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14일 목요일
[(백)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수도회] 메마른 영혼에 샘물을 주러 와주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1,13-20
† 복음 마태 11,11-15
◈ 오늘의 묵상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만큼 그의 말과 행동은 유다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삶은 엘리야 예언자에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임박한 구세주의 출현을 알리는 예언자이므로 구약의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위대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언자들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그는 구세주의 수난을
예표하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는 실체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그분의 수난 공로로 그분의 옆구리에서 솟아납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약의 백성이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던 구세주의
풍요로운 은총을 누리는 행운아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골짜기의 샘물처럼, 광야의 연못처럼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채웁니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했던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완덕에
오르는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성인은 세고비아 수도원장으로서 관리
행정 업무, 노동 소임 등 모든 일을 열성적으로 하였고, 수도원에서
가까운 언덕 위의 작은 동굴에서 기도하기를 즐겼습니다.
성인은 “사랑이란 대단한 것들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사랑받는 분을
위해 큰 헐벗음과 고통을 겪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멸시받는 삶 속에서 완덕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성인의 삶에서, 우리 구원이 십자가에 달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을 중거하며 사는 삶
2017년 나해 12월14일 목.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너의 구원자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1,13-20
복음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1-15
“이 사진, 제가 찍은 것인데 멋있지 않아요?”라고 사진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일몰 사진이네요. 아주 잘 찍으셨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신부님, 아니에요. 일몰이 아니라, 일출
사진입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출과 일몰을 사진 상으로
구분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누구는 일몰은 차가운 느낌을
그리고 일출은 따뜻한 느낌을 준다고 하던데, 저는 차갑거나 따뜻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진 상으로 볼
때에 그냥 똑같아 보일 뿐입니다. 아마 사진을 찍은 당사자만 제대로
알 수 있지 아닐까요?
이 세상 안에서 뜨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차이를 제3자가 제대로 알 수가 있을까요? 지고 있는 상태인데도
제3자는 뜨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바로 당사자만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사자만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은 하지 않고 사람들과 세상 탓을 외치는 사람들이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께 불평불만을 맘껏 던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물론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려야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줄일
수 있어 순간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지만, 이러한
불평불만에 앞서 내 자신을 더 깊숙이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뜨고
있는 상태에서 또 반대로 지고 있는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보다 더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선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구세주가 아닐까 생각했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과
행동에 큰 관심을 가졌고 또 열정적으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불평불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로부터 정치적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 왔다고만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칭찬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신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뒤로 하고 “내가
구세주다.”라고만 했어도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늘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을 준비하는 데에만
집중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 앎을 삶 안에서 실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고 하시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잘
났다 하더라도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이보다 못하다는 것이지요. 결국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증거하며 사는 삶, 주님의 뜻에 맞게 사랑을
실천하면 사는 삶입니다.
혹여 잘못되거나 실패할지라도, 자신이 선택한 방향이라면 나름대로
걸어갈 수 있는 법이거든.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마지못해 걷는 길이
가장 괴로운 거지(곤도 후미에).
이집트 시나이 산에서 바라본 일출입니다.
나 역시 죄인입니다.
한 사제가 죄지은 어떤 형제를 교회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한
죄를 가지고 어떻게 교회 안에 들어 오냐면서 말이지요. 이 모습을
본 압바 베사리온은 일어나서 그와 함께 나가면서 말했습니다.
“나 역시 죄인입니다.”
초대 교부들의 글을 읽다가 발견한 글입니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연 누구를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죄로부터 자유로울까요? 그 누구나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 역시 그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판단하고 단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나 역시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오늘은 서울대교구 문정2동성당에서의 두 번째 대림특강입니다.
성수기도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메마른 영혼에 샘물을 주러 와주시는 주님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14일 대림 재2주간 목요일 마태 11,11-15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4)
메마른 영혼에 샘물을 주러 와주시는 주님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와주시니 그들을 핍박하던 자들은
멸망할 것이라 선포합니다. 주님께서는 벌레나 구더기처럼 비천한
이스라엘을 귀하게 여기시어 도와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이사 41,14). 그들을 도와주는 힘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그렇게 구원은 우리 자신의 공로나 의로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로운 주권 행사에 달려 있습니다(41,17).
주님께서는 메마른 땅에 샘물이 솟게 하시고 광야에 나무가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41,18-19). 오시는 주님께서는 그렇게 메마른 사막과도
같은 우리에게 생명의 샘물을 주시고 영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만을 갈망하며 그분의 뜻을 실행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주님의 권능과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
(마태 11,11) 곧 예수께서는 ‘하늘나라’ 자체로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와 계신 하늘나라이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의 터가 바로 예수님으로 인해 드러난
하늘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매순간 삶의 모든 장면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이 되도록
힘써야겠지요.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요. 예수께서 이르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11,12)
하늘나라는 모두에게 거저 주어지는 사랑이요 선이며 생명이요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의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고, 이미 체험한 하늘나라를 빼앗아가려는 폭력과 악행 또한
끈질기게 이어집니다. 이런 폭행은 다양한 차원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비하하며 혐오함으로써 내
안의 하늘나라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혀 남을 무시하고 차별하며 멸시하는 것은
모든 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주님께서 주신 선을 자기것으로 삼는 행동 또한
모두가 행복하도록 초대받은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이 되겠지요.
주님께서는 다른 이들을 동등하게 대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좋음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세상을 바라실 것입니다.
공동체 또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의 자리입니다. 공동체는
하늘나라의 표지요 상징이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공동체가 예수님을
삶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성령 안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는 셈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권능을 믿으며,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선과 지혜와 자비를 키워가도록 힘쓰는 일입니다.
오늘도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악행과 무관심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테러, 자본가들의
끝없는 탐욕으로 하느님의 자리는 약탈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이사 41,14) 하시는
주님께 의탁하며, 불의와 무관심과 시기 질투, 탐욕의 끈을 내려놓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하늘나라가 드러나도록
해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2017년 나해 12월14일 목.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 11,11-15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리 깊이 파들어가도 끝에 도달할 수 없는 풍부한
광산과 같습니다. 그 안에는 보화를 매장하고 있는 광산이 허다하여
매번 여기저기에서 새 보화와 광맥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이
먼저 내적·외적으로 고통이라는 작은 문을 통해서 이 영적 지혜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 보화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기에 이르지를
못할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수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통해,
가르멜 수도회 뿐만 아니라 물욕과 타락으로 얼룩진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1542~1591)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십가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의 일생은 그야말로 피만 흘리지 않았을
뿐, 허물어져가는 성채같던 우리 가톨릭 교회와 수도회를 되살리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생애였습니다. 타락과 위선,
우상숭배와 세속화와 맞서 싸운 사랑의 순교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오직 수도회와 보편 가톨릭 교회의 회개와 쇄신, 성장을 위해 갖은
위협과 박해, 투옥과 독살의 위험을 무릅쓴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에게
주어진 인생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그는 짧지 않은 생애 동안 언제나
동료 수도자들로부터의 오해와 따돌림, 투옥과 독살의 위험에
시달렸습니다.
깊은 지하 감옥 속에서도 유일한 희망이며 의지처였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지어올린 시는 오늘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는 불멸의 시편으로 남아있습니다.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
십가가의 성 요한 사제가 평생토록 일관되게 강조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위해서라면
너무나도 당연히 치러야할 댓가와 노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십가가의 성 요한 사제의 생애는 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몸부림친 순교자의 삶이었습니다. 그가 아주
강력하게 원칙과 규율을 강조하자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적당적당,
느슨느슨하게 살아가던 수도자들이 더 강력하게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박해하는 것을 넘어 독살하려는
시도도 서슴치 않았던 것입니다.
평생토록 애타게 찾고 갈구하던 주님, 눈을 뜨나 눈을 감으나 묵상하고
관상했던 주님, 지상 최고의 보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하고
온 몸으로 느꼈던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영혼이 고통에다 위로와 열망을 두지 않거나 또는 여러 겹으로 된
고통의 숲 속을 거치지 않고서는, 여러 겹으로 된 하느님 보화의
울창함과 지혜에 결코 이르지 못함을 우리가 결정적으로 깨달았으면
합니다. 또한 신적 지혜를 참으로 갈망하는 영혼은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십자가의 숲 속에서 고통받는 것을 원해야 함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하느님 보화의 지혜에 들어가게 하는 문은 십자가라는
문입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모르는 것에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도중 아무 것에도
발을 멈추지 말라.”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 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4일 목.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기념일.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마태 11, 12)
처음부터 하느님이셨습니다.
결국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십자가로 오셨습니다.
하늘 아래 십자가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십자가로 시작합니다.
십자가로 성숙합니다.
십자가로 정화됩니다.
십자가의 힘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를 깨우십니다.
길을 찾게 하는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느님을 만나게됩니다.
십자가는 비우고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가 성탄의 자리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의 의미와 십자가에서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체험하는 은총의 대림시기 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 오십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박해를 받는 하느님의 나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4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11,11-15: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일 것이다.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뛰놀았으며”
(루카 1,41), 그의 어머니 또한 성령을 받아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고 하신다.
즉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승리의 관을 받은 것과 아직
군대에 몸담고 싸우는 중인 것은 다르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분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 완전한 말씀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유를 기다리던 이를
따뜻이 맞아들여 그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주신다면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13절)는 말이 맞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에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음에도 그렇게 어려웠다면,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2017년 나해 12월14일 목.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 11,11-15
엠이 주말 봉사를 다녀왔습니다.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많은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한 부부들은 많은 눈물을 흘렸고,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대화가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대화가 부족한 부부,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부부, 문제를 풀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는 부부에게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이번 주말을 함께하면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식당의 벽에 있던
글입니다.
“인생의 날 수는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인생의 깊이와 넓이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얼굴의 모습을 당신이 결정할 수 없지만
얼굴의 표정은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날씨는 결정할 수 없지만
마음의 날씨는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을 감당하기도 바쁜데
당신은 어찌하여
당신이 결정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걱정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교구에 본당이 200개가 넘습니다. 본당을 생각하는 기준을 보면
외형적인 크기나 숫자를 사용하곤 합니다. 땅은 얼마나 큰가, 성당은
또 얼마나 큰가, 신자 수는 몇 명인가, 보좌 신부님은 있는가,
수녀님은 있는가! 또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다. 단체들은 다 있는가,
헌금은 얼마나 나오는가! 사실 이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큰
기준의 근거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나해 12월14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마태11,11-15)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다.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을 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15,5)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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