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채운 뒤에 이르나니

[굿데이 주영]

이십여 년 전, 구천동보건진료소에 첫 발령을 받고 근무하던 시절의 인연입니다. 구천동우체국에 근무하는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마을과 보건진료소에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신문과 우편물을 배달하던 아저씨는 제가 업무 중 출장이거나 휴가로 부재 중인 경우에는 우편물을 연탄 창고에 넣어두고 가셨습니다. 그때마다 작은 종이에 메모를 남기곤 하셨지요.

우체국에서 정년퇴임하신 후 대전으로 이사를 하셨고, 저도 다른 보건진료소로 근무지가 변경되면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5-6년 전 쯤 일입니다. 행정안전부에서 전현직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무원미술대전'이 있는데 저는 사진 부문에 출품하였습니다. 그분은 서예 부문에 출품했는데 둘 다 입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모전이 끝난 후 작품을 제출한 사람에게 입상 작품을 책으로 묶은 작품집이 한 권씩 배부되었는데, 그 작품집이 다시 만남의 다리가 되었습니다. 작품집에 실린 저의 사진을 보고 군청으로 보건의료원으로 연락처를 물어물었다며 저에게 전화를 하셨더군요. 오랫동안 밀린 안부를 묻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퇴임 후 그분은 한국서도협회에서 서예 공부를 계속하여 초대작가가 되셨고, 급기야 서예대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작품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답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서도대전 초대작가, 미술전람회 초대작가, 한국서예협회 초대작가, 한국-중국서화교류전 등 한 장의 명함으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활발한 활약을 하고 계십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 안부 전화를 드렸고, 결례가 아니라면 좋은 글귀 한 점 부탁한다고 정중히 요청하였습니다. 소장님! 글이란 것이 급히 쓰이는 것이 아니니, 잊은 듯 지내십시오. 생각이 나는대로 시간이 되는대로 완성하여 보내겠습니다. 하시더니, 맹자의 ‘진심장구 상편’에 나오는 문구를 적은 작품을 오늘 우편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과 함께 탁구를 배우느라 근무가 끝나고 저녁이면 레슨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읍내로 달려나가고 있습니다. 가벼운 공, 무겁지 않은 라켓, 겉으로 보기에는 까짓 것 쉽게 배울 수 있는 운동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강습을 받고 훈련을 하여도 마음처럼 몸동작이 완성되지 않아 점점 짜증이 나고 속이 상합니다. 탁구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의 꾸지람도 점점 많아지니 기분도 가라앉고 마음까지 침체에 빠진 나. 우편물의 봉투를 열고 흰 종이 위에 쓰인 글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가는데 이토록 묵직한 울림을 주다니요.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 우리는 시련이라는 웅덩이를 채우고 넘어가야만 한다. 남들이 그 구덩이를 대신 메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웅덩이를 건너뛰거나 지름길에 연연해 하지 말고, 바른길을 걸으며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고집, 그것이 훌륭한 전문가에 이르는 길이다. 

배운 지는 얼마 되지도 않아 웅덩이에 물이 차기는 커녕, 아직 고이지도 않았는데 바다에 이르고 싶은 욕심이 앞서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린 부족한 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일이든, 공부든, 운동이든, 학문이든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순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보되는 법, 군자(君子)가 도(道)에 뜻을 두었을 때도 마디마디 과정을 이루지 않고서 어찌 전체에 통달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작은 웅덩이라도 가득 차지 않고서는 물이 흐르지 않는 법.

오래 전 연탄 창고에 두고 가셨던 작은 메모지에 볼펜으로 눌러쓴 필체를 기억합니다. 오늘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이분은 얼마나 많은 웅덩이에 물을 채우셨을까. 서두른다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빨리빨리를 외치며 조급해한 부끄러운 자화상을 묵직한 가르침으로 덮어봅니다.

봄, 봄입니다.

나를 다시 보게 하는.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웅덩이를 채운 뒤에 나아가 바다에 이르나니.

孟子 離婁下

.

.

.

[이강헌/운영자]

盈科而後進 참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굿데이 주영]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방랑자 박홍진]

내가 아는 그주영인가 ? 좋은 글 올렸네 ^^

[굿데이 주영]

네.. 맞아요^^

[방랑자 박홍진]

꽃피는 봄이오면 신랑이랑 같이 봐야지 !! ^^

[굿데이 주영]

좋은 봄날 뵙게요.^^

[김충수]

조은글 서예작품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

[굿데이 주영]

저도 감사^^

[홍기일/지기]

아침부터 카페 방문해서 주영씨가 올려놓은 깨우침을 주는 좋은글 마음에 깊이 새기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굿데이 주영]

네.. 감사^^ 고문님도 좋은 하루되세요.

[임명관/에이스 동호회]

좋은 글을 보니 무지 탐나네요~ ㅎㅎ 잘 읽고 갑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