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3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
(요한 16, 12-15)
When he comes,
the Spirit of
truth, he will guide you to
all truth.
말씀의 초대
바오로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에 이르러 아레오파고스에서 설교한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교하려고, 그들이 알지 못하면서도 숭배하는 신에 대한 그들의
종교심을 출발점으로 하여 대화를 풀어 나간다. 바오로는 그리스인들이 희미하게 찾고 있던 그 신이 바로 유일하신 하느님이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가 부활에 대해 말하자 사람들의 반응이 갈라진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금은 당신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지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그들을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의 그
유명한 아레오파고스 설교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설교는
다른 문화와 대화하려는 자세를 보여 주는 모범 사례로 평가됩니다. 바오로는 설교 대상이 누구인가를 살펴보고 거기서부터 적절한 출발점을 찾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설교할 때에는 구약 성경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증언합니다. 하지만 이교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할
때에는 그들이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는 종교심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아테네 시민들은 거부감 없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현대 신학도 인간
안에는 하느님을 향하는 심성이 있음을 전제하고, 거기에서부터 비신자들과 대화나 이해를 도모하기도 하지요. 바오로는 비신자들의 마음속에도 하느님을
더듬어 찾아가는 본성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설명합니다. 한편 비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결코 이성에 위배되거나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실 타종교와 대화를 시도할 때에는 바오로 사도의 아레오파고스 설교를 귀감으로 삼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다른 해석도
있는데 아레오파고스 설교를 실패로 보는 입장입니다. 오늘 독서의 마지막 절을 보면,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갑니다. 그런데
코린토에 가서 그는 더 이상 인간적 지혜나 언변에 의지하지 않고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만을 설파합니다(1코린 1―2장 참조). 어떤 이들은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아레오파고스에서 실패를 겪으면서 변화된 내용이라고 주장합니다. 뛰어난 대화 기술이나 설득력 있고 질서 정연한 논리
전개가, 아테네 시민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해석 가운데 어느 하나가 옳다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두 측면 모두를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고별사’로 남기신 내용으로 보호자이신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슬픈 상황에서 마음이 무거우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상과 대면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만나야 하겠지만 성령께서 오시면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신 분입니다.
오늘, 그분을 더듬어 찾아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목적지까지 가장 빨리 가는 버스를 검색했지요. 약속 장소까지 40분이면 도착하더군요.
그런데 그 시간이면 너무 빨리 도착할 것만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경로를 보니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 질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짧은
경로이고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버스이지만, 약속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30분 정도 더 소요되기는 하지만 공원 앞으로 지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는 버스에 승차했습니다. 공원을 앞을 지나갈 때, 눈이 밝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30분 더 걸렸지만 더 큰
이득을 보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문득 어떤 선택이
중요한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사실 항상 빠른 길만 선택하면서 급하게만 살았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여유 있는 삶 안에서
아름다움을 간직하면서 살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요.
급하게 살아가면서
여유를 갖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빨리 빨리’를 외치면서 우리를 시간의 감옥 속에 가둬 놓기 때문입니다.
감옥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하며, 자유로운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구속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안에 묻혀 살면서 그 시간의 감옥
속에 스스로를 가둬 놓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진리의 영이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신다고 하지요. 하지만 진리의 영인 성령을 보려고 하지
않고, 또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연히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잠시 신앙생활을
쉬시는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너무 바빠서 도저히 성당 갈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성당 가는 것을 마치 남는
시간에 하는 하나의 여가 활동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바빠서 하루 종일 씻지 않는 분이 있을까요? 너무 바빠서 며칠 동안 계속 굶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잠을 전혀 자지 않고 생활하십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잖아요.”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결코 단순한 하나의 여가활동이 아니라,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반드시 해야 하는 활동인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좋아
보이고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것 같아도 사실은 급한 마음으로 인해 시간의 감옥 안으로 나를 계속 밀어 넣을 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내가 성령의 이끎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워 놓는 것은 주님께서
직접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몫이고, 이를 통해서만 진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봄이 오거든 보라.
자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살아 난다(이윤기).
여유 있는 삶.
야구를 좋아해서
종종 프로야구를 시청합니다. 며칠 전에도 프로야구를 보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날은 치열한 투수전이 계속되면서 박빙의 승부로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는 경기였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게임이 좀 더 빨리
진행되면 끝까지 다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게임은 제 생각처럼 빨리 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8회와
9회까지만 보면 모든 경기를 다 보는 것인데, 시간이 없다보니 3아웃이 되어 공수가 바뀌는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집니다. 문득 3아웃이
아니라, 6아웃까지 진행해서 2회씩 공격을 하고 수비로 넘어간다면 어떨까 싶어졌습니다.
사실 이 쉬는
시간을 통해 선수들이 힘을 비축해서 더 멋진 경기를 하게 하는 것이지요. 권투도 3분 후에 1분간의 휴식이 없다면 선수들은 지친 상태로 경기를
해서 관중은 재미없는 경기를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쉼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도약을 위해 힘의 비축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유 있는 삶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인간
내면의 힘
-이기정신부-
언어의 장벽은
국가별, 세대별, 학력별, 분야별, 지역별로 다 있습니다. 요즘 듣는 유커 드론 셀피 이모지 조츠 등도 어르신들에겐 낯섭니다.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 않는 불통의 사람들로 서로들 힘들게 삽니다.
삼위일체란 말, 참
오래 됐지만 이해 안 간다는 분 아직 많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속성을 파악불가 무능한 인간인 점, 파리가 인간을 더 잘 알지요! 믿음이라는 인간
내면의 힘이 그나마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연결하네요.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요한 16,13)”
< 선교는
항상 을의 자세로 >
-전삼용신부-
옛날
중국에서의 일입니다.
공자가
몇몇 제자를 거느리고 여행할 때,
잠시
쉬고 있는 사이에 타고 다니던 말이 농가의 밭에 뛰어 들어가 곡식을 먹었기 때문에 밭주인에게 끌려갔습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자원해서 농부를 설득하겠다고 갔으나,
농부는
자공의 말을 탐탁하게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행은 매우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공자의 뒤를 따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 사람이 농부를 설득해 보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농부에게,
“당신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를 경작하고 있지 않소.
그러니
이 말로 말하면 당신의 농작물을 먹지 않고서는 배길 도리가 없지 않소?”
하고
말하자,
농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설득도
당신과 같이 멋있게 한다면,
이해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겠소.
앞서
왔던 놈과는 다르오.”
하면서
말을 내주었습니다.
만약
누구를 설득하려면 설득을 하려는 사람이 갑이 아니라 설득을 당하는 사람이 갑이 됩니다.
물론
선교를 할 때 우리가 주려고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을 적선한다는 식으로 받기 싫으면 관두라는 마음으로의 전교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우리는
파견된 자이기에 갑의 행세를 해서는 안 되지만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군대로 강요하고 “좋은
건데 왜 안 받아들이느냐”는
식으로 소위 ‘갑질’을
한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집에서
토끼를 키운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풀을 뜯어서 공급해 주었지만 좀처럼 밥을 주는 사람에게 기쁘게 달려들지는 않습니다.
그저
주는 것을 받아서 먹기만 합니다.
그렇더라도
풀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그저 먹고 싸기만 하지만 그래도 주인이 토끼가 살아있기를 바란다면 주어야만 합니다.
주는
사람이 오히려 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해야 하는 대상들도 토끼와 같습니다.
그들이
살기를 바라는 쪽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언제든 거부할 수 있는 갑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받아들여야한다는 식의 접근은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간디도 “나는
그리스도를 존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미사에 갔는데 지금은 백인들 미사시간이니 유색인종 미사시간에 다시 오라고 쫓겨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콧대 높은 아테네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아테네는
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지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곧바로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그 도시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들이 기분 나쁘지 않게 이야기를 할 소재들을 찾습니다.
그러다
찾은 것이 그들 신전에 새겨진 문구였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바오로는
일단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이라
말하며 그들의 기분을 우쭐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설득의 기술입니다.
그
다음에는 문학적 요소들을 찾아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는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진정한
갑으로서의 당당합니다.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다음에 듣겠다고 계속 자존심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자신의 편에 가담한 몇몇 사람들만을 맞아들이고는 바로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갑니다.
이로써
끝까지 거만하게 갑으로 남아 있으려고 했던 이들은 어리둥절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갑인 줄 알았더니 그것은 설득하기 위해 일부러 갑의 대접을 해 준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설득입니다.
주는
사람이 아쉬울 것이 없음을 보여주면 그 주려던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더 생기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은
막연히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뱀처럼 약을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가
선물을 들고 있고 그들이 받기를 원한다면 항상 을의 자리를 지켜야합니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면 다시 갑의 본모습을 드러내면서 결국 그들의 손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양승국신부-
요즘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마치도 올망졸망한 자식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여운 어린 자식들을 남겨 두고 먼 길 떠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우리를
향한 고별사를 남기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복음 16장 12~13절)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는 알쏭달쏭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시는 ‘진리’, 과연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 악이 기승을 부리는 이 세상이지만 그래도 이 진흙탕 같은 세상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세상이라는 깨달음의 진리가 아닐까요?
때로
부담스럽고 때로 거추장스러운 내 이웃, 그래서 피하고 싶은 이웃이지만 그 사람 안에서도 엄연히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시고 하느님께서는 항상 그의
회개와 성장, 그리고 성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계신다는 깨달음의 진리가 아닐까요?
우리네
인생 여정에서 수시로 다가오는 갖은 고통과 시련, 유혹과 십자가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의 진리, 이 구질구질하고 때로 꼬질꼬질한
인간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의 성령께서 활발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깨달음의 진리가 아닐까요?
무력하게도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 끝끝내 적대자의 폭력 앞에 저항 한번 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신 수동의 예수님이시지만, 그 예수님께서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고 물리치시고 승리하리라는 깨달음의 진리, 십자가 길의 여정에서 처참했던 몰골의 바로 그분께서 참된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영원한 불멸의
삶으로 이끌어주실 구원자임을 깨닫게 하는 진리가 아닐까요?
인류
역사상 수많은 현인들이 ‘진리’가 무엇인가 탐구하느라 자신의 한 평생, 그리고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갈구했던 진리를 찾거나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굳이 애써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곧 진리입니다. 그분 입에서 나온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진리였습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던 일거수일투족이 다 진리였습니다.
‘진리’와 관련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불멸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일입니다. 매사에 그분이시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묵상하는 일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스승님의 말씀에 굳은 신뢰심으로 응답하며
그분을 따라 먼 길을 나서는 일입니다.
-조재형신부-
명동 거리에서 많은 외국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중국 관광객들이고, 일본 관광객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은 손에 쇼핑한 물건들을 들고, 거리의 음식들을 사서 먹습니다. 길거리 음식의 특징은 대부분 불로 요리한
것들입니다. ‘회오리 감자, 짜장면, 잡채, 어묵, 호떡, 떡볶이, 닭 코치, 만두, 닭 강정’과 같은 것들입니다. 요즘 같은 날에는 석류, 오렌지, 수박, 딸기, 자몽 주스를 맛볼 수 있습니다. 명동 거리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맛볼 수 있는 음식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노점상들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하는 것
같습니다. 노점상들은 간단한 외국어를 무난하게 구사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명동 거리에 늘 어김없이 함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예수를 믿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때로 그분들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지만 그 방법은 조금 아닌 것
같습니다. 핸드폰은 삼성, 엘지, 애플에서 만든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핸드폰의 장점을 이야기하면
족하지, 다른 회사의 핸드폰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소비자들에게 좋은
느낌을 줄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회사의 핸드폰을 선택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면 그것은
공갈과 협박의 수준입니다.
시골의 공소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저와 함께 간 신자 분들과 공소의 신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미사를 드리려고 하는데 전주 교구의 신부님과 수녀님들께서도
오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알지 못하지만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금세 가족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은 것이, 어제 만난 전주 교구의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은 또 제가 아는
분들과도 친분이 있으셨습니다. 세상은 5사람만 통하면 모든 사람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실감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몇몇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만나면, 우리는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환한 미소는 절망에 빠져있는 이들에게는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고 기다리면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 함께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먼저 가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에게 차선을 양보하면 그 사람은
지금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성령, 위로의 성령, 굳셈의 성령, 지식의 성령,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따뜻함과 온유함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해 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는 흔들어도
진리
-반영억신부-
민주주의 원칙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닙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성 막시밀리안
콜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결국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행한다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을 무장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에페6,14-16).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부르십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이끄는 세상의 많은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진리 안에 더욱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숨기려고 하면 왜곡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없애려고까지 하게 됩니다.”그러나 진리의 영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은 이웃과 세상에 열려있습니다.
한 때‘다빈치
코드’소설이 영화 되어 상영되고, 많은 이야기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입니다. 허구는 허구요, 픽션은 픽션일 뿐입니다.
근래에는‘신천지’라는 이단이 많은 이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와 굴곡 된
성경해석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무리 흔들고 뜯어 고치려 해도 진리인 것입니다. 거짓논리를 통해 진실처럼 보이게 할지라도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지 거짓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정성을 진리를 찾는 것에 두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영적인 지혜, 계시 및 지식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17,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은“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요한1,18).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진실한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자유를 줍니다. 말씀, 예수님, 사랑 안에 자유를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평생
공부
-이수철신부-
평생
공부가 하느님 공부입니다.
평생
하느님을 공부해야 하는 평생 학인學人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공부에 우리 수도자들이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의 성무일도보다 더 좋은 하느님 공부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하느님을 모르면 나도 모릅니다.
하여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無知보다 더 심각한 마음의 병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목표目標요 방향方向이자 중심中心이자 의미意味입니다.
비단
우리 분도회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이들의 일중 가장 중요한 평생 일이 '하느님을 찾는 일'입니다.
하여
요즘 제가 기쁘게 고백성사 방문자나 피정자들에게 해 드리는 일이 있습니다.
"핸드폰
있으시죠. 주십시오. 요셉수도원의 로고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삶의 이정표, 사랑의 이정표입니다.
핸드폰을
이용할 때 마다 이 로고를 보며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랑하십시오.“
라고
말하며 수도원의
로고를 핸드폰 케이스 앞이나, 또는 핸드폰 됫면에
보기
좋게 붙여드리며 늘 하느님을 기억하라 합니다.
얼마전
고백성사후 고백신부님에게도 핸드폰을 주십사 하여 수도원 로고를 붙여드렸습니다.
불암산
배경의 푸른 하늘에
하느님을
상징하는 빛나는 태양은 흡사 성체처럼 보이고
그
안에는 십자가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하느님의 이정표도 없습니다.
마침
어제 써놓은 '하느님 품'이란 시도 떠오릅니다.
-하느님
품은/불암산 품은
하도
넓어라
부처님
절寺도/예수님 수도원修道院도
그
품 안에 있네
오,
넓고 깊어라/신록新綠의 하느님 품!-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사도행전의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온누리에
충만한 하느님 사랑의 현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록新綠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우리 가까이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살아있음이 바로 하느님 체험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없는 듯이 무관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오로의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넘겨 주셨지만,
이제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한, 똑똑한 바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모든
것을 다 알아도 하느님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대로
세상 우상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사람들이 하느님을 잊은 업보입니다.
하여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한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바로
진리의 영, 성령께서 우리를 끊임없는 회개에로 이끌어 주시며
모든
진리를, 하느님을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오늘
복음이 성령의 역할을 명쾌하게 해명해 줍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성령은
진리의 보고를 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하느님의 공부는 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깨달아 알게 함으로 생명과 진리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날을 선사하시며 성령 충만한 하루를 살게 하십니다.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
아멘.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 16,12-13)
젊은
시절에는 참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강론도
길었고 글도 꽤 조리있게
길게 쓸 줄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많은 말이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고 길게 글을 쓸 수가
없게 되더군요.
처음 수련장을
맡아서 수련자들을 가르칠
적에 책을 한보따리 들고
강의실에 들어가곤
하였죠. 방에도 책이
많았습니다. 이제 대부분의 책은
도서관에
내어놓고 방에는 책이 몇 권
없습니다. 꼭 필요할 것
같아서 책장에 꽂아놓은
책들마저도 정리해야 할 듯
합니다.
복음을 그리도
좋아하셨지만 임종 직전,
복음을 읽어드릴까
물어보는 형제에게 "필요없습니다.
저는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있으니까요." 라고
하셨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생각해 보는
오늘입니다.
오늘 내 말을 좀
더 줄이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도록 좀 더 들으면
어떨까요?
진리의 영 안에서 깨달아가는 삶
-기경호신부-
살다보면 찾아지는
것과 주어지는 것들이 있다. 사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찾아내고 깨닫게 된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창조주이시며 지혜이신
하느님 앞에서야 제아무리 대단한 진리라 하여도 한낱 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창조적 깨달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겸손하게 자기중심적이며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진리의 영께서 친히 이끌어주시는 깨달음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완전한 진리는 계시
자체이며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다. 이런 완전하고 통합적이며 총체적인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과 사랑이 절대적인 요건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진리가 무엇인지, 참 삶이 무엇인지,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신다. 따라서
참 인간됨의 길, 참 신앙의 길은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동화되려는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보호자 성령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심판을 확신시켜 준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악행을 할 때 두려움에 쫓기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하는 것은 성령께서 모든 이의
마음에 심판을 선고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 평화가 주어짐을 깨닫게 해주신다.
진리의 영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말씀을 모두 되새기도록 해주신다(14,25-26). 뿐만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해주고
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주신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으나, 백인대장과 예수님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 하고 깨닫게 된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게 된다(사도
9,1-9). 이 모두가 성령의 작용이었다. 따라서 성령의 활동 안에 머물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진리와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자비를 건네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한꺼번에 하느님의 진리를 다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자들에게 주실 수는 없었고, 다음으로 성령께서 가르쳐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복음적인 계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왔으나, 그분의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살아계셔서 항상 진리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는, 영적인 진리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 예술 등 모든 진리에 대해서 밝혀주신다. 신학자와 설교자들만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새로운
진리를 알아듣고 밝히는 것은 아니다. 헨델은 그의 작품, ‘메시아’ 중의 알렐루야 코러스를 어떻게 작곡했느냐고 묻자, “하늘이 열리고, 희고도
장엄하신 하느님께서 그 어좌에 앉아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답변하였다. 한 물리학자는 자연 안에 숨어 있는 물리학의 원리를 발견하는 신비로움
속에서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때때로 사람들은
어떤 생각에 몰두하면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에 부딪친다. 바로 그 순간, 그 문제의 해답이 주어지는 것을 체험한다. 인간의 사고가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의 은혜가 들어온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진리를
점차적으로 밝혀주시고 함께해 주신다. 우리도 주님께 기도하자! 주님, 저에게 당신의 진리를 풍부히 드러내시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도구가
되게 해주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소서.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이영근수사-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진리의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진리로 기름칠
되고
거룩해지게
하소서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소서.
진리의 영이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한상우신부-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하느님
뜻을 가로막는
주체는 언제나
어리석은 우리자신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진리는 없습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감사가
있습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서로를 사랑하게
하십니다.
하느님때문에 기뻐하게
합니다.
사랑때문에
존재하는
우리들입니다.
진리의
참모습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십자가와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가짜입니다.
하느님의
주도권을 믿고
따르게하는 진리의
영이 우리가운데
참으로
계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정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느님
사랑임을 알려
주십니다.
삶에
대한 놀라운
진리도 하느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일어납니다.
깨닫고 배워야
할 진리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진리의
성령을 받으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느님
사랑뿐임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을
구하는 진리의
시간되십시오.
|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