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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 13. 사환들에게 - 마 22: 14. 택함 입은 자
마 22: 13. 사환들에게 -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
추방당하는 것은 그 잘못은 주님께 있지 않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정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의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으로부터 추방되어 지옥에서 슬피 울며 고통하게 될 것이다.
1]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1-10절에는 '종들'(*, 둘로이)이 사용되었고, 11-14절에는 '사환들'(*, 디아코노이스)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비유가 원래는 독립된 두 비유였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왕의 밑에서 전령으로 일하는 자들과 잔치를 담당하고 수종드는 자들이 달리 불리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이 사환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보좌하고 영원 천국에서 성도들에게 수종들 천사들일 것이다.
* 마 13: 41, 49 –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2]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하는 것은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임금은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로 바쁜 나머지 임금의 초청을 거부하고 묵살하고 나아가 임금이 보낸 종들을 모욕하고 죽였다.
이에 화가 난 임금은 그 동네를 불사르고 진멸하였다. 그리고 네거리로 종들을 보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초청하여 잔치를 치루게 하였다.
그런데 잔치에 참석한 사람 중 하나가 예복을 입지 않았다.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다.
(1) 예복을 입지 않은 자
① 초청에 응한 사람들은 주인의 영접을 받았다.
초청을 받아 잔치 석상에 나온 많은 사람은 잔치를 배설한 임금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단지 종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초청에 응함으로 귀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인 복음도 마찬가지다. 복음의 초청에 응답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는 기뻐 맞으신다. 아무런 대가나 조건도 없이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기만 하면 된다.
그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배하신 천국의 귀한 손님이 될 것이며, 결국 천국의 영원한 주인이 되는 영광을 맛보게 될 것이다.
②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그때까지 종들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각되지 않았다. 그는 예복을 입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잔치 자리에 참석하여 함께 행동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위장된 행동은 사람은 속일 수 있었으나 임금은 속일 수가 없었다.
임금은 많은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단 한 사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신앙과 가식적인 신앙을 분명히 가려내신다.
③ 그는 예복을 입지 않았다.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의 최소한의 의무는 예복이었다. 예복은 그 잔치를 배설한 사람에 대한 손님이 갖추어야 할 예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았다. 예복을 입지 않는다 함은 준비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외형적인 준비가 아니라 마음의 준비를 말한다.
복음의 잔치에 초청된 우리는 먼저 복음의 부르심에 합당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 빌 1: 27 -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 엡 4: 1 -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앙하는 삶의 구체적인 표현이 있어야 한다.
(2) 드러난 죄악
① 부끄러움을 당하였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12절) 아무에게도 들키지 아니하고 잔치의 여흥 속에 파묻힌 그는 그만 임금의 날카로운 시선에 발각되고 말았다.
그는 모든 사람 앞에 노출되고 말았다. 무언가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대중 앞에 갑자기 노출될 때 커다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신분을 가장하고 남의 눈을 속인 그에게 임금의 이와 같은 호령은 매우 큰 수치감을 가져다주었다.
복음을 거부하고 영생을 준비하지 못한 자들은 언젠가는 이러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 계 16: 15 –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재림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둑같이 오실 것이다. ‘도둑같이’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뜻밖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을 보인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정상적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에 계시된 대로 바르게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가리킨다. 바른 믿음은 바른 삶으로 나타난다.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떠나고 의롭고 선하게 살게 되어 있다.
주 예수께서는 또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성도의 옷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義)의 옷이다.
* 롬 3: 2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갈 3: 27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 십자가의 의를 믿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②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예복을 입지 않은 그는 임금의 추궁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것은 일종의 형벌이다.
그는 너무나 당연한 자신의 과오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에 인간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에는 여하한 반론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 특히 구원의 기회를 거부하고 포기한 자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묵묵히 감수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심판
① 자유를 잃었다.
그는 임금의 명에 의하여 수족이 결박당하고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짐을 당하였다. 죄인은 먼저 그의 손이 결박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자유를 상실하게 됨을 의미한다.
또 수족이 모두 결박을 당하게 된 것은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형벌에 저항하여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을 뜻한다. 복음을 거부한 자는 진정한 자유를 유보당한 자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는 진리 안에서만 가능하다.
* 요 8: 32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 요 14: 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② 후회하게 된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슬피 우는 것은 회한의 눈물이다. 땅을 치며 후회하는 눈물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구원의 문을 닫혀지고 하나님의 심판은 반복될 수 없다.
영원히 어두운 곳에서 엄청난 고뇌의 눈물을 흘려야 할 날이 인류에게 곧 닥칠 것이다. 그날을 위해 우리는 '예복'을 준비해야 한다.
3]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그리고 그가 바깥 어둠에 내던져지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형벌에 대한 일관된 묘사이다.
* 마 8: 12 -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 마 13: 42, 50 –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 마 24: 51 -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 마 25: 30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그것은 즉각적이고도 철저한 형벌이며 영원한 형벌이어서 더 이상의 자비나 기회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생생하여 절망과 한탄과 분노로 불타오른다.
그런데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단지 경고나 과장된 표현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하나님의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진정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은 결코 유치한 신앙이 아니다.
마 22: 14. 택함 입은 자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구원의 복음으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참으로 구원받는 자들은 적을 것이다.
1]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개역 성경에는 원문의 '왜냐하면'(*, 가르)이 생략되었다. 이것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끄는 말이다.
임금이 처음에 손님들을 초청했지만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예복을 입어 '택함을 입은 자들'(*, 에클레크토이)은 소수였다.
그러나 손(guest)이 가득했기 때문에(10절) 잔치를 맛본 사람이 소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스라엘 모두를 먼저 초청했는데, 그들이 거절하여 택함을 입지 못한 비극적인 현실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택함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잔치를 맛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을 말한다.
* 눅 14: 24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 조건은 부르심을 받고, 주시는 예복을 입는 것이다. 인간 편에서는 다 받는 것뿐이다.
선택의 교리의 핵심이 여기에서 나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예수를 알 수 없고 예수께 갈 수 없다.
* 마 16: 17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요 6: 65 -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택정함을 이루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2]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러나 많은 사람이 택함을 입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고 효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인간의 교만이 그토록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결어를 마태가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청중과 논적(論敵)을 향한 결론적 경구로서 진정한 예수의 말씀임을 부인(否認)하기 어렵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천국은 기쁘고 즐거운 혼인 잔치와 같다.
* 계 19: 7-9 – 어린양의 혼인 잔치 -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천국은 의와 평안과 희락의 세계이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천국 초청에 무관심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 계 19: 9 -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 -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우리는 하나님, 구원, 천국, 내세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셋째, 우리는 천국 잔치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한다.
* 계 16: 15 -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 자들. -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 도둑같이
홀연히 임하시는 재림으로 본 절은 마 24: 42-44과 병행된다.
* 마 24: 42-44 –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귀신의 영이 미혹하여 전쟁 준비를 시키는 과정에 본문이 삽입되어 있는 것은 마지막 대 전쟁이 임박할 때 성도들이 극적인 위기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에 위로와 격려를 하기 위함이다. 이 경고의 의미는 어린양을 따르는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만 함을 권면하는 것이다.
* 마 24: 43 -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 살전 5: 2 -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둑같이' 오신다는 경고는 사데 교회(계 3: 2-4)와 라오디게아 교회에도(계 3: 18) 주어졌다. 이 경고는 두 교회의 우상숭배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Johnson).
(2) 깨어 - 신앙의 잠.
'누구든지 깨어' - '깨어 있어 주의 재림을 말씀으로, 기도로, 세마포로 준비하고 있으라.'는 뜻이다
* 마 25: 13 -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 눅 12: 37 -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 눅 21: 36 -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3) 자기 옷
'자기 옷을 지켜' - 자기 옷이란 주님이 주신 의의 옷으로 신부의 예복을 말한다.
* 마 22: 12 –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지킨다는 것은 깨끗이 빤다는 뜻으로 의로운 생활과 회개하는 생활을 말한다.
* 계 22: 14 -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 부끄러운 생활이 아니라 의로운 믿음의 생활로 세마포로 단장한 신부를 의미한다.
* 계 19: 7-8 –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①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로 입은 개인의 믿음.
② 성도의 옷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義)의 옷이다.
* 갈 3: 27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고전 1: 30 -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 롬 3: 2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빌 3: 9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 믿음의 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가 성도의 옷이다. 우리는 참된 믿음으로 이 의를 지켜야 한다. 본문에서의 '복'은 본서 전체에서 나타나는 일곱 가지 복 가운데 세 번째 복에 해당한다.
성도들이 마지막 때에 있을 사탄의 기만과 핍박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아니하고 늘 깨어 있어 충성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 주실 것을 의미한다.
'복(福)'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의의 말씀이요 진리의 옷을 입으라는 것이니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요,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참 모습이다.
* 갈 3: 28,29 –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것은 반드시 우리가 찾아 입어야 하는 자기(自己)의 옷이다.
③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우리는 의인들 곧 사도 선지자들 앞에 부끄러운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도 선지자들의 영(靈)을 소유한 자들은 사도 선지자들에게 부끄러운 자들이 아니요,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부끄러운 자들이 아니며, 말씀이 육신이 된 자들은 말씀이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사도 선지자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진리)을 가지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하며 그들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들에게 복(福)이 있다는 말씀이다.
* 계 22: 14 -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으로 이루신 의를 믿어야 한다.
(1) 두루마기를 빠는 자
날마다 행위를 회개하여 자기를 정결케 하는 자.
* 요 13: 10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2) 생명 나무에 나간다.
에덴동산의 회복.
* 창 3: 24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3) 문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
본문은 본서에 나타난 일곱 가지 복 중 마지막 복에 대한 묘사이다(7절. 1: 3. 14: 13. 16: 15. 19: 9. 20: 6).
두루마기를 빠는 상징은 이미 7: 14에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두루마기를 씻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이다.
특별히 7: 14에서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되어 역사적인 십자가상의 구속 사역에 참여함을 시사하지만, 본문의 '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뤼논테스'(*)는 현재 시제로 지속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 계 7: 14 -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 요 13: 10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해야 함을 시사한다(Morris, Ladd, Mounce).
* 요일 1: 7 -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은 믿는 자들이 죄로 더럽혀진 옷을 그리스도의 피에 씻어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을 말한다.
* 갈 3: 27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롬 11: 14 -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두루마기를 씻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영광을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계 7: 14에서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되어 역사적인 예수님의 십자가 상(上)의 구속 사역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강조하였다.
계 19: 13은 피 뿌린 옷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셨고, 계 22: 14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옷을 빨아 예수와 같이 깨끗하고 의롭고 거룩한 자들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복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서 '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뤼논테스'는 현재 시제로 지속적인 행위를 말한다. 우리의 행위를 완전히 씻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장성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영생에의 참여를 나타내며 '성에 들어갈 권세'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의 참여를 가리킨다.
즉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에게만 충성하여 그의 고난과 죽음에 기꺼이 동참하는 자들, 즉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 속하여 영생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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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원의 복음으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참으로 구원받는 자들은 적을 것이다.
💖늘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듯 언제나 새롭고 희망찬 하루
당신의 오늘 하루를 응원합니다.💖
구원의 복음으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참으로 구원받는 자들은 적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