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바나나 꿀꺽 서울대생 용서’… 논란으로 주목도 노린 예술가들
훼손 등으로 유명해진 작품들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 전시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 미술관 벽에 바나나를 은색 테이프로 붙인 작품으로 2019년 미국에서 한 관객이 바나나를 먹어 화제가 됐다. 지난달 한국에서도 한 대학생이 “배가 고팠다”며 작품 속 바나나를 뜯어 먹었다. 뉴스1
《지난달 27일 미술 기자들에게 단체 메일이 도착했다. ‘서울대에서 미학을 전공하는 제 지인이 리움미술관 카텔란의 작품을 먹었습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사진과 영상이 첨부돼 있었다. 주인공은 대학생 노현수 씨. 영상에서 그는 바나나를 은색 테이프로 벽에 붙여 만든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을 떼어내 먹고 있었다.
노 씨의 행동은 여러 언론사에서 보도되면서 화제가 됐다. ‘창의적이지 않다’거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카텔란의 바나나가 관객의 먹잇감이 된 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9년 미국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한 예술가가 ‘배가 고팠다’며 바나나를 먹어 언론의 관심을 받은 바 있다. 노 씨도 “아침을 안 먹고 와서 배가 고팠다”고 말했다.
노 씨의 행동을 둘러싸고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인 것이 어떤 예술적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작업까지 예술이 될 수 있는지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 바나나, 출발은 개념미술
미술관 혹은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건드려서는 안 된다. 관객이 만져볼 수 있는 작품도 최근엔 등장하지만 극소수다. 그런데 작품을 만지는 것도 모자라 먹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바나나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그것을 붙이기로 한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이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 대목에서 마르셀 뒤샹의 작품 ‘큰 유리’를 떠올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유리 패널 두 개로 구성된 이 작품은 1927년 전시를 위해 운송되던 중 충격을 받아 금이 가고 말았다. 조각 작품이 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고였는데, 뒤샹은 오히려 “작품이 더 좋아졌다”며 그대로 전시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작가의 아이디어가 작품을 결정짓는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마르셀 뒤샹의 작품 ‘샘’.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렇게 세상이 정한 가치가 아니라 나의 기준과 논리에서 중요한 것도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 바로 ‘개념미술’이다.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를 미술관에 놓고 전시한 작품 ‘샘’(1917년)이 대표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카텔란의 ‘코미디언’은 이미 100년 전 발표돼 미술사에 기록된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다.
두 작품의 차이점은 이에 대한 반응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뒤샹의 ‘샘’은 전시 직후 미술계의 분노를 샀고,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변기가 예술이라는 그의 도발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그러나 카텔란의 ‘코미디언’은 미술관에 자연스럽게 입성해 보호를 받는다.
최종철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뒤샹의 샘은 미술관이라고 하는 예술 제도의 권위를 공격해 예술을 혁신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카텔란은 오히려 제도와 결탁해 자신의 명성과 작업의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번 해프닝에 대해 다른 해석도 제시했다. 그는 “대학생의 치기 어린 행동 때문에 바나나의 진부함이 가려져 안타깝다”며 “그의 행동을 통해 오히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되는 동시대 미술의 모순적 현상에 대해 고민해 볼 계기가 생겼다”고 했다. 이어 “해당 작품에 우리 사회가 주목할 만한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 센세이셔널리즘과 미디어
사람들에게 충격을 줘서 주목을 받는 ‘센세이셔널리즘’을 시도한 작가들은 최근 50년간 늘어났다. 거대한 상어 사체를 포르말린 용액에 담가 전시한 데이미언 허스트, 자신의 피를 뽑아 두상 조각을 만든 마크 퀸 등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젊은 영국 미술가들)가 그들이다. 1980년대 말 공장에 이들 작품이 전시되자 ‘이렇게 엽기적인 것도 예술이냐’며 논란과 화제를 일으켰다.
마크 퀸의 피 두상 작품 ‘셀프’는 작가가 조금씩 뽑은 피를 모아 얼려 5년마다 한 점씩 제작해 냉동 상태로 전시했다. 1996년 만든 ‘셀프’ 작품은 청소부가 실수로 냉동 장비의 전원 코드를 뽑는 바람에 녹아서 사라지면서 또다시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을 소장했던 사람이 바로 yBa를 키운 화상이자 광고 재벌인 찰스 사치다.
사치는 20대에 광고회사 ‘사치 앤드 사치’를 설립했고, 영국 보수당의 선거 슬로건 ‘노동당은 일하지 않는다(Labor is not working)’ 등을 히트시키며 회사를 글로벌 대기업으로 키웠다. 이런 미디어적 전략을 활용해 그는 충격적인 작품을 내세워 yBa들을 알리고 그 가치도 높였다. 그 후로 처음의 충격을 넘어설 만한 작품이 나오지 못하면서 yBa에 대한 관심도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다만 이러한 ‘센세이셔널리즘’ 전략은 그 후로 여러 예술가들이 활용했다. 카텔란도 2016년 구겐하임 미술관에 18K 금으로 만든 변기를 전시해 주목받았다. 영국 출신 예술가 뱅크시는 2018년 경매에서 낙찰된 자신의 작품을 절반만 파쇄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제프 쿤스는 1989∼1991년 포르노 배우와 성관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과 조각으로 발표했다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 작품 가격, 시대-미학적 가치 등에 따라 변화
그렇다면 센세이셔널리즘을 선보이는 모든 작품이 주목을 받는 것일까? 카텔란, 쿤스, yBa를 비롯한 작가들의 관련 작품들이 지닌 공통점은 ‘유명하게 비싼 가격’이다.
이번 해프닝에서도 단순한 바나나가 아니라 ‘1억 원짜리 바나나’를 먹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총 3개 에디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카텔란의 ‘코미디언’은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12만 달러(약 1억5000만 원)에 팔린 것으로 전해진다. 비싼 작품이기 때문에 가치 있고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 작품의 가격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19세기 인상파 작가들이 활동하던 프랑스에서는 아카데미의 가장 권위 있는 화가였던 윌리암아돌프 부그로의 작품이 컬렉터들이 가장 원하는 작품이었고, 당연히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비쌌다. 그러나 모네가 그린 작품들은 지금 수백억∼수천억 원에 거래되지만 부그로의 작품은 억대에 그친다.
미술 작품의 가격을 결정짓는 요소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미술 작품은 크게 미술사적 가치, 미학적 가치, 미디어적 가치, 감성적 가치 등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 센세이셔널리즘에 기댄 작품들은 이 중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화제가 되는 ‘미디어적 가치’로 가격이 형성된다. 만약 이 작가들이 향후에도 새롭고 신선한 작품을 내놓아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면 이 가치는 유지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지는 순간 작품의 가치도 하락한다.
즉, 지금 비싼 작품이라고 해서 꼭 중요한 작품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예술 작품에 대한 미학적 판단은 가격이나 유명도와 꼭 동일한 것은 아닌 별도의 영역”이라며 “우리 사회가 이런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면 작품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고 미학적 통찰을 얻는지를 진지하게 토론하고 기준을 세워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민 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