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0927. 묵상글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 꿈 깨라시는 주님께 우리는?. 등 )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27 02:27
- 꿈 깨라시는 주님께 우리는?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오늘 복음은 어제 첫 번째 수난 예고에 이은 두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그런데 이 예고를 하시면서 이 말을 귀담아들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 예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귀담아들었다면 귀담아들으라고 굳이 얘기하실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이어지는 얘기를 뜯어보면 여전히 귀담아듣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복음이 얘기하지만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단정하냐 하면 그 뜻이 감춰져 있어서 알아듣지 못했다고 하지만
곧이어 하는 말이 그 뜻이 뭔지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싫어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너무나 싫을 때 두려운 법입니다.
너무 싫을 때 두렵고 두려울 때 마주하기보다는 피하기 마련인데
제자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이 싫었고 두려웠으며
그래서 돌아가신다는 것의 뜻이 뭔지 묻는 것조차 싫었던 겁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본 제자들로서는
예수께서 그들에 의해 돌아가시리라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지만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것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것을 뛰어넘는 거라는 반응입니다.
사람의 업적을 뛰어넘는 신적 업적을 보면서
사람의 아들이기에 죽어야 한다는 주님 말씀을
믿기 어려웠고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들의 꿈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꿈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인데
군중의 반응을 보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장밋빛 꿈 깨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사람의 아들이고 그래서 돌아가실 거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꿈 깨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자들처럼 못 들은 척하거나 못 알아듣는 척할까요?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파스카의 주님
<파스카의 여정, 파스카의 기쁨>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예레31,10ㄹ)
요즘 수도원 경내에는 두 야생화 들꽃의 전성시대입니다. 유홍초와 달개비인데 거의 주목받지 못할정도로 참 작고 미미해 보입니다. 매일 새롭게 폈다지는 하루살이 들꽃들이요 곱고도 영롱하기가 밤하늘 별들같습니다. 저는 일명 <파스카의 꽃>이라 부릅니다. 하늘의 별들과 땅의 꽃들하면 떠오르는 <땅의 행복>이란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땅의 행복이라지만 <파스카의 행복>으로 읽어도 그대로 통한다 싶습니다. 엊그제 지인에게 가장 아름다운 곳 소개해드리고 싶다며 안내한 곳이 수도원 하늘길이 끝나면서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모서리 소나무밭 그늘진 곳, 달개비꽃밭이었습니다. 이어 28년전 <달개비꽃> 시를 감상했습니다.
“오!
하느님이 밤사이
쏟아 놓은 남보랏빛 생명의 보석들
아주 낮은 그늘 속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져갈 수는 없는 생명의 보석들
달개비꽃!”<1997.8.25.>
얼마전 써놓은 또 하나의 파스카의 꽃, 유홍초입니다. 많이 나눴지만 애착이 가는 시라 늘 읽어도 새롭습니다.
“‘영원히 사랑스러워’
꽃말만으로
행복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보아주지 않아도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하다
해마다 거기 그 자리
때되면 한나절 폈다지는 꽃이름도 예쁜
유홍초 야생화
사랑합니다
수줍게 고백하는 유홍초
부끄러워 빨갛게 물들었네”<2025.9.19.>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은 파스카의 주님은 두 번째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얼마전 충격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연이어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니 제자들은 멘붕 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첫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후엔 산에서의 변모체험과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주심으로 제자들의 사기를 북돋아 용기백배 힘을 주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파스카의 사건>인지 깊이 각인시코자 하셨음이 분명합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니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은총으로 주님 부활을 체험해야 깨달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신비>였던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의 영성’뿐이요, 파스카의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기쁨 중에 ‘늘 새롭게 시작하는’, 참으로 탄력좋은 파스카의 여정을 살아가는 믿는 이들입니다. 즈카르야 예언자의 셋째 환상이 참 고무적이요 파스카의 주님의 은총을 미리 보여 주는 듯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파스카의 주님의 은총으로 실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딸 시온이 상징하는 바, 파스카의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요, 언젠가의 그날은 바로 오늘이 됩니다.
바로 이런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여정을 살았던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입니다. 성인이 살았던 시대는 30년 전쟁과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이 사회전반에 영향을 끼친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성인은 프랑스의 가난한 농부의 육남매중 셋째로 태어날 때부터 가난에 익숙했고 평생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며 이들의 복지에 온힘을 다했습니다.
성인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제자가 되어 어렵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활동을 더욱 넓혀갑니다. 가난한 지역의 본당신부가 되어 본당의 ‘애덕회’와 귀족 부인들을 중심으로 ‘애덕부인회’,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 ‘선교사제회(라자로회)’를 설립하고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치다가 수녀회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루이즈 드 마리악 성녀를 초대 원장으로 ‘애덕수녀회’를 설립하여 오늘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인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고 가난하게 하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성인은 진정한 신앙은 복음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1660년에 79세에 선종한 빈첸시오 사제는 1737년에 시성되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는 그를 모든 자선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파스카의 주님을 성인을 통해 활동하심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근심에 찼던 마음을 위로해 즐겁게 하리라.”(예레31,13ㄴ). 아멘.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라는 말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은 ‘순명’, ‘순종’을 표현하는 ‘쉐마’라는 단어는 단순히 청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는 것을 넘어 말씀하시는 분의 명을 ‘마음의 귀에 담아 행동에 옮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신명 28,1)
그래서 말씀은 ‘믿음의 순명’과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알아듣기 어려운 성경본문을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장애라고 여겼던 대목들이
실로 크고 거룩한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필로칼리아)
사막의 마카리오는 역시 믿음으로 먼저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귀담아듣고’, ‘믿음으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귀에 담겨진 말씀이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말씀을 실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말합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가 살아야 할 신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주님!
말씀을 귀에 담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나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면 비록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십니다.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도 환자가 협조하지 않으면 병을 고치기 어렵습니다. 환자가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의사는 환자를 위해서 더 좋은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5년 전 코로나 팬데믹 때입니다. 신문사의 주된 업무는 ‘홍보’인데 다닐 수 없었습니다. 변호사 형제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영주권’ 신청을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변호사의 의견을 듣고 영주권 신청 절차를 밟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영주권이 나왔습니다. 영주권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미국에 더 머물 수 있게 되었고,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루게릭병으로 투병하는 형제님을 방문했습니다. 손가락만 움직일 정도로 병세가 나빠졌지만, 형제님은 밝은 모습으로 저를 맞이했습니다. 형제님은 눈을 이용해서 컴퓨터를 사용하였습니다. 큰 노력과 눈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서 공부하였고, 자료를 검색하였고, 세상과 소통하였습니다. 지난달에 저는 요양병원으로 옮긴 형제님을 방문했습니다. 이제는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던 형제님은 스마트 안경을 검색했습니다. 스마트 안경이 있으면 이제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고도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스마트 안경은 형제님이 감당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스마트 안경만 있으면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도움을 청할 수 있겠다는 형제님의 간절함을 보았습니다.
저는 몇몇 분에게 형제님의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표징처럼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형제님의 간절함은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교우들의 정성을 모으니 스마트 안경을 마련하고도 충분하였습니다. 저는 봉사자들과 함께 병원을 찾아가서 형제님과 함께 스마트 안경을 주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걷지 못하는 사람의 간절함을 보시고 걷게 해 주셨습니다. 자비를 청하는 소경이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웃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찾아올 수 있었던 중풍 병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교우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형제님은 스마트 안경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오늘의 화답송도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어둠은 빛을 이긴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일지라도 작은 볼 꽃이 있으면 어둠은 걷히기 마련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두려움과 걱정의 바람은 우리의 마음을 또다시 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리라는 희망으로 힘차게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 공동의 가정인 이 지구와 평화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시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26일 금요일- 서른아홉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비폭력의 삶에 투신하기
"복되어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신학자 김지선 그레이스(Grace Jisun Kim)은 우리가 부단히 평화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이 노력은 단순히 인간 사회 내부의 갈등 해결을 넘어, 우주적 차원의 평화, 즉 인간과 지구 전체 생태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 회복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갈릴래아의 어느 산 중턱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복되어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이 땅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전 세계 교회 협의회(WCC)는 우리가 이 지구와 평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 인간 가족 안에 깊이 스며든 지배의 문화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 땅과 그 안의 모든 피조물을 우리의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 배치하고는 우리 스스로 창조된 세상의 중심이라고 말하게끔 만들었니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된 세상의 정점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구가 스스로를 정화하고 보충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이 세상의 풍요로운 선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 선물들은 인간이 생존하고 번영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지속 불가능한 속도로 소비하고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파괴성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인류세(Anthropocene: 인간(Anthropos)과 시대(Epoch)를 합친), 즉 인간의 활동이 지구 환경과 생명체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학대와 폭력, 파괴로 특징을 이루는 시대입니다. 인류와 창조된 세상을 괴리시키는 것은 폭력적인 분리이기에, 우리는 이 분열을 다시 잇고 치유하기 위해 평화를 향해 일해야만 합니다. [1]
오랫동안 비폭력 활동가로 일해 온 존 디어 신부(Father John Dear)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이 땅에 대해 자행하는 우리의 폭력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수십 년간 저는 우리 인간이 어머니인 지구와 이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에게 행한 파괴를 목격해 왔습니다.... 저는 우리의 구조적인 탐욕과 폭력, 그리고 파괴적인 습성으로 인해 죽어가는 이 지구와 이 지구의 피조물들의 고통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저는 비폭력에 대한 저의 비전과 어머니 지구의 지속적인 파괴 사이에 어떤 연결점을 찾지도 못했고, 또 그런 느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집에서 산상설교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진복팔단에서 "복되어라, 온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신 말씀이 전에 없이 특별하게 제 눈 앞에 들어왔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 "온유함"이 비폭력에 대한 성경의 용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시대의 간디처럼, 옛 시대의 도로씨 데이처럼, 옛 시대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처럼, "복되어라 비폭력을 옹호하며 비폭력을 살아가는 사람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온유한 사람들과 순수한 사람들, 비폭력의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비폭력의 삶은 창조된 세상과 이 세상의 피조물을 하나로 일치시켜 줍니다.
자명하게도, 인간의 폭력적인 삶은 피조물과의 급격한 단절(abrupt discord)을 초래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과 군사적 긴장, 핵무기, 재앙을 초래하는 기후 변화의 시대에는 이런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평화의 하느님과 비폭력의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비폭력을 실천하라고 초대해 주십니다. 이 초대에 참으로 응답할 때 비로 우리는 우리의 환경 파괴를 멈추고 우리가 함께 에덴 동산을 보살필 것이며 창조된 세상을 본래의 모습대로 평화로운 모습으로 회복시키게 될 것입니다....
환경 파괴는 물론이고 끊임없는 전쟁과 긴장, 기업들의 탐욕, 구조적 인종차별,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평화와 비폭력, 새 창조, 우리 앞에 펼쳐진 약속된 땅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앞에 펼쳐진 창조된 세상의 현실의 본질을 보기 위해 열린 눈을 갖고 그 앞에 그들의 동반자로서 현존하면서 그 모두를 끌어안고 존중하며 평화의 선물로 맞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언제나 비폭력이라는 경계 안에 머물며 비폭력의 윤리와 영성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합니다! [2]
우리 공동체 이야기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비폭력 저항을 통해 평등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영감을 준 예언자였습니다. 사회의 변화는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다른 이들과 함께 총기 폭력이 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공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함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하며 이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행동하기 위해 준비합시다!
—Susan P.
References
[1] Grace Ji-Sun Kim, Earthbound: God at the Intersection of Climate and Justice (Orbis Books, 2025), 140.
[2] John Dear, introduction to They Will Inherit the Earth: Peace and Nonviolence in a Time of Climate Change (Orbis Books, 2018), 2, 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Toa Heftiba, untitled (detail), 2018,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위 사진은 갈등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두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관점이나 배경은 다르지만, 힘이 아니라 용기로 공통된 가치—예를 들어 사랑, 평화, 정의—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서로를 경청하고 바뀔 수 있도록 자신들을 내맡기고자 하는 더 힘든 길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어둠 너머에는 이미 큰 빛이 비치고 있고, 그 큰 빛은 이미 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다른 어떤 성경 번역본을 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무언가가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막았다."(Something prevented them from grasping what he meant...)라고요.
우리가 어떤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을 때, 그 배후에는 항상 어떤 심리적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이란 대개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진실을 직면하는 것을 피하게 만들고, 결국은 회피로 이어집니다.
사실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대상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실일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더 두려워했던 것은 그 진실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도전할 것이라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진실을 직면하기를 꺼렸던 것입니다. 또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세주라고 여기던 분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 하나만 들어있는 작은 그림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용기를 내어 이 진실을 직면하려 했다면 그들은 이 진리 안에서 큰 그림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큰 그림 안에는 이 모든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는 거대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느님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큰 그림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작은 그림에 압도되어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야가 이 작은 그림에 고정되어 있어서 그 너머를 볼 수 없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반응하는 현실인지 모릅니다. 그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진리는 두려움의 대상이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진리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직면하게 할 때 우리는 그 진리를 두려워하고 더 이상 그 진리 너머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회피에 많은 핑계를 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그런 거야." "이래서 이런 거야." 등등....
하지만 우리의 눈을 조금 더 크게 뜨고 우리의 시야를 조금만 더 넓히려는 용기를 가지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커다란 희망의 빛을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작은 그림 안에서마저 비치고 있는 하느님 사랑의 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어두움에도 하느님 사랑의 빛은 이미 비치고 있지만 우리의 두려움이 우리를 압도하여 그 빛을 볼 수 없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어둠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어른들이 빛을 두려워하는 것은 참 이해하기 힘들다!"
살아오면서 경험한(?) 어둠과 부정적인 것들에 압도되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 세상에 이미 비치고 있는 빛과 긍정을 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잘 대변해 주는 말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사는 게 죄야!" 하고 말하는 것은 이런 심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요한 복음 저자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요한 3,19).
우리가 정말로 어둠을 더 사랑하는가요?
아닐 텐데... 그러나 세상이 돌아가는 현실은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불신이 더 큰 불신을 만들고, 미움이 더 큰 미움을 만드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떤 때 우리는 말합니다. "인간은 안 돼!" 하고요.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만 본다면요....
하지만 우리 인간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을 보고자 하고, 또 그 하느님께서 우리 역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선과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진리를 믿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이어야 합니다. 물론 이 진실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려면 우리가 한동안은 겪어야 할 고통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나', 즉 에고를 버려야 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사랑이라는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는 그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가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하시지 않습니까?!
이 "나를 따라라!" 하시는 말씀을 강압적인 명령으로가 아니라 "나에게 온전히 의지하라!"라는 정말 부드럽고 자상한 사랑의 초대로 이해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큰 힘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내'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 힘든 일이고 '내' 십자가를 지는 일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일이겠지만, 우리에 대한 그지없는 사랑 때문에 몸소 앞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사랑의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을 따라간다면 우리도 굳은 용기를 내어 그분을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그리고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우리 세상에는 이미 온 세상의 어둠을 다 비추고도 남을 만한 무한히 큰 빛이 현존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 빛을 받고자만 한다면 우리도 역시 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전부라고 여기는 작은 그림 너머를 보기 위해 눈을 들어 봅시다!
이 너머에 있는 빛을 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둠이라고 여기는 것 안에서도 이미 비치고 있는 희망의 서광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이 남은 삶을 이 희망의 빛에 시선을 고정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X X X X X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나라는 해외에서도 인정하는 안전한 나라입니다. 일반 치안이나 범죄율이 매우 낮으며, 해외 여행자들의 경험담을 보면 총기나 강도 사례가 거의 없으며 소매치기조차 없다고 소개합니다. 심지어 카페에 휴대전화를 놓고 가도 그 누구도 가져가지 않는 정직한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국제 안전 지표에서도 늘 상위권입니다.
이렇게 안전한 나라인데도, 솔직히 약간 음침한 곳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때 뒷골목에서 깡패를 만나서 매 맞고 돈 빼앗긴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50원밖에 없다고 ‘열중쉬어’하고 맞았습니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 뒷골목이 안전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뒷골목만 들어서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자그마치 40년도 더 넘은 일인데도 말입니다.
부정적인 일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자기 삶에서 지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인데, 부정적인 기억이 그 좋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며,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긍정의 뉴스가 가득했으면 합니다.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뉴스가 사라지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표징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위대함’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움은 또 다른 부정적인 놀라움에 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순간 뒤에 십자가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사람들은 모두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의 구원이 열린 것이지요.
영광스러운 기적만 바라보려 하면, 어느 순간에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주님의 가려진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루카 9,45 참조). 주님께서는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십자가라는 고통과 시련이 주어지는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길에 확실하게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휴식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휴식은 곧 회복인 것이다(데일 카네기).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일생을 가난한 이와 함께 한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 /
빈첸시오 드 폴 사제는 1581년 프랑스 남서부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장의 여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15세 때에 고향 인근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수학했다.
당시 그는 유명한 변호사인 코메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하며 경제적 어려움 없이
툴루즈의 대학서 신학을 공부하고 1600년 스무 살 나이로 사제품을 받고도 공부를 계속했다.
성인은 1605년 어떤 부인의 기부금을 받기 위해 마르세유에 갔다가 배를 타고 나르본 돌아오던 중에
이슬람의 해적에게 붙잡혀 튀니지에서 노예로 팔려 가는 불운을 겪었다.
노예 생활 중 그는 한 배교자의 집에 팔려 갔다가 주인을 가톨릭 신앙으로 이끌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국왕이 있는 파리 궁전의 전담 신부로 파견되었고,
귀족들의 모임에 참석하면서도 과거 노예 생활 중에 겪은 고통을 잊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수입을 나누곤 했다.
1613년 그는 왕실 함대사령관의 전속사제 겸 가정교사로 임명되어,
그곳 하인과 소작인들을 돌보연서 시골 사람들의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그곳 가난한 농부의 병자성사를 집전하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 깊이 깨닫고는 스스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자 서원했다.
그래서 그는 리옹 근처 가난한 지역의 주임신부로 사목을 시작했다.
성인은 처음으로 마을에 ‘애덕회’를 설립,
본당 신자들과 함께 가난한 가정을 돕는 일에 힘썼다.
1619년에 그는 공디 백작 부부의 간절한 부탁으로 그곳에서 자유롭게
선교 활동하는 것을 조건으로 전속 신부로 생활했다.
그러면서 백작이 관할하는 갤리선의 죄수들이 받던 비인간적 대우를 개선하고
그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고 영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 후 그는 시골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노력하며,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며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632년부터 파리에서 성직자들 모임 결성과 30년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구호사업에 헌신하며,
매일 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돌보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애덕 부인회’를 설립해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러한 봉사를 이어갈 수녀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애덕의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가 오늘날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이다.
이렇게 성인은 가난한 이들에서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고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그는 또한 가난을 유발하는 구조적 환경을 개선하고 제거하는데
적극성을 보인 탁월한 인본주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1660년 9월 27일 파리에서 선종하여 라자로회 파리 본부에 묻혔다.
그는 1729년에 시복되어,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레오 13세 교황은 1885년에 그를 모든 자선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치시면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빈첸시오 성인도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는
그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쳤다.
오늘날 수많은 이가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으며,
지금도 빈첸시오 등 제 단체가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다.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예수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그때에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하신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다.
이렇게 그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 손에 넘겨진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정확히 알지를 못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관해서는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
예수님도 좋은 때가 계셨다.
당신께서 하신 일들을 모두 놀라워하고 있기에.
그만큼 선포하신 게 제대로 전해진 것이라 할게다.
이처럼 모든 이가 예수님을 칭찬하고 놀라워한다.
아무도 쫓아내지 못하는 마귀 들린 아이를 치유하셨기에.
그런 와중에서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의 시간에 죽는 이야기를 왜 하시는가?’라며 몹시 의아해하면서도
감히 무슨 뜻인지를 여쭈어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에 전혀 연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찬물 뿌리듯이
수난의 때를 예고하시며 미리 염두에 두시란다.
그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웠단다.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고, 실감나지도 않았으리라.
이렇게 그분께서는 좋은 때라고 마냥 좋아하지 않으시고,
나쁜 때라고 거부하지 않으셨다.
어떤 때이든 아버지 뜻대로 살려 하셨다.
이렇게 많은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아예 작정하시고 정작 수난을 예고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 수난이 부활을 향한 하나의 커다란 여정의 길이라는 것을 제자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했다.
그 뜻이 너무 깊디깊게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죽음과 부활로 인류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들 눈에는 받아들이는 것도,
묻는 것조차도 신비일 따름이었다.
“귀담아들어라.”라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제자들은 제대로 알아듣질 못했다.
아마도 자기중심적으로만 그것을 듣기에 그럴게다.
그분 마음 깊은 곳을 듣지 못하니 아무리 중요한 진리의 말씀일지라도 어디 들릴 리가.
상대의 처지에서 들어주고 깊이 헤아려 주면,
다 기쁨으로 다가오리라. 주님과 이웃과의 만남에서도 깊이 듣는 것이,
오히려 말하는 것 보다 더 필요할 게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려고 우리에게 오셨다.
그분께서 받아들인 그 엄청난 수난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을 거두어
인류를 구원하려는 아버지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일 게다.
그분은 분노에는 온유함을 보이셨고,
증오에는 사랑을, 죽음에는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분이 보여 주신 그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우리가 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을 겪어 낸 이만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게다.
예수님 죽음과 부활을 몸소 체험할 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과연 누구신지를 온전히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늘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그렇지만 예수님은 당신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셨다.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께서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어,
당신 생명에 영원히 우리를 참여시키셨다.
우리는 귀담아들을 건 듣고 포기할 것은 과감히 하면서 남과 더불어 오순도순 살아야만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귀담아들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당신 영광을 드러내려면,
들어야만 할게다.
----------------------------------------------------
==========================================================
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늦게 올라오거나 다음날 또는 게재 아니될 수도 있습니다.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X X X X X
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오전 시간대?)
----------------------------------------------------
2509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 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43ㄴ-45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벌써 두번째로 당신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시는데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원래 듣고 싶지 않은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들었다해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면 금새 잊혀지는 법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드시는 비유를 들었을 때와는 달리 그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묻지 않는 것을 보면, 제자들도 그분 말씀이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이해하진 못해도 예수님께, 그리고 자신들에게 뭔가 안좋은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낀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다다르시면 수많은 군중들이 자기들 겉옷까지 벗어 바닥에 깔며 그분을 열렬히 환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 한 마디, 직접 보여주시는 기적 하나에 경탄하며 열광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금새 돌변하여 예수님을 비난하고 배척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되지요. 그것이 우리가 이미 그 결론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사람들의 환영과 열광, 그리고 비난과 배척... 서로 극단적으로 멀어보이는 이 두가지 태도는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비난과 배척이 자신들과는 아주 먼 ‘남의 일’이기를 바라는 건 군중들의 환영과 열광을 바탕으로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려는 제자들의 바람일 뿐이지요. 정작 양쪽 모두에 직면한 당사자인 예수님께는 둘 사이의 경계가 무의미합니다. 당신을 떠받드는 열광에도 교만해지지 않고, 당신을 밀어내는 배척에도 흔들리지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오늘의 제1독서에서는 즈카르야 예언자가 본 환시를 통해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완성된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중 오늘 복음과 연관되는 특징적인 구절은 이 부분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 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하느님은 물질적인 돌로 세운 성벽을 없애고 활활 타오르는 불의 벽으로 예루살렘을 둘러싸주겠다고 하십니다. 불로 둘러싸이면 많은 민족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지만, 이 불은 모세가 목격한 떨기나무를 둘러싸고 있던 그 불, 활활 타오르면서도 나무를 태우지 않는 ‘성령의 불’입니다. 우리를 서로 배척하고 단절되게 만드는 더러운 영과 달리, 성령은 이해와 포용을 통해 우리를 일치하게 만드는 영이시기에, 그 영으로 예루살렘의 벽을 세우신다는 건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두가 서로 일치하여 하나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지요.
다시 오늘 복음으로 돌아와서, 나의 인간적인 기준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고 그 사이에 높은 벽을 세워 나쁜 것이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들면, 작은 고통과 시련에도 이리저리 크게 휘청대느라 구원의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 그분 뜻을 중심으로 살아가면 세상이 규정하는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같은 구분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지요.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게 주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 말씀이 내 뜻이나 기대와 달라도, 그 말씀대로 따르면 당장 손해보거나 희생할 게 뻔해보여도 묵묵히 주님 말씀대로 살면, 주님께서 내 삶 한가운데에 단단히 자리를 잡고 나를 좋은 길로 이끌어주실 겁니다.
----------------------------------------------------
================================================
================================================
“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59
9월27일 [성 빈첸시오 드폴 사제 기념일/연중 제 25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수원교구 도승현 베드로(시화성베드로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비참함을 서로 나누십시오!>
평생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사목자들을 뵐때마다 큰 존경심을 감출수 없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가 중요한 회의 때마다 거듭 강조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은 너무나 아름답고 의미있는 슬로건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난한 이웃들의 삶속으로 들어가 그들 가운데 머물며 그들과 동고동락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무한한 자기 낮춤과 포기와 희생이 요구됩니다.
이런 저런 불편함과 피곤함,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과 일상적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한 미소와 함께 항상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며 그들의 이웃이요 친구, 동반자요 목자로 살아가시는 사목자들에게 주어질 주님의 축복과 상급이 클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자신의 삶의 모토로 삼은 분들, 그리고 그 꿈을 이룬 분들을 교회는 시복시성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요셉 코톨렌고, 요한 보스코, 마더 데레사...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빈첸시오 드 폴 사제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빈첸시오 신부님이 하셨던 수많은 일들을 열거해보면 마치 거짓말 같습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한 인간이 어떻게 이 많은 영혼을 구할 수 있었을까? 이토록 훌륭하셨던 빈첸시오 신부님이 하느님 앞에 늘 되풀이하셨던 기도는 바로 이런 기도였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몸을 주님 당신의 심부름꾼으로 써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한번은 빈첸시오 신부님이 노예선의 지도 신부로 사목하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발목과 팔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 정신없이 노를 젓는 죄수들의 모습은 빈첸시오 신부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죄수들의 생활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쇠사슬에 닿은 피부는 벗겨져 항상 피가 흘렀습니다. 그들의 어깨와 등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채찍 자국들이 굵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마에는 죄수임을 표시하는 쇠도장이 찍혀있었습니다.
자신도 직접 몸으로 노예생활을 체험하셨던 빈첸시오 신부님이셨기에 그런 죄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잔인무도한 간수들을 타일러 매질을 못하게 했었고, 죄수들 앞에 무릎을 꿇어 그들의 상처를 일일이 치료해주었습니다.
오늘 하루 온 종일 우리들의 내면에 자비의 목자 빈첸시오 신부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형제들이여, 이 약한 사람들에게 가십시오. 그들과 함께 약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그들의 연약함을 느끼십시오. 그들의 비참함을 서로 나누십시오.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짊어지십시오. 그러면 이 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여러분을 짊어지고 하늘나라로 올라갈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먼지가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이 하느님께 되돌아가기 전에, 젊음의 날에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돈 좀 씁시다!>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 원이 예금된 통장과 1억 7천만 원가량의 주식이 숨겨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생동안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 쌀을 사다 먹고 남이 주는 야채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온 나뭇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만 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매일 입버릇처럼 자신은 200살까지 살 것이라고 말했지만 운명은 그 돈을 쓸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절약하는 것만 미덕일 때가 있었습니다.
아껴야 산다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쓸데없이 돈을 쓰면 낭비이고 그것도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아끼는 것만을 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야우찌의 인생관은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행복인 것이었습니다. 굶어도 통장 액수만 보면 배가 부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 삶입니까?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 재물이 쌓이는 것으로 기쁨을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저렇게 쓰지 못하고 남기는 돈은 나에겐 후회가 되고 가난한 이들에겐 서러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구나 성당, 혹은 본당 단체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지나치게 돈을 모으는 모습입니다.
이미 많은 돈이 있고 매년 규칙적으로 들어오는 돈도 있지만 다른 단체와 비교하여 더 큰 모습을 보이기 위해 저축하고 또 저축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인색한 단체라는 평을 받습니다.
세속적 마인드가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저는 그런 단체를 보면 입버릇처럼 “돈 좀 씁시다”라고 말합니다. 선임이 아껴가며 모아놓은 돈을 쓰게 만드는 못된 신부가 될 수는 있지만 왠지 돈을 모으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성당들도 돈을 써야 합니다. 건물을 비싸게 짓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주위에 돈을 뿌려야합니다. 그 혜택을 받은 이들이 차후에 새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뿌리는 씨가 없으면 나중에 추수할 것이 적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쓸 수 있고 또 그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다면 다 써버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고 말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주님은 당신 뜻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젊은이가 즐기는 것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저도 어렸을 때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하루를 정말 행복하게 산 날에는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죽음도 두려워합니다. 즐길 수 있을 때는 즐기는 것도 좋고 쓸 수 있을 때는 써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임플란트를 대대적으로 하고 계셨었습니다. 돈은 충분히 가지고 계셨었지만 임플란트를 하려는 결정은 하지 못하고 몇 년을 미뤄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돈이 아까워 고생만 하시다가 큰마음 먹고 돈을 쓰신 것입니다. 잇몸이 약하여 잇몸 안에다 인공 연골도 넣으셨습니다.
오랜 치료 기간이 마무리되어 가서 마지막 인플란트 치아를 넣는 약속을 잡고는 결국 그것을 끼우기 이틀 전에 입원하셔서 다시는 퇴원하지 못하셨습니다.
죽만 드시면 되는데 임플란트를 굳이 낄 이유도 없었습니다. 돈도 쓸 때가 있습니다. 저희가 더 일찍 임플란트를 하도록 종용해 드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습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돈 좀 씁시다. 돈을 안 쓰면 자신도 망하고 나라도 망합니다. 돈은 피와 같습니다. 돌아야 삽니다.
자기 지갑 속은 물론이고 교회 단체나 본당들도 돈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며 빨리 털어버리고 쓸 수 있을 때 삶도 즐거워지고 교회도 젊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아봐야 썩습니다. 뿌려야 잘 사는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면 비록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십니다. 아무리 유능한 의사라도 환자가 협조하지 않으면 병을 고치기 어렵습니다. 환자가 어디가 아픈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의사는 환자를 위해서 더 좋은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5년 전 코로나 팬데믹 때입니다. 신문사의 주된 업무는 ‘홍보’인데 다닐 수 없었습니다. 변호사 형제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영주권’ 신청을 하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저는 변호사의 의견을 듣고 영주권 신청 절차를 밟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영주권이 나왔습니다. 영주권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미국에 더 머물 수 있게 되었고,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루게릭병으로 투병하는 형제님을 방문했습니다. 손가락만 움직일 정도로 병세가 나빠졌지만, 형제님은 밝은 모습으로 저를 맞이했습니다. 형제님은 눈을 이용해서 컴퓨터를 사용하였습니다. 큰 노력과 눈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서 공부하였고, 자료를 검색하였고, 세상과 소통하였습니다. 지난달에 저는 요양병원으로 옮긴 형제님을 방문했습니다. 이제는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던 형제님은 스마트 안경을 검색했습니다. 스마트 안경이 있으면 이제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고도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스마트 안경은 형제님이 감당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스마트 안경만 있으면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갈 수 있고, 도움을 청할 수 있겠다는 형제님의 간절함을 보았습니다.
저는 몇몇 분에게 형제님의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표징처럼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형제님의 간절함은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교우들의 정성을 모으니 스마트 안경을 마련하고도 충분하였습니다. 저는 봉사자들과 함께 병원을 찾아가서 형제님과 함께 스마트 안경을 주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걷지 못하는 사람의 간절함을 보시고 걷게 해 주셨습니다. 자비를 청하는 소경이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웃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찾아올 수 있었던 중풍 병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교우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형제님은 스마트 안경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오늘의 화답송도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어둠은 빛을 이긴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일지라도 작은 볼 꽃이 있으면 어둠은 걷히기 마련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두려움과 걱정의 바람은 우리의 마음을 또다시 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리라는 희망으로 힘차게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쳐 주시는 것을 목격한 군중은 몹시 놀랍니다. 같은 구절에서 ‘놀라다.’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쓰이면서 강조됩니다(루카 9,43 참조). 여기에 쓰인 동사들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라, 강한 충격에 압도당한 듯 정신이 멍하고 넋을 잃은 상태와, 거룩함과 경외심을 느끼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제자들과 군중은 하느님께서 위대하시고 두려운 존재이시라고 느낍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일반 대중이 아니라, 앞으로 당신을 선포해야 하기에 당신을 잘 알아야 할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시는 하느님께서는 권능을 지니신 분이지만, 이 권능은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는 사랑에서 나오며, 이 사랑은 수난으로 절정을 맞이할 것이라는 뜻을 담으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여쭙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는 그 말씀의 뜻이 감추어져 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9,4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 들은 말씀을 마음에 담지 않으면 그 말씀은 나에게서 사라지지만, 알아듣지 못해도 소중히 여기며 기억하면 언젠가 나에게 생명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성모님께서 이러한 본보기셨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을 모든 제자의 본보기로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예수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44-4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그러나 제자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보았고, 기적을 체험했지만,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어질 구원계획을 온전히 알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권능과 영광만 보고, 십자가와 죽음을 통한 구원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했기에 말씀의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도들의 증거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분을 현세적 문제 해결자나 개인적 편익의 공급자로만 생각하며 따를 때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을 우리의 욕심과 집착에 팔아넘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분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기 : 성경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구원의 계획을 묵상하고 깨닫는 것이다.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 이해한 말씀을 삶의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 그리스도를 내 삶 속에 강생시키는 것이다.
전하는 신앙이 참되도록 준비하기 : 내가 그분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도 없다. 먼저 내 삶 속에서 신앙을 살아야 다른 사람에게도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단순한 지식이나 기적 체험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속에서 그분을 온전히 알아가는 과정이다.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체험하며 살아갈 때, 참된 제자로서 신앙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오늘 하루, 나의 신앙을 점검하며, 예수님을 내 삶 속에서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 묵상해 본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며,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준비를 한다.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을 올바르게 알고, 사랑하며 따르는 자세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리스도를 단순한 편리함이나 현세적 문제 해결자로만 여기지 말고,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구원자로 알아보고, 올바른 신앙과 삶으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하자.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진정한 구원의 증거가 되고, 다른 이에게도 그리스도의 빛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의 손길처럼 끝까지>
루카 9,43ㄴ-45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님의 손길처럼 끝까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믿음의 손길에
불신의 손길이지라도
믿음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희망의 손길에
절망의 손길일지라도
희망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사랑의 손길에
미움의 손길일지라도
사랑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기쁨의 손길에
고통의 손길일지라도
기쁨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겸손의 손길에
오만의 손길일지라도
겸손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온유의 손길에
난폭의 손길일지라도
온유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존중의 손길에
혐오의 손길일지라도
존중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포용의 손길에
배척의 손길일지라도
포용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해방의 손길에
억압의 손길일지라도
해방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환대의 손길에
거역의 손길일지라도
환대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축복의 손길에
저주의 손길일지라도
축복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살림의 손길에
죽임의 손길일지라도
살림의 손길이어라 끝까지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에게 십자가는 끌어안고 가야 할 은총입니다.>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3ㄴ-45)
1)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과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들과 설교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일’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표현 그대로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하는데”는, 사람들이 놀라기만 하고 믿음을 갖지 않은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믿은 사람들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이 말을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51)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 위에서 오르내린다는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신기하고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는 위대한 예언자가 아니라, 예언자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 즉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생살이에서 만나는 모든 어려움에 대해서도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그것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게 되는 기도이고, 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2)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이 말’은, 바로 이어서 말씀하신 ‘수난 예고 말씀’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그동안 주셨던 가르침들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두 가지 뜻을 하나로 합해서 생각하면, 당신이 십자가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잃지 말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귀담아들어라.’는 마음에 담아두라는 뜻이 아니라, 잘 듣고, 능동적으로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특히 실천해야 할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마음속에 담아두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고, ‘온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생각만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마음속에 담아두기만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 말에 대해서, 성모님의 경우를 말하면서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19; 2,51) 그런데 성모님은 묵상만 하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능동적으로’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묵상하신 것은,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계명과 가르침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 예수님의 신원 등이었습니다.>
3)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는, “사람들이 나를 죽일 것이다.”입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말은,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묻는 것도 두려워했다는 말은, 당시의 제자들에게 십자가 수난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 그래서 물어보기도 싫은 일, 피하고 싶기만 한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부활은 그만큼 놀라운 일, 정말로 ‘큰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피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끌어안고 예수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가 일반적인 표현이긴 한데, 뜻을 생각하면 ‘끌어안고 간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을 귀담아들어라>
학창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는데 제자들은 아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불완전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우리의 손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될 때 하느님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를 일깨우는 날 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 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 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 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 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말씀 안에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19,97) 미룰 수 없는 사람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제자들이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두려워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신들이 바란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 사이의 깊고 깊은 간극 때문이었지요. 그 간극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일종의 비겁함입니다. 대개 비겁함은 제 잇속 계산과 상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은 아닐 테지요. 당시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멋진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른바 묵시적 열광의 시대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살아갔습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내일의 달콤한 인생을 향한 묵시적 환상은 활개를 칩니다. 그런 열망을 단번에 꺾어 버리신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제자들은 허탈과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뚜벅뚜벅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루카 복음은 19장까지 열한 개의 장(9,51―19,48)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수난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얼마간의 비겁함과 얼마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그야말로 제자들이 복잡한 감정의 다발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다가갈수록 점차 다듬어진 신앙의 정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여 버린 삶의 방향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신앙이란 알아듣고 깨닫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라서 무모하게 내맡기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수난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일상 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지만 이 몸짓이 앎의 또 다른 조각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
=====================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인생의 젊음과 아름다운 시절을 기쁘게 즐기되, 하느님의 심판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만족과 기쁨에 빠져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노년과 죽음 그리고 심판의 때가 올 것을 알고 늘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기쁘고 모든 일이 잘될 때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찾는 이라야 시련과 불행이 닥칠 때도 그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첫 번째 수난 예고(루카 9,22)에 이어,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일을 전합니다. 사실 이때는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9,28-36)과 더러운 영을 권능으로 쫓아내신 일(9,37-43) 바로 다음으로, 모든 이가 예수님을 매우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루카 18,32; 24,7.20 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으로 어깨가 으쓱하며 한껏 우쭐해졌던 탓인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선뜻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에 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아직은 불길하고 굴욕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시련과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곤혹스럽고 피하고 싶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을 더 열심히 찾게 되고, 그분의 도움과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니 그 또한 감사드릴 일입니다.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일상일수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 시련과 단련의 시기를 만날 때도 한결같은 믿음과 평화 속에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희망은 언제나 기대와 불안이라는 양날의 칼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은 현재를 긍정하고 살게 하지만,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희망을 기다림의 고문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의 기적과 권위 있는 가르침은, 기다렸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며 제자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으십니다.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제였을까요? 제자들의 희망과 다른 결과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속마음을 미리 읽으신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성취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애써 감추려고 예수님의 말씀에 관해 묻는 것도 두려워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두려움으로 도망친 제자들의 절망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통해 희망이 되었습니다.
삶은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상적인 나와 다른 현실의 나를 만나고, 확신 속에서 배신과 의심을 품게 되며, 실패와 좌절 속에서 새로운 꿈과 용기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십자가 수난의 역설은 믿음이 성장하는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 역설을 딛고 진리의 맛을 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희망입니다.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듯, 역경과 고통 속에서 지혜가 자라나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날마다 초대받고 있음을 기억하고 언제나 기뻐하고, 늘 감사하며, 깨어 기도하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는 해외에서도 인정하는 안전한 나라입니다. 일반 치안이나 범죄율이 매우 낮으며, 해외 여행자들의 경험담을 보면 총기나 강도 사례가 거의 없으며 소매치기조차 없다고 소개합니다. 심지어 카페에 휴대전화를 놓고 가도 그 누구도 가져가지 않는 정직한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국제 안전 지표에서도 늘 상위권입니다.
이렇게 안전한 나라인데도, 솔직히 약간 음침한 곳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때 뒷골목에서 깡패를 만나서 매 맞고 돈 빼앗긴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50원밖에 없다고 ‘열중쉬어’하고 맞았습니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 뒷골목이 안전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뒷골목만 들어서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자그마치 40년도 더 넘은 일인데도 말입니다.
부정적인 일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자기 삶에서 지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보시니 참 좋은 세상인데, 부정적인 기억이 그 좋음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며,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긍정의 뉴스가 가득했으면 합니다. 폭력적이고 부정적인 뉴스가 사라지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표징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위대함’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움은 또 다른 부정적인 놀라움에 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순간 뒤에 십자가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사람들은 모두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의 구원이 열린 것이지요.
영광스러운 기적만 바라보려 하면, 어느 순간에 부정적인 마음으로 변하고 맙니다. 주님의 가려진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루카 9,45 참조). 주님께서는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십자가라는 고통과 시련이 주어지는 순간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는 사람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길에 확실하게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파스카의 주님 -
<파스카의 여정, 파스카의 기쁨>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예레 31,10ㄹ)
요즘 수도원 경내에는 두 야생화 들꽃의 전성시대입니다. 유홍초와 달개비인데 거의 주목받지 못할 정도로 참 작고 미미해 보입니다. 매일 새롭게 폈다 지는 하루살이 들꽃들이요 곱고도 영롱하기가 밤하늘 별들같습니다. 저는 일명 <파스카의 꽃>이라 부릅니다. 하늘의 별들과 땅의 꽃들하면 떠오르는 <땅의 행복>이란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땅의 행복이라지만 <파스카의 행복>으로 읽어도 그대로 통한다 싶습니다. 엊그제 지인에게 가장 아름다운 곳 소개해드리고 싶다며 안내한 곳이 수도원 하늘길이 끝나면서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모서리 소나무밭 그늘진 곳, 달개비꽃밭이었습니다. 이어 28년전 <달개비꽃> 시를 감상했습니다.
“오!
하느님이 밤사이
쏟아 놓은 남보랏빛 생명의
보석들
아주 낮은 그늘 속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져갈 수는 없는 생명의 보석들
달개비꽃!”<1997.8.25.>
얼마전 써놓은 또 하나의 파스카의 꽃, 유홍초입니다. 많이 나눴지만 애착이 가는 시라 늘 읽어도 새롭습니다.
“‘영원히 사랑스러워’
꽃말만으로
행복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보아주지
않아도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하다
해마다 거기 그 자리
때되면 한나절 폈다지는
꽃이름도 예쁜
유홍초 야생화
사랑합니다
수줍게 고백하는 유홍초
부끄러워 빨갛게 물들었네”
<2025.9.19.>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은 파스카의 주님은 두 번째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얼마전 충격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연이어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니 제자들은 멘붕 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첫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후엔 산에서의 변모체험과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주심으로 제자들의 사기를 북돋아 용기백배 힘을 주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파스카의 사건>인지 깊이 각인시코자 하셨음이 분명합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으니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은총으로 주님 부활을 체험해야 깨달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신비>였던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의 영성’뿐이요, 파스카의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기쁨 중에 ‘늘 새롭게 시작하는’, 참으로 탄력좋은 파스카의 여정을 살아가는 믿는 이들입니다. 즈카르야 예언자의 셋째 환상이 참 고무적이요 파스카의 주님의 은총을 미리 보여 주는 듯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예루살렘을 둘러싼, 불벽이 되고, 그 한가운데에 머무르는 영광이 되어 주리라.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파스카의 주님의 은총으로 실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딸 시온이 상징하는 바, 파스카의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요, 언젠가의 그날은 바로 오늘이 됩니다.
바로 이런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여정을 살았던 가톨릭교회의 성인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입니다. 성인이 살았던 시대는 30년 전쟁과 계몽주의와 과학혁명이 사회전반에 영향을 끼친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성인은 프랑스의 가난한 농부의 육남매중 셋째로 태어날 때부터 가난에 익숙했고 평생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며 이들의 복지에 온힘을 다했습니다.
성인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제자가 되어 어렵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활동을 더욱 넓혀갑니다. 가난한 지역의 본당신부가 되어 본당의 ‘애덕회’와 귀족 부인들을 중심으로 ‘애덕부인회’,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 ‘선교사제회(라자로회)’를 설립하고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치다가 수녀회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루이즈 드 마리악 성녀를 초대 원장으로 ‘애덕수녀회’를 설립하여 오늘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인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고 가난하게 하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성인은 진정한 신앙은 복음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1660년에 79세에 선종한 빈첸시오 사제는 1737년에 시성되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는 그를 모든 자선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파스카의 주님을 성인을 통해 활동하심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파스카의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근심에 찼던 마음을 위로해 즐겁게 하리라.”(예레 31,13ㄴ).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꿈 깨라시는 주님께 우리는?>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오늘 복음은 어제 첫 번째 수난 예고에 이은 두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그런데 이 예고를 하시면서 이 말을 귀담아들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 예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귀담아들었다면 귀담아들으라고 굳이 얘기하실 필요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이어지는 얘기를 뜯어보면 여전히 귀담아듣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복음이 얘기하지만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단정하냐 하면 그 뜻이 감춰져 있어서 알아듣지 못했다고 하지만 곧이어 하는 말이 그 뜻이 뭔지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싫어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너무나 싫을 때 두려운 법입니다.
너무 싫을 때 두렵고 두려울 때 마주하기보다는 피하기 마련인데 제자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이 싫었고 두려웠으며 그래서 돌아가신다는 것의 뜻이 뭔지 묻는 것조차 싫었던 겁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에 대해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본 제자들로서는 예수께서 그들에 의해 돌아가시리라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오늘도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지만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것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것을 뛰어넘는 거라는 반응입니다.
사람의 업적을 뛰어넘는 신적 업적을 보면서
사람의 아들이기에 죽어야 한다는 주님 말씀을
믿기 어려웠고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꿈에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건 그들의 꿈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꿈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인데 군중의 반응을 보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장밋빛 꿈 깨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사람의 아들이고 그래서 돌아가실 거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꿈 깨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자들처럼 못 들은 척하거나 못 알아듣는 척할까?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본질을 바라보고 믿자!'>
오늘 복음(루카9,43ㄴ-45)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가 공관복음(마태오복음.마르코복음.루카복음)에서 세 번에 걸쳐 전해집니다.
첫 번째 예고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 두 번째 예고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화와 마귀들린 아이를 치유해 주신 치유사화 후에, 세 번째 예고는 예수님의 지상 최종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전해집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본질,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본질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9,45)
'예수님의 본질, 곧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내가 죽어야 부활한다.'는 본질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십자가 뒤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질을 바라보고, 본질을 믿으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어찌보면 복음 전체가 이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를 드릴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이 기도에 따르면 만약 지금, '나와 나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나라와 세상'이 평화롭지 못하고 분열된 모습이라면, 곧 부활의 모습이 아니라면, 그 이유는 교회 구성원인 우리의 믿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본질에 대한 나의 믿음이 약한 탓 때문입니다.
늘 단순하게 본질을 바라보면서 본질을 믿으려고 노력합시다! 그래서 본질에 대한 믿음을 키워 나갑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오늘, 우리는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를 기리며
그의 삶과 영성을
묵상합니다.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 행위로
피어나는 것임을
그는 보여주었습니다.
겸손 속에서
자신을 비우고
가난한 이 안에서
참된 자유를
체험했습니다.
가난한 이를
섬기는 일은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조건이나 성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창조와
구원 안에서
주어진
은총임을
그는 드러냈습니다.
그의 봉사와 실천은
인간적 선행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은총 안에서
가능했습니다.
빈첸시오는
겸손과 단순함 속에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굴욕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게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단순함은
꾸밈없이
하느님 앞에서
투명하게 사는
삶입니다.
곧 진실함과
연결됩니다.
진실함은
관계 속에서
솔직함과
일관성으로
드러나고,
일관성은
공동체 안에서
신뢰와 소통의
바탕이 됩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있습니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사랑이라는
중심으로
우리를
다시 불러 모으는
하느님의
깊은 숨결을
오늘 만나는
은총의 날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가난하신
하느님을
맞이하는
사랑의 참된
기쁨입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