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⑳-2
3월24일, 드이어 이홍장은, 「휴전문제를 철회하고, 바로 강화담판을 시작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각서를 제출했다. 바로 일본의 “예기한대로”이다. 일본 측은 “내일, 강화조약안을 제출 할 것”을 약속하고, 이날 회의를 끝냈다.
일동은 春帆樓를 떠났으나, 陸奧는 이홍장의 아들인 李經方(이경방)을 잡고 내일담판에 관한 타합을 하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요담에 들어가려고 할 때, 낭하에 어수선한 발소리가 울리고, 공무원 한사람이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큰 사건이.....”하고, 숨을 헐떡거리면서 보고했다. 春帆樓를 나온 이홍장이 숙소로 가는 도상에서 폭한에게 저격되어, 안면에 중상을 입었으나, 생명의 위험은 없는 것 같다---고 한다.
놀란 陸奧는 이경방에게 “변명할 여지도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생은 일각이라도 빨리 부친께 가서 간호를 맡아 주십시오. 저는 이 사건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할 테니까요” 이렇게 말하고, 伊藤 博文의 숙소로 급히 가서 같이 이홍장에게 문병했다.
이 사건에는, 배후관계 같은 것은 없다. 동양에 정의를 실행하자는 일본을 방해하려는 원흉은 이홍장 이라고 생각한 한 사람의 무뢰한의 흉행---이라는 단순한 사건이었다. 이홍장의 안면에서 피가 솟아나는 그 순간에, 하수인은 사건의 중요성의 권외로 밀려났다. 다음에는 陸奧 宗光와 이홍장 2사람이 각각 가슴속에서, 이 사건이 각자의 조국에 주는 이해를 계산하고, 서로의 흉중을 서로 읽는 암투로 옮겨갔다. 히로시마(廣島)의 행재소(行在所/행궁)에서 이 사건을 알게 된 천황은 즉각 의사를 시모노세키(下關)로 파견하여 정중하게 위문과 치료를 하게하고, 황후도 “천황의 붕대”를 소지한 간호사를 파견했다. 陸奧의 기술(記述)에 있는 것과 같이, 이 “매우 정중한 대우” 후에, 다시 이튿날 25일, 조칙(詔勅)도 공표했다.
국민일반의 놀라움도 컸고, 이 사건 때문에 일본은 여러 외국으로부터 비난받지 않을까 우려하는 그들은, 전승의 열기에 들떠서 이홍장에게 험구를 하고 있었던 것도 잊은 듯이, 그의 용태를 걱정했다. 이홍장의 숙소 문간에는 위문품을 가진 사람들이 쇄도하고, 병실 책상 위에는 전국에서 보내온 위문 전보나 편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홍장에 대한 국민의 태도의 지나친 변화는 陸奧가 「말할 것도 없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적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이런 소동에 감격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인이 왜 조난 후의 자기에 대하여 이렇게도 친절해 지는가, 그 이유를 적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뒷날 陸奧는, 이홍장이 베이징(北京)정부에 「나의 조난에 대해 일본 관민이 성대하게 통석(痛惜)의 뜻을 표하는 것은, 외면을 장식하는데 불과하다」고 타전한 것을 알고, 그것도 그럴 것이라고 고소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홍장은 숙소의 깊은 다다미방 객실에 몸을 눕히고, 상처의 고통을 참으면서, 자기의 조난을 카드로 써서 어떻게 청국의 입장을 유리하게 이끌까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신중하였다. 섣불리 대책을 강구하려고 하지 않고 숙고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이홍장의 흉중을 陸奧는 미루어 살피고 있었다. 이홍장이 불리한 정세를 만회하기 위해, 조난을 이용하려고 생각하지 않을 리 없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때, 조급히 무엇인가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예측할 수 없는 위해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陸奧는 여러 가지 궁리를 했다.
<이미, 언제까지나 전쟁의 계속을 허용하지 않는 시기가 다가왔다. 만일 이홍장이 부상을 이유로 이대로 귀국하고, 구미각국을 향해서 조난사건을 교묘하게 선전하면, 적어도 2, 3개의 강국은 자국의 이해와 관련시켜 동정을 보낼 것이다. 이홍장의 청국 내에서의 인망, 제 외국에 대한 지명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만만치 않은 외교수완을 생각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크다. 일본이, 이번 사건은 정부와도 일반국민과도 관계가 없는 한 개인의 범행이고, 범인은 이미 처벌했다와 같이 주장해 봐도, 공격의 화살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난사건에 대한 동정이 계기가 되어, 구주 강국의 간섭이 시작되면, 일본은 청국에 대한 요구를 대폭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될 것이다.>
陸奧는 伊藤를 방문하고, “이번 사건에 대하여, 황실도 국민도 이홍장에게 충분한 예를 다했으나, 그러나 단순히 예의적 또는 사교적인 일 뿐만 아니라, 무엇인가 현실의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홍장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청국 측이 간청하고 있는 휴전을 무조건 허락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일본 측의 성의가 청국에 통할 뿐 아니라, 여러 외국도 납득할 것이다”고 했다.
陸奧는 처음부터, 이홍장이 일본의 상하에서 보인 호의에 감격하고, 일을 유연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본인에게만 통용되는 “정의 세계”이고, 외교란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냉엄한 것으로, 거기에 “정”을 가지고 할 여유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伊藤는 陸奧의 「무조건 휴전」이라는 제안에 전면적으로 찬성했다. 그러나 휴전은, 군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조속, 히로시마에 있는 각원(閣員)이나 대본영의 중신들 앞으로 전보를 쳤으나, 그 회답은 「지금 휴전을 실행하는 것은 일본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재고를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어째서 내외의 정세를 모르는가 하고, 陸奧는 이가 갈릴 듯이 생각했다. 긴급을 요하는 중대문제는, 전문(電文)의 왕복으로는 결말이 나지 않는다. ---고 伊藤가 히로시마를 향해 출발한 것은 25일 밤이었다.
廣島(히로시마)에서의 「휴전의 득실」 평결(評決)은 난항이었지만, 27일 야반, 겨우 伊藤로부터 下關(시모노세키)의 陸奧 앞으로 「휴전에 관한 건, 칙허(勅許)됨」이라고, 그 조건의 대요를 타전해 왔다.
익28일, 陸奧는 이홍장의 병상을 방문하고, 이것을 알렸다. 얼굴의 대부분을 붕대로 덮여있는 이홍장은, 겨우 나타나 보이는 한쪽 눈에 환희의 빛을 띄웠으며, 먼저 천황에 대하여, 이어서 陸奧에 대하여 되풀이하여 감사의 말을 했다.
3월30일, 일청휴전조약은 양국 전권대신에 의해 조인되었다. 일본 측의 조건은, 타이완(臺灣)방면에서 교전중인 원정군을 제외하고 다른 전지의 휴전을 승낙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위해위 싸움에서 황해의 제해권을 잡으면, 나아가 남지나해의 제해권도 잡기 위해, 1895년3월, 중국본토와 대만과의 중간에 있는 팽호도(澎湖島)를 점령하고 있었다.
휴전조약 조인 후, 드디어 강화회의가 개시되었다. 강화조건에 대한 협상은 이홍장의 필사적인 흥정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의 강경한 태도에 짓눌려가면서 진행되었고, 결국 4월17일, 조인되었다. 伊藤와 陸奧가 각각 두뇌의 한계능력까지 최선을 다하여, 함께 합침으로써 더욱 일본을 유리하게 이끌어 이날에 이르렀다.
강화조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청국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1.청국은 일본에 요동반도와 타이완(台灣) 및 팽호도(澎湖島)를 할양한다.
1.청국은 2억 량(兩)을 배상으로 7개년 간에 지불한다.
1.청국은 구주(歐洲) 제국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조약과 같은 일∙청조약을 체결한 다.
그 위에
(1)새로이 사시(沙市), 중경(重慶), 소주(蘇州), 항주(杭州)의 각 시항(市港)을 일본 신민을 위해 개방한다.
(2)양자강(揚子江)의 항행 권을 일본에 부여한다.
(3)일본신민은 청국에서 각종의 제조업에 종사할 수 있다.
등이 부가되어 있다.
교섭과정에서 이홍장은, “일본군은 타이완 본토에는 한발도 들여놓지 않았기 때문에, 할양을 요구하는 것은 조리에 맞지 않는다”고 강하게 반론했다. 그러나 일본은 군사적, 경제적 세력을 남방, 특히 청국에 뻗기 위한 기지로서 타이완 영유의 결의가 굳었고, 드디어 청국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결과가 되었다.
강화조약 성립 후, 일본은 해군대장 樺山 資紀(카바야마 스케노리)를 타이완 총독에 임명하고, 나아가 군사적 저항을 예상하여 근위사단을 타이완으로 보냈다. 과연 5월 말에는 반란을 일으킨 타이완 도민이 독립 공화국 창립을 선언하고, 그 후에도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며, 일본은 장기에 걸쳐서 고전을 이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