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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하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신명기28:12~14
2016년 7월 24일 장안중앙교회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설교:
어느 집이든 어떤 건물이든 출입문이 있습니다. 문이 없는 집은 어찌보면 집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즘은 출입문이 참 다양합니다. 현관문, 미닫이 문, 개방문, 회전문, 자동문, 철문 등... 이런 문은 출입을 위해서도 있지만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사는 사람의 권세를 표현하거나 위엄을 들어내기 위해 만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국보 1호로 남대문이라 불리는 숭례문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상징문이 되었습니다. 중국에 수도 북경에 가면 천안문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수원에도 북문이라 불리는 장안문과 남문이라 불리는 팔달문, 동문이라 불리는 창룡문, 서문이라 불리는 화서문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단지 출입을 위해서만이 아닌 방어용으로 만들었던 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門)이라는 것이 꼭 유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형의 문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기독교에서는 “마음 문”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마음에도 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문이 닫혔다” “마음 문이 열렸다” 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문이 여러 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문은 ‘하늘 문’ 입니다. 창28:17절에 보면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잠자다가 꿈에 하나님을 뵙습니다. 그리고는 깨어서 엎드려 말합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이 그곳을 하나님의 전이고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집이이 하늘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행7:56절을 보면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하나님 아들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마3:16절에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하늘 문이 언급될 때 대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복도 하늘 문이 열려야 합니다. 건강의 복도 하늘 문이 열려야 받을 수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도 하늘 문이 열려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 문이 열려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우리 성도에게 허락하신 하늘 문은 몇가지일까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의 문이고, 또 하나는 축복의 문입니다.
이 문은 어떻게 열리는 것일까요?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기를 축원합니다.
1. 구원의 하늘 문입니다.
구원의 문은 천국 문을 의미합니다. 마16:19절에 보면 우리 주님은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9절을 다 같이 읽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여기 ‘천국 열쇠’는 무엇을 말하나요? 그 열쇠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천주교는 이 열쇠를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 것이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즉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으면서 가짜로 고백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진심으로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천국 열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이 열쇠를 가진 자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갑니다. 아멘?
그러기에 구원의 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입니다. 만약 누구에게 이 천국 문이 닫혔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라는 열쇠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라기는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열쇠를 가진 자이기에 천국 문이 열리는 복을 누리는 백성인줄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다시 확실하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이기에 오늘 죽으셔도 천국가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3:16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분명 믿는 자입니다. 그분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천국 열쇠가 주어졌고 그러기에 구원의 문이 열린 성도인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다른 열쇠가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요 1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또한 행2:21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행16:31절에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제가 수십 번, 수백 번 여러분에게 외쳤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의 하늘 문이 열립니다. 아멘?
2. 축복의 하늘 문입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두 번째 하늘 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의 하늘 문입니다. 다른 말로 축복의 하늘 문입니다. 이것이 열려야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이 복은 물질의 복일 수도 있고 신령한 복일수도 있습니다. 이 복의 하늘 문이 열리지 않으면 누구도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천국에는 보물 창고가 있습니다. 신28:12절에 보세요.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寶庫)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도 하늘의 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하늘 문이 닫혀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문을 열쇠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하늘 문이 열려야 은혜가 넘치고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복을 받을 수 있는데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무엇일까요? 그 열쇠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말씀 순종입니다.
축복의 하늘 문을 여는 첫 번째 열쇠는 말씀에 대한 순종(順從)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신명기28장은 1절부터 68절까지 있는 비교적 긴 장(章)입니다. 흔히들 ‘축복의 장’이라고 이름이 붙은 장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복에 관한 것은 1절부터 14절까지입니다. 그리고 15절부터는 68절까지 무려 네 배가 넘는 분량인 54절 내용은 저주에 관한 내용입니다. 축복 장(章)속에 저주에 관한 이야기가 훨씬 많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저주받을 일에 대하여 조심해야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죄인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보다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를 질 가능성이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짓을 하면 저주를 받는지 알아야 하기에 저주의 경고를 더 많이, 그리고 더 세밀하게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문제는 신명기 28장을 자세히 보면 복과 저주의 차이는 글짜 하나 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 순종과 불순종, 이 불(不)자가 있으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면 하나님은 복의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 문을 닫아서 저주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니 말씀에 대한 순종이 복의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13절을 다시 보세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물창고를 여시는 방법은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켜 행하면 어떤 복을 주시나요? 앞에 구절에서 약속하셨습니다. 머리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지도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12절에 때를 따라 은혜의 비를 내려 주시고 우리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이 복이 말씀 순종으로 누려지기를 축원합니다.
2) 십일조입니다.
복의 하늘 문을 여는 두 번째 열쇠는 십일조입니다. 이것도 앞서 말씀드린 순종과 직결된 것이긴 하지만 말라기3:10~12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십일조와 하늘 문이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말3:10~12절입니다.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형식적인 십일조가 아닙니다. 흉내만 내는 십일조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 십일조를 드리면 어떤 복이 주어지나요?
먼저, 하나님은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 하십니다.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장담하십니다. 이 말을 반대로 말하면 십일조를 안 하거나 떼어 먹으면 하늘 문이 닫혀서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서 이와 같이 엄청난 복을 약속하는 것일까요? 십일조가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하늘 문을 연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십일조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면 복이 임합니다.
성도가 주님께 물질을 드리면 자동적으로 몸과 마음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마6: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억지로 드리는 헌금은 우리 삶에 엄청난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렇지만 자원하여 기쁨으로 십일조를 드리면 우리 신앙은 엄청나게 성장하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믿음이 성장하고 복을 받습니다. 왜냐면 물질을 드릴 때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헛수고가 하지 않게 하신다고 합니다. 말3:11절에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메뚜기’는 우리나라 들판의 메뚜기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우리나라 메뚜기는 커봐야 손가락 하나만 합니다. 저희 어릴 때는 그 메뚜기 잡아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역의 메뚜기는 크기가 사람 손바닥만한 것입니다. 그런것이 한 번에 수천 수만 마리가 날아와 갉아먹는 것입니다. 이 메뚜기 떼가 한번 지나가면 일 년 내내 수고한 농사가 완전히 초토화 되고 맙니다.
또 포도나무의 소산이 익기 전에 떨어지는 것도 헛수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런 사람이 없나요? 일 년 내내 죽을힘을 다해 번 돈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이런 것 드릴 때는 아까워서 손을 벌벌떫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 다 날려버리고 깨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제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헌금이나 할 걸”
하나님은 믿는 자가 죄를 범하면 여러 차례 경고합니다. 그런데도 그 경고를 듣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내게는 ‘메뚜기’가 절대 안 닥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그 메뚜기가 얼마만큼 갉아 먹었나요?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만큼만 먹으면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우연’이라 생각합니다. 이 메뚜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옵니다. 그래서 내가 평생 수고하고 쌓아 놓은 것, 안 먹고 안 입고 아끼고 수고해서 벌어 놓은 것을 한방에 다 갉아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쫄딱 망하게 합니다.
이 메뚜기는 내 재산을 갉아먹을 수도 있고 내 건강을 갉아 먹을 수도 있고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을 갉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이 메뚜기를 막아주신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헛수고가 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충주 용원이라는 곳에 용원교회 임만재 목사님이 계십니다. 지금은 은퇴하셔서 원로 목사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교회 부흥회도 오셨었는데 아주 재미있는 분입니다. 그 목사님은 교인들이 십일조를 안 하면 집으로 받으러 간답니다.
심방을 가셔서 하시는 말 “집사님 쫄딱 망하고 싶어요? 아니면 가정도 복을 받고 교회도 복을 받을 거요?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내놓으세요.”하신답니다. 그리고는 잠 잘 때가 되도 집에 안 간답니다.
그러면 “다음 주에 꼭 하겠습니다.” 한답니다. 그러면 간절히 축복기도 해주고 온답니다. 그런데 다음 주에 안하면 또 가신답니다. 그래서 시골 면단위 교회인데도 수백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시골 리 단위 마을 교회인데 충주시내에서도 교회로 나온답니다.
그 목사님 하시는 말씀, 십일조를 안 하면 하나님을 상대로 한 도적놈이고 주일을 성수하지 않으면 날도둑이라고 한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해놓고 하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아직 결단을 못하신 분 있으신가요? 되돌아보세요. 메뚜기가 없었나요? 질병의 메뚜기, 교통사고의 메뚜기, 심지어 도둑 메뚜기…….
바라기는 축복의 문을 닫지 마시고 활짝 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일조는 종자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가난해도 종자씨앗은 먹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축복의 하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3) 긍정 언어입니다.
복의 하늘 문을 여는 세 번째 키는 긍정적인 언어입니다.
그래서 벧전 3:10절에 보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혀에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요소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약3:6절도 보세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불이기 때문에 인생의 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발 하나님이 주신 언어, 말로 인해 하늘 문을 닫는 성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 문을 닫는 말은 어떤 말입니까? 부정적이고 저돌적이며 공격적인 말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은 하늘 문을 닫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문을 여는 언어란 무엇일까요 먼저, 믿음의 언어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셋째로는, 축복의 언어입니다.
믿음의 언어는 긍정적인 언어입니다.
막11:23절에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믿고 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언어가 바로 하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성도의 언어는 언제나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언어는 사탄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아멘이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다가 죽었나요? 그들의 부정적인 말, 믿음이 없는 상태의 불신앙의 말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긍정적인 믿음의 언어를 사용합시다.
또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하는 사랑의 언어, 상처받은 사람에게 따듯한 위로의 말, 이 한 마디가 천금보다 더 귀중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잘했다. 괜찮다. 미안해 등등……. 다른 사람에게 대한 칭찬의 말로 나타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답니다. 정 칭찬할 것이 없고 허물이나 약점이 보인다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벧전 3:9절에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복을 빌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축복이 담긴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마10:12~13절에 보면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느 집에 가든지 그 집을 위해서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가 복을 받기에 합당하면 복이 그에게 임하고 합당치 않으면 그 빈복이 축복한 사람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즉 축복의 언어를 사용한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축복의 언어는 하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4) 나눔입니다.
하늘 복의 문을 여는 네 번째 키는 바로 나눔과 베풂의 삶입니다.
잠11:24-25절을 보면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 것을 흩어 나주어 주는데 더욱 부하게 된다는 말입니까? 일반적인 경제 원리로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일반은총 영역에서는 부하게 되려면 쓰지 말고 저축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은총 영역에서는 나누어주고 베풀어줄 때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오히려 과도히 아끼고 인색하게 절약하여도 더욱 가난하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인색 병에 들면 하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나누고 베풀 때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 6: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두 가지 하늘 문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구원의 하늘 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축복의 하늘 문입니다.
구원의 하늘문의 열쇠는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 유일한 열쇠입니다. 그러나 축복의 하늘문은 여러 가지 열쇠가 있습니다.
말씀순종 / 십일조 / 긍정 언어/ 그리고 나눔/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이 네 개의 열쇠를 통해 하늘의 축복의 문이 열려지는 역사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