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412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 4가지 (법문: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붓다왕사 278강 - 우빠디위웨까 4가지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보살이 위리야 바라밀을 채우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보살이 위리야 바라밀을 어떻게 채우는가? 그 중에서 위리야를 점점 더 많이 늘리는데 위웨까 3가지로 마음이 기우는 위리야가 있다고 했습니다.
위웨까 3가지
1) 몸이 혼자 있는 것, 몸이 남들과 같이 있지 않고 따로 떨어져서 있는 것, 홀로 지내는 것, 까야 위웨까(kāya-viveka).
2) 그리고 마음이 번뇌와 함께 있지 않고 홀로 고요히 있는 것. 찟따 위웨까(citta viveka)입니다.
3) 그다음에 우빠디 위웨까(upadhi-viveka). 이게 중요합니다. 우빠디 위웨까는, 우빠디(upadhi)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로부터 멀리 있는 겁니다.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 우빠디)가 4가지 있는데
1. 까무빠디(kāmupadhi). 5욕락이라는 우빠디.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
2. 칸두빠디(khandhupadhi). 오온 내가 있으면 생의 고통이 세워진다. 칸다(khandha. 무더기). 나라는 것이 곧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있으면 고통스럽습니다. 자아를 찾아가는 명상들을 많이 하는데 저도 했었습니다. 자아를 찾아야 되는 줄 알고. 그런데 내가 있으면 고통스럽습니다. 자아를 찾으면 고통스럽습니다. 그 칸두빠디. 오온이라는, 나라는 즉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가 있습니다.
3. 낄레수빠디(kilesupadhi). 낄레사(kilesa) - 번뇌라는 윤회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가 있습니다.
4. 아비상카루빠디(abhisaṅkhārupadhīti). 생의 고통이 머무는 선업과 불선업의 의도입니다. 이 네 번째, 이게 중요한데.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가 선업과 불선업의 의도. 두 가지 다에 생의 고통이 머문다는 거죠. 여기에 선업과 불선업의 의도에 생의 고통이라는 것이 건축됩니다.
아비상카루빠디 : 선업과 불선업 모두 생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의도가 있고 그 의도의 결과로 따라오는 부러워할 만한 생이든, 4악처의 생이든 생이 있으면 고통스럽습니다. 생의 고통이 이 의도에 자라 나온다는 거죠. 선업의 의도, 불선업의 의도 12연기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12 연기가 의도, 상카라(saṅkhāra). 하고 싶다는 의도가 있어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고 좋은 선업의 결과로 태어났는데 태어나 보니 행복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욕계 선업의 결과로 인간으로 태어나고 인간으로 입태해서 인간의 몸과 마음이 만들어지고 6문이 만들어지고 그리고 6문이 있으니까 접촉 대상이 들어오고 대상이 들어오는 접촉이 있으면 느낌이 생겨나죠. 느낌이 생겨나면 그 느낌으로 인해서 하고 싶다. 피하고 싶다. 싫다. 안 만나고 싶다. 안 보고 싶다. 더 보고 싶다. 더 먹고 싶다. 하고 싶다. 안 하고 싶다. 이렇게 계속 뭐 하고 ‘싶다’-의도가 생겨납니다.
웨다나(vedanā) - 느낌이 있으면 그 느낌이 사키는 대로 그것을 하고, 그러면 또 새로운 생이 만들어지고 그러면 죽어서 다음 생에 또 태어나고 이게 12연기죠. 하고 싶다. 좋은 일 하고 싶다. 이 ‘~하고 싶다’, 딴하(taṇhā. 갈애) 하나에 선업과 불선업이 모두 들어가죠. 선업과 불선업 다 들어갑니다. 우리가 짓는 선업과 불선업, 우리는 전생에 욕계 선업을 지어서 이번에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분명 좋은 결과인데 별로 편치 않습니다. 별로. 때로 심하게,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싶을 때도 있고, 하여튼 편치 않습니다. 그리고 편하게 평생 산다 해도 결국은 죽어야 됩니다. 죽어서 또 어디에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로 죽는 거죠. 4악도에 태어날지, 축생에 태어날지, 지옥에 태어날지, 천상계에 태어날지 어쨌든 죽습니다. 잘 살았다. 잘 산다는 게 뭡니까? 잘 산다는 게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차를 타면 잘 사는 건가요? 잘 산다는 건 뭡니까? 어쨌든 남들의 눈에 좋게 보이는 삶을 살아도 죽어야 됩니다. 죽어서 또 태어나는 곳이 어딘가에. 태어나는 이 고통. 그 선업과 불선업 둘 다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입니다.
아비상카루빠디. 선업의 의도, 불선업의 의도가 있으면 선업의 의도로는 좋은 생에 태어났으나 행복만 있지 않아서 고통스럽고, 불선업의 의도였으면 안 좋은 생에 태어나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 생에서도 선업의 결과로 좋은 인간으로 났으나 항상 행복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선업 지을 때는 행복하죠. 불선업 지을 때만큼 괴롭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선업 지을 때 행복한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남들이 다들 아는 일반적인 선업을 지을 때보다 (위빳사나도 선업이니까) 위빳사나 수행 할 때가 더 행복했습니다. 가장 힘들지만 가장 행복했습니다. 제일 행복합니다. 그게 지혜가 있는 인간이면 위빳사나 할 때 제일 행복해야 합니다. 힘들기도 하지만 행복하기도 제일 행복하죠. 왜냐하면 선업과 불선업의 의도가 아비상카루빠디. 생의 고통을 만드는 자리이지 않습니까? 선업의 의도, 불선업의 의도. 둘 다를 만들지 않아서 고통의 그림자를 달고 오지 않는 진정한 행복을 짓는 지혜수행이기 때문에 위빳사나를 할 때는 가볍습니다. 다른 선업을 지을 때처럼 무겁지 않습니다.
감지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는 느낌을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할 뿐이지 느낌이 있습니다. 싫다. 좋다. 그저 그렇다. 이 세 가지 느낌이 몸과 마음으로 여기 계속 들어옵니다. 이 느낌으로 인해서 선업의 의도와 불선업의 의도 두 가지 다 생깁니다.
선업의 의도가 생기기도 하고 불선업의 의도가 생기기도 하고 두 가지 의도가 생기는데 이 두 가지 의도가 생기면 업이 만들어지는 거죠. 이 의도를 실천하면서 또 업이 만들어지고 업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고성제로 직진하는 거죠. 고성제의 바다로 첨벙 들어가는 거죠. 죽으려고 바다에 들어가면 죽지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래서 뭐 하고 싶다. 선업을 짓고 싶다. 불선업을 짓고 싶다. 이게 주로 불선업 쪽으로 갑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지 않는 한 일단 이 ‘싶다’ 자체가 로바가 들어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이게 주로 불선업으로 갑니다. 그래서 앞 방향으로 ‘뭐 하고 싶다’를 실천하면 고성제. 고해의 바다로 들어갑니다. ‘하고 싶다’ 했으면. 근데 위빳사나는 이 웨다나(느낌)에서 딴하(갈애. ~하고 싶다)로 넘어가는 여기를 이렇게 딱 자르는 거죠.
그래서 선업도 불선업도 짓지 않는 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이걸로 자꾸 누군가들이 태클을 거는데 내 말 맞습니다. 선업도 불선업도 짓지 않게 하는 게 위빳사나입니다. 생의 고통을 만들지 않는 진정한 선업이라고 해야 되나. 선업이죠. 그런데 선업이라는 것은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죠. 인간계, 천상계. 이런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는 곳이 선업인데. 위빳사나는 그런 결과들을 안 가지고 오지 않습니까? 위빳사나의 사띠는 그런 여러분들이 원하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래서 안 하려는 거겠죠.
태어나지 않는, 고해의 바다로 데리고 가지 않는 결과들을 가져옵니다. 아주 가볍게 만듭니다. 이 위빳사나 선업을 지으면 가볍습니다. 다른 선업, 위빳사나 선업이 아니라 다른 선업을 지을 때는 그렇게 가볍지 않습니다. 제가 위빳사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가벼운 거죠. 다른 것들은 그런 가벼움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가볍습니다. 연의 줄이 끊어지면 이렇게 날아가는 것처럼 이렇게 끊는 거죠. 집착을 끊는 게 위빳사나입니다. 집착을 끊어서 가볍게 하는 것. 받을 결과를 만들지 않는 거죠.
우리가 선업을 짓고 선업의 결과를 받는다는 게 좋은 결과를 받아도 고성제입니다. 안 좋은 결과를 받아도 고성제고 둘 다 고성제의 결과를 받는 겁니다. 내가 선업을 지어도 고성제의 결과를 받고 불선업을 지어도 고성제의 결과를 받습니다.
12연기의 표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근데 위빳사나 선업, 사띠를 하면 고성제의 결과를 받지 않는 거죠. 고성제 결과를 받지 않습니다. 12연기 바퀴 자체를 서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거죠. 제대로만 하면 제대로 안 해서 그렇지. 제대로만 하면 고성제로 들어가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것들은 아무리 해도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12연기 바퀴가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들어간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제가 한 말이 아니라 부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이 바퀴를 알 수가 없죠. 그래서 아비상카루빠디. 선업과 불선업의 의도들 이것으로부터 위웨까- 멀어져 있는 게 우빠디 위웨까입니다.
우빠디 위웨까는 4가지가 있다.
1) 5욕락이라는 선업과 불선업이 세워지는 자리.
2) 오온이라는 고통. 나라는 고통.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
3) 낄레사(kilesa) - 번뇌라는 윤회의 고통이 세워지는 자리.
4) 생의 고통이 머무는 선업과 불선업의 의도. 이 4가지로부터 멀리 있는 것.
우빠디 위웨까 = 열반
열반이지요. 칸두빠디. 오온이라는 내가 없는 상태. 그리고 번뇌가 없는 상태. 선업과 불선업의 의도에서 완전히 멀어져 있는 상태 열반입니다. 이게 진정한 위웨까(viveka) ― 완전히 멀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고요한 상태. 멀어져 있는 상태. 혼자 있는 3가지 상태가 위웨까입니다.
빠락까마 위리야 : 점점 더 강해지는 노력
그 다음 빠락까마(parakkama)가 있습니다. 빠락까마 위리야(parakkama-viriya)라고 합니다. 위리야를 계속 한 단계 한 단계 올리는 겁니다. 점점 도수를 높여서 올리는 겁니다. 점점 올립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 위리야보다 점점 더 정진의 강도를 올리는 거죠. 한 단계 한 단계 분명히 더 올립니다. 볼륨을 더 올리듯이, 더 올리지 않고 계속 같은 위리야를 유지하면 안 됩니다. 점점 더 위리야가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는 나이가 들면 하기 힘듭니다. 위리야를 점점 짜내야 되는데 연세가 많으면 위리야를 계속 짜내기 힘듭니다.
마음이 몸에 기초해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물질에 의지해서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몸이 낡고 힘이 없으면 마음도 그만큼 짜내기 힘듭니다. 위리야는 마음이죠. 마음이 그렇게 생기기 힘들죠. 계속 더 짜내기 힘듭니다. 진정한 위웨까를 위해서는 위리야를 계속 점점 높여야 합니다. 위리야의 강도를 단계 단계 더 높여야 합니다.
다른 일들은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고. 다른 일들은 같은 강도로 계속 계속하면 점점 좋아집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매일 매일 꾸준히 하면 그게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고 석 달이 되고 3년이 되면 점점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 있는 거죠. 매일 매일 한 시간씩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게 쌓입니다. 그런데 위빳사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똑같은 수준으로 매일 매일 한 시간씩 한다고 해서 위빳사나의 지혜가 더 올라가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한 것보다 이번 시간에 더 열심히 해야 하고 그 다음 시간에 더 열심히 해야 하고 그다음 날 더 열심히 해야 하고 더 더 많이 해야지 지혜가 점점 더 생깁니다. 같은 수준으로 계속하고 있으면 지루해서 혼침만 옵니다. 지겹거든요. 계속 같은 것만 보기 때문에 위빳사나는 그런 수행이 아닙니다. 계속 더 노력해야지 점점 더 올라가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위리야를 한 단계 한 단계 더 올려야 된다. 그렇게 완성시킵니다. 그러면 이제 칸띠(인내) 바라밀, 삿짜(진실) 바라밀. 이런 바라밀들. 보시, 지계부터 시작하는 그 앞부분에 있는 바라밀들.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위리야와 함께 생깁니다. 위리야 없이 이런 바라밀들이 생기지 않습니다. 위리야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노력 없이는 가장 쉬운 선업 보시도 할 수 없습니다.
보시를 하려면 물질을 모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됩니다. 재산을 모으기 위한 노력이 있고 그 다음에 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보시하는 과정에서도 위리야가 필요하죠. 내가 모으기만 해선 보시가 되지 않습니다. 주기 위한 노력을 또 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잘 줄 수 있을까? 더 효과가 있는 곳에 줄 수 있을까? 이런 노력들도 지혜와 함께하는 위리야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노력이 있어야 바라밀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다나 바라밀, 계를 지키는 바라밀도 위리야가 있어야 합니다. 8계를 지키기 위해서도 위리야가 있어야 됩니다. 5계를 지키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고 8계를 지키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바라밀이 위리야와 함께한다. 노력과 함께합니다.
노력 없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보시물을 보시하는 것. 버리는 것. 그리고 보시를 칭찬하는 것. 보시를 응원하고 칭찬하고 부추기고 하는 것. 그리고 중생들의 목숨과 재물 그리고 자식과 아내가 다치지 않도록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 헤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좋은 말 하는 것. 듣기 좋은 말 하는 것. 그리고 번영이 있는 말, 발전하도록 말하는 것.
계를 완성시키는 것. 계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넥캄마(출리), 5욕락에서 벗어나서 중생들에게 4대 보시물(의복, 음식, 거처, 약)을 받는 것. 즉 출가해서 4대 보시물을 받는 것. 중생들에게 법문을 하는 것. 스스로 많은 번영과 발전을 수행하는 것. 닦는 것. 그리고 지혜로 중생들의 번영과 발전을 위한 방법들을 효율적으로 생각해내는 것. 어떻게 하면 중생들을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지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그런 방법들에 능숙한 것.
그리고 또 위리야로 그 방법을 강구하는 데 있어서 힘들고 고통스럽고 이럴 때 물러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가는 과정에서 힘들고 잘 안 되고 낙심하고 이럴 때 물러나지 않는 것. 물러나지 않기 위해서 또 노력하는 것. 이건 인내죠. 그리고 중생들의 허물, 중생들이 잘못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참는 것. 중생들이 잘못해도 그것을 참는 것. 그리고 진실하게 중생들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것. 중생들을 속이지 않는 거죠. 중생들에게 진실한 것.
그리고 또 중생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도움 주기 위해서 항상 결심하는 것. 중생들이 허물을 짓고, 바르게 하지 않고, 말을 안 듣고 속이고 해도 보살은 속이지 않고 계속해서 중생들의 발전을 위해서 중생들을 도움 주기 위해서 아딛타나 합니다. 결심합니다. 중생들이 도움을 받도록 중생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도록 계속 그렇게 실천합니다. 그런 행동들을 합니다. 보살에게 손해를 끼치고 피해를 입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보살은 자애로 중생들의 발전과 행복 이것만을 계속해서 생각합니다. 보살이 평정심을 어떻게 쓰냐 하면 중생들이 보살에게 좋은 일을 할 때 고마운 일을 할 때 그리고 또 반대로 고맙지 않은 일, 손해를 끼치고 해를 끼치고 했을 때 이때 우뻭카(평정심)를 씁니다. 좋은 일을 해줄 때도 우뻭카이고 안 좋은 일, 피해를 끼치고 상처 입히고 할 때도 우뻭카로 유지합니다. 이렇게 한정 없는 중생들에게 이 마음으로 지냅니다. 보살들의 이런 점들이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존재들의 이 10가지 바라밀과 보살이 하는 10가지 바라밀이 비교가 안 된다 합니다. 아뚤라(atula. 비교할 수 없는)라고 하죠. 붓다의 공덕 중에 ‘아뚤라’라고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없다. 비슷한 존재가 없다. 이렇습니다. 보살과 비슷한 존재가 없다.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거죠. 선업과 지혜를 세우는 이쪽으로 공부하고 노력하고 이런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항상 정성스럽고 완성되도록 가득 차도록 노력합니다. 이게 결론입니다. 보살은 그걸 채우는 데 있어서 항상 정성스럽고 10가지 바라밀을 채우는 데 있어서 정성스럽고 완전해지도록 노력합니다.
오늘 법문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필사자: 아꿉빠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4-12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71
일부용어 수정.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