯白)이라 여겼더니, 후흑(侯黑)이었구먼.”
이 일이 있은 뒤로 투자선사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수행자들이 모여들었다.
후백(侯白)은 진나라의 정치인이었고, 후흑(侯黑)은 수나라의 정치인이었다. 후흑이 후백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조주선사는 옛 인물들을 예로 들어 투자선사를 칭찬한 것이다.
본칙
擧 趙州問投子 大死底人却活時如何 投子云 不許夜行投明須到
대사저인(大死底人) 크게 죽은 사람. 완전히 죽은 사람.
각활시(却活時) 도리어 살아났을 때. 다시 활동을 할 때.
투명(投明) 밝아지면. 밝아졌을 때.
본칙 번역
이런 얘기가 있다.
조주스님께서 투자스님께 물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는 어떠하오?”
투자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밤에 가지 마십시오. 날이 밝으면 틀림없이 도달합니다.”
강설
조주스님께서는 120세까지 사셨고, 투자스님께서는 96세까지 사신 분이다. 투자스님의 세수가 41세 아래다. 조주스님께서는 깨달으신 뒤의 운수행각(雲水行脚)이 길었던 분으로도 유명하다. 80세가 되어서야 조주 관음원(현 백림선사)에 주석하셨다. 그러므로 조주스님의 세수가 80세 가까이 되어 만났다고 해도 투자스님은 40대가 되기 전이었다.
노련한 방랑객 고수와 모습을 감추고 사는 젊은 고수가 마주쳐서 몇 합을 겨루었다. 승부가 쉽사리 나질 않자 노련한 조주스님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을 때는 어떤가?”
그러자 은거하던 젊은 고수가 되받아쳤다.
“어두운 밤에 낯선 길을 갈게 뭐 있나요. 밝은 뒤에 그곳에 가게 될 텐데.”
나는 학생시절 떨칠 수 없었던 궁금증이 있었다. 도대체 깨달은 도인들은 우리와 다른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묻고 다녔다. 큰스님들만 뵈면 “큰스님 도가 무엇입니까?”하고 여쭈었다. 돌아오는 답은 죽비로 맞은 정수리의 혹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정수리의 혹은 부처님의 육계(肉)처럼 항상 머리 위에 달고 다녔다. 하지만 도는 아득했다. 아마 이것은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목숨을 걸고 공부한 이들의 시작은 대개 이렇기 때문이다.
만약 큰스님들께서 자상하게 말로 뜻풀이를 해 주셨다면 내가 도를 알 수 있었을까? 그건 절대로 아니다. 큰스님들께서는 과분하게 자비를 베푸셨지만, 다만 내가 미처 그 자비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히말라야 높은 절벽에서 채취한 석청(石淸, 야생의 벌이 돌 사이에 집을 짓고 모은 꿀)은 특이한 맛과 향과 기운을 가지고 있다. 먹을 때 적정한 양을 넘기면 목숨을 잃는다. 이것을 말로 설명해서 알 수 있을까? 진짜로 알고 싶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먹어봐야 할 것이다. 히말라야 석청(石淸)은 용기 있는 대장부만 맛볼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진짜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미리 상상할 것은 없다. 직접 맛보면 즉시에 알게 될 테니까.
송 원문
活中有眼還同死 藥忌何須鑑作家
古佛尙言曾未到 不知誰解撒塵沙
약기(藥忌) 약 먹을 때 복용해서는 안 되는 음식.
작가(作家) 뛰어난 솜씨를 갖춘 사람. 전문가. 선지식과 같은 뜻.
송 번역
사는 가운데 눈 밝은 것
오히려 죽음과 같으니,
약에 금한 음식으로
전문가 가림이 왜 필요하랴.
강설
죽음과 삶은 허구일 뿐이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차이이다. 번뇌와 지혜도 마찬가지이다. 괴로워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번뇌가 많음을 모르니 있다고 할 수 없고, 깨달은 사람에게는 번뇌라고 할 것이 없으니 또한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번뇌와 지혜라는 말을 만들었을까? 다른 삶이 있음을 일깨우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린 큰 죽음에 이른 사람은 가장 밝은 안목을 갖춘 참된 삶을 사는 이이다. 이 경지에서는 삶과 죽음이 똑 같은 그림자놀이이다. 그러니 건강을 되찾겠다고 보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 약을 먹지 않는데, 어찌 피하야 할 음식인들 있겠는가. 만약 어설프게 그따위 처방을 내렸다가는 크게 혼이 날 것이다. 하지만 돌팔이를 가려내는 데는 약 처방으로 시험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
송 번역
옛 부처도 오히려 이미 이르지 못했다고 했는데,
누가 티끌모래 뿌린다는 것을 이해할지 모르겠네.
강설
표현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르렀다거나 이르지 못했다거나 하는 것도 손가락에 불과하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목표물은 다른 곳에 있다. 옛 부처도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 가리키는 곳은 어디일까? 이 말을 두고 부처님도 깨닫지 못한 비밀스러운 것이 있다고 해석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솜을 지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나귀와 같다. 부처님이라 해도 깨닫지 못한 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 깨달은 자에게는 줄 것이 있을까?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팔만대장경도 티끌모래이고, 조사들의 고함과 몽둥이질도 티끌모래이다. 그럼 조주스님과 투자스님 중에 누가 티끌모래를 뿌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