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은 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 점령하의 이탈리아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탄생하였다. 어린아이 핀의 눈으로 전쟁의 세밀한 부분을 포착해, 저마다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투에 뛰어든 유격대원들의 모습을 그렸다. 칼비노는 어딘가 삐뚤어지고 꼬여 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심원한 탐구를 보여 주며, 환상적 분위기, 절제된 언어와 상징 등 칼비노가 이후의 작품에서 추구할 세계의 일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불과 스물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쓴 이 소설로 칼비노는 이탈리아 리치오네 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목소리로 듣는 소설의 탄생
모든 외로운 이에게 들려주는 동화 같은 성장 이야기
주인공 핀은 매춘부 누나와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아이이다. 욕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야한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지껄이고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폭언을 퍼부어 대는 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거칠 것 없어 보이는 핀이지만 언제나 그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친구를 만나고 싶은 바람이 가득하다. 핀의 비밀 장소, 거미들이 굴을 만들어 살고 있는 그곳은 그동안 눌려 있던 그의 슬픔과 외로움이 절절히 되살아나는 곳이지만, 동시에 가장 순수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종전 후 반세기를 훌쩍 넘겨, 첨예한 이념 대립이 사라진 지금도 이 소설이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는 것은 이렇듯 인간 근원에 있는 미세한 감정, 생명력을 끌어내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 거미들의 집이 있는 오솔길에서 핀과 세상과의 화해가 암시된다.
마법 같은 현실, 놀이 같은 전쟁 속 인간 군상의 캐리커처
칼비노의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은 ‘환상’이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핀’, ‘빨간 늑대’, ‘오른팔’, ‘킴’이라는 이름들, 거미들이 집을 짓는 오솔길이라는 공간 설정 등 동화적 요소들이 듬뿍 담겨 우화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온갖 무기들과 폭격, 죽음이 등장하지만 핀의 눈에 비친 전투는 하나의 놀이처럼 느껴진다. 이런 비현실감이 더욱 예리하게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는 데서 칼비노의 재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특징적 부분을 우스꽝스럽게 강조하여 그리는 캐리커처처럼, 변형되고 뒤틀린 캐릭터들과 그들이 살아 움직이는 세상이 더욱 크고 가깝게 그려지는 것이다. 칼비노는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환상’의 기법을 통해 자칫 기록 문학으로 흘러가는 위험에서 벗어나며, 이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펼치게 된다.
핀은 어른들의 미움을 받으며 혼자 독일 해병에게서 권총을 훔쳐 내야만 한다. 양철 총이나 나무칼을 가지고 노는 다른 아이들은 절대 하지 않는 짓이다. 내일 아침 핀이 권총을 숨겨 어른들에게 가지고 가서 진짜 권총, 위협적으로 번뜩이는 권총, 누가 잡아당기지 않아도 혼자서라도 금방 발사될 것처럼 보이는 권총을 천천히 보여 주면 도대체 어른들은 뭐라고 할까? 아마 그들은 겁을 먹을지도 모른다. 핀 자신도 윗도리 속에 권총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두려울지 모른다. 핀에게는 빨간 화약 한 줄로 쏠 수 있는 장난감 총 한 자루면 족할 것이다. 그 총이면 어른들이 기겁을 해서 그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다. - 본문 26쪽 중에서
줄거리
독일 치하 이탈리아의 빈민가 소년 핀은 매춘부인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너무 일찍 어른의 세계를 접한 핀은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골목의 선술집에서 천연덕스럽게 어른들과 음담패설을 나누며 어른의 세계로 몸을 숨긴다. 그러나 어른의 세계에서도 핀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아웃사이더일 뿐이다. 이미 아이의 세계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린 핀은 어른의 세계에 끼어들기 위해 매일 밤 누나를 찾아오는 독일 해군의 권총을 훔친다. 그러고는 자기만의 비밀 장소인 거미들이 집을 짓는 곳에 감춘다. 이로 인해 정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 핀은 그곳에서 유격대원 ‘빨간 늑대’를 만나 함께 감옥을 탈출하지만 이내 다시 혼자 남게 된다. 누나가 있는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거미집이 있는 비밀 장소에서 방황하던 핀은 또 다른 유격대원 ‘사촌’을 만나 ‘오른팔’의 파견대에 들어가게 된다. 핀은 드디어 진정한 어른의 세계에 속하게 됐다는 기쁨에 들뜨지만 곧 그곳에도 자신이 찾던 친구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핀은 배신자 ‘펠레’가 자신이 숨겨 둔 권총을 훔쳐 간 것을 알게 되는데……. 나만의 왕국, 거미들이 집을 짓는 그곳을 보여 줄 진정한 친구를 찾아 핀의 위험한 모험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