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통영 욕지도 맛기행
배에서 내리자마자 맛집 즐비
잿방어·참돔 등 제철어종 풍성
육지서 귀한 고등어회도 맘껏
큼직한 전복 크기에 입이 ‘쩍’
해풍 맞으며 자란 고구마 명물
‘할매바리스타’ 이색음료 눈길
달콤끝판 고구마빵도 인기만점
경남 통영 욕지도에는 해녀가 갓 잡아온 해산물을 파는 식당이 많다. 자연산 뿔소라·멍게·돌멍게·전복은 물론 고등어·방어·참돔회 등으로 구성된 모둠요리가 인기다.
‘산해진미(山海珍味).’
산과 바다에서 나는 진귀한 음식이라는 뜻의 사자성어다. 그렇다. 해산물이 빠지면 ‘진미’는 완성되지 않는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엔 갓 잡아온 바다 먹거리가 넘쳐나니 인심마저 넉넉해진다. 식욕이 왕성해지는 가을, 싱싱한 생선회와 해녀가 방금 건져낸 전복·멍게가 풍성하다는 경남 통영 욕지도로 여행길을 잡았다. 갈매기 울음소리와 파도 소리를 배경 삼으며 바다가 선사하는 맛을 찬찬히 음미한다면 무릉도원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을 테다.
◆해녀의 섬 욕지도=욕지도는 서로는 전남 여수와 경남 남해, 동으로는 통영·거제 사이에 있는 한려수도를 수놓은 섬 가운데 하나다. 통영항 여객선터미널에서 1시간가량 배를 타면 욕지도에 다다른다.
욕지도는 해녀가 사는 섬이다. 선착장에 발을 내딛자마자 간판에 ‘해녀’가 들어간 식당이 꽤 보인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 100m 정도 걸어가다보면 허름한 건물 앞에서 각종 해산물을 파는 곳이 나온다. 해녀 오정희씨(63)가 운영하는 ‘해녀포차’라는 식당이다.
11일 해가 이울 때인 오후 5시 이곳에서 해산물을 손질해주시는 아주머니가 이방인의 발길을 멈춰 세운다.
“여기 대야 한번 보이소! 30분 전에 해녀가 직접 잡은 뿔소라·전복·멍게가 이리 싱싱합니더∼.”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큰 자연산 전복이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군침이 절로 돈다. 그 자리에서 상을 펴고 모둠 해산물을 주문했다. 오독오독 전복 씹는 맛에 운율감이 실린다. 식감이 단단한 뿔소라는 오래 씹으면 견과류처럼 고소한 맛이 난다. 멍게는 특유의 단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하고 돌멍게는 진득한 육즙이 잔잔한 바다향을 머금었다.
서울에선 귀한 대접을 받는 고등어회도 여기선 흔하디 흔하다. 쫄깃쫄깃하고 혀에 착 붙는 감칠맛이 광어·우럭 저리 가라다. 사실 이곳 고등어는 대부분 자연산이 아니다. 치어를 잡아 가두리 양식장에서 성체가 될 때까지 키운다. 제주도에서도 고등어 물량이 달리면 이곳 욕지도에서 떼간단다.
욕지면 동항리 ‘해녀촌식당’의 인기메뉴인 전복죽과 전복미역국.
날것이 물렸다면 이젠 따뜻한 음식을 먹을 차례다. 선착장 인근 욕지면 동항리 골목 들머리에 자리한 ‘해녀촌식당’의 주특기는 전복죽과 전복미역국이다. 죽에는 큼직하게 썬 전복이 알알이 박혀 있고 국에는 큼지막한 전복 세마리가 껍데기째 올라간다. 인심 좋은 주인장에게 말만 잘하면 고등어구이를 덤으로 얻어먹을 수도 있다.
이곳은 유튜브 먹방(먹는 방송) 채널을 운영하는 쯔양이 다녀갔다고 해서 유명세를 탔다. 그가 먹었다는 라면도 주문해볼 수 있다. 전복·뿔소라·돌문어가 가득 들어간 요리를 원 없이 맛볼 기회다.
◆섬 고구마, 빵과 음료로 변신하다=욕지도에 고기 잡는 어부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밭에서 농사짓는 농민도 섬의 당당한 구성원이다.
욕지도에서는 특히 고구마가 잘 자란다. 비탈진 황토에서 해풍을 맞으며 자란 고구마는 씨알이 굵고 당도가 높다. 원래 일제강점기에 섬으로 이주한 가난한 이들이 주린 배를 채우려 키운 구황작물인데 이제는 지역 명물이 됐다. 섬 전체 면적의 80%인 144㏊에 이르는 땅에서 재배되고 있다니 가히 ‘고구마 섬’이라 불릴 만하다.
관광객 입맛을 사로잡으려는 경쟁이 치열해서일까. 고구마를 활용한 다양한 먹거리 문화가 욕지도에서 만개했다.
‘욕지도할매바리스타’ 대표 이정순씨가 추천하는 고구마·우유를 섞어 만든 고구마라테.
‘욕지도할매바리스타’에서는 이색 음료가 목마른 나그네의 목을 적신다. 고구마와 우유가 감미롭게 만난 고구마라테가 가장 인기다.
라테 맛도 맛이거니와 만드는 정성에 탄복한다. 동네 어르신 네명과 함께 이곳을 경영하는 이정순씨(72)의 말이다.
“고구마를 사들이는 족족 손으로 다 깎고, 찌고, 반죽하는 데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야. 고구마 반죽 덩어리를 냉동 보관하면서 1년간 라테 만들 때 쓰는 기지.”
고구마라테 외에도 아메리카노·카페라테·캐러멜마키아토와 같은 커피류도 수준급이다. 8년 전 동네 몇몇 할머니들이 의기투합해, 섬으로 초빙한 바리스타 강사의 도움을 받아 6개월간 실력을 갈고닦은 덕분이다.
‘욕지고메원’에서 만든 고구마 소가 들어간 도넛.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팥빵보다 고구마빵이 대세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고구마는 빵 소로 손색이 없다. 동항리에 있는 ‘욕지고메원’은 이 섬에서 고구마빵 원조집으로 통한다. 빵 안에 든 고구마가 새벽 여명처럼 샛노랗다. 오후 늦게까지 가게를 열지만 빵이 가장 맛이 있을 때가 따로 있다. 오전 10시50분이 갓 구운 빵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다.
10월 달력을 넘기기 전의 욕지도는 특히 풍요롭다. 고구마는 물론 귤이 나올 때다. 바다에서는 잿방어·부시리·참돔이 제철을 맞는다.
욕지도가 지닌 맛의 색깔은 뭘까. 고구마의 노르스름함, 고등어의 파릇함, 멍게의 선홍색일까. 함부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다.
통영=이문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