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로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1동 무계리에 있는 도로이다 근처 건물은 남명더라우 1단지, 남명더라우 2단지, e편한 세상등이 있다. 고속버스 터미널도 생긴다고 한다. (무계 고속버스 터미널) 무계로는 무계 개발지구를 이어주는 아주 중요한 도로이다.
무계리(茂溪里)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에 있는 법정리(里).
의봉산[535m] 줄기가 물한령[449.8m]을 거쳐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끝자락 낙동강 변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북서쪽으로 해발 고도 212m의 구릉성 산지가 있고, 마을 남동쪽으로 낙동강 범람원에 발달한 충적 평야가 길게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서남쪽으로 흐르는 세 줄기의 세천은 북서쪽 계곡 상류 박살못에서 흘러나오는 계류와 만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 계류는 서쪽 박살리와의 경계가 된다. 동남쪽으로 흐르는 작은 내는 마을 앞 충적 평야를 남서 방향으로 흐르다가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마을 뒤로 새터산과 농바우재가 있고, 마을 앞으로 논공들·무계앞들·햇골들 등의 들이 펼쳐져 있다.
조선 말기 성주군 가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에 딸린 무계역이 있었으므로 역마 또는 무계라 하였다. 1670년경(현종 11) 오씨와 김씨 등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어떤 도인이 지나가다 서남쪽으로 뻗은 세천(細川) 세 줄기는 닭의 오른쪽 날개, 동남쪽으로 흐르는 작은 내는 왼쪽 날개, 마을 뒷산은 닭의 몸통 같아 마을 형국이 마치 닭이 춤추는 듯하다 하여 무계(舞鷄)라 하였다. 그 후 손씨와 이씨가 들어와 살면서 낙동강 변에 번창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성할 무(茂)’자와 ‘시내 계(溪)’자를 써서 무계(茂溪)라 하였다.
-1906년(고종 43) 고령군에 편입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율리동을 병합하여 무계동이라 하고 성산면에 편입하였다.
-1988.5.1 성산면 무계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무계, 새터가 있다. 무계는 조선중엽 어떤 도인이 이 마을을 지나다가 서남쪽으로 뻗은 하천 3개는 닭의 오른쪽 날개이며 동남쪽으로 흐르는 작은 내는 왼쪽날개이고 마을 뒤의 산은 닭의 몸통같아 마치 닭이 춤을 추는 듯하다 하여 마을을 무계(舞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후 손씨와 이씨가 들어와 성할 무 자에 시내 계 자를 붙여 낙동강 가에 번창하는 마을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새터는 무계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여양 진씨가 이곳에 정착한 후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옛날 이곳에 많은 밤나무가 있어다 하여 밤마을이라고도 불린다. 해주오씨 집성촌으로 15세대가 모여 살고 있다.
면적은 2.63㎢이며(2010년 3월 기준), 총 88세대에 163명(남자 75명, 여자 8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5.12.31 현재).
낙동강과 나란히 지나는 지방도 905호선이 다산지방산업단지로 이어지고, 마을 건너편 낙동강 변에는 제방이 있다. 주산업은 농업이다. 문화 유적으로는 충렬공(忠烈公) 정시(鄭蓍)의 묘각인 모의재(慕義齋), 1902년 세운 해주오씨의 재실인 이노재(履露齋) 등이 있다. 북쪽 자연 절벽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계리산성이 있다.
무계리(武溪里)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에 있는 법정리(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마을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한 곳이다.
무계리는 대부분 산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지 사이에 형성된 골짜기가 남에서 북으로 길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골짜기에서 무계천(武溪川)이 흘러 무계리 북쪽 성덕댐의 성덕호로 유입되면서 보현천(普賢川)에 합류한다. 무계리 남동쪽에 면봉산(眠峯山)[1,120.6m]이 솟아 포항시 북구 죽장면과 행정 경계를 이룬다. 동쪽은 현동면 월매리·포항시 북구 죽장면, 남서쪽은 현서면 갈천리, 남쪽은 영천시 화북면, 북서쪽은 현서면 수락리와 접하고 있다.
본래 청송군 현남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현남면 무계동과 두암동, 유전동을 병합하여 무계동이라 해서 현서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에 군조례에 의해 무계동이 무계리로 개칭되었다.
무계동(武溪洞)은 무지개 또는 양지무지개로도 부른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마을 모습이 마치 무지개처럼 생겼다 하여 부르게 된 이름이라 하며, 양지무지개라 한 것은 양지 쪽에 있기 때문이다. 무계라는 지명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무지개의 발음과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무계리는 현서면의 남동단(南東端)에 있는 지역으로 행정리는 무계1리와 무계2리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무계, 당골, 말방동, 누럿밭(누릿발), 독짐골, 중뜸마을, 새산, 조듬 등이 있다. 무계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고, 당골마을은 당나무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말방동마을은 무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약 400년 전에 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마을 뒤에 말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서 말방, 두암(斗岩)이라 불렀다. 아릿마·아랫마와 웃마·음지뜸으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하였다. 누럿밭마을은 보현산(普賢山)[1,124m] 기슭 골짜기의 조그만 마을로 약 500년 전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말방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개척 당시에는 느릅나무가 많았다 유전(楡田)이라 하였고 이에 붙여진 이름이다. 독짐골마을은 도검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며, 중뜸마을은 말방동과 누럿밭(누릿발) 사이가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새산은 청송군, 포항시, 영천군의 경계가 되는 곳에 있는 마을로 험준한 산 사이에 있으므로 간산(間山), 즉 사이산을 줄여 새산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칠미기는 새산마을의 남쪽에 있으며, 마을 앞과 뒷산에 칡덩굴이 온 산을 뒤덮어 칡목이라 하였는데, 칠목이 칠미기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조듬이는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앞산 바위 위에 큰 새가 서식하였는데, 이 새가 마을을 보호하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조디미, 조암(鳥岩)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면적은 18.2㎢이며, 총 40가구에 66명[남자 33명, 여자 33명, 외국인 제외]의 주민이 살고 있다(2016년 12월 말 기준). 무계리는 현서면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반면, 인구는 58명의 수락리 다음으로 적은 법정리이다.
무계리의 북부는 성덕댐의 성덕호가 자리 잡고 있다. 보현천에 만들어진 성덕댐은 기존의 농업용 저수지인 수락저수지를 다목적댐으로 다시 건설한 것으로 2015년 준공되었다. 안덕면 성재리에 댐이 축조되었으며, 안덕면 성재리와 현서면 무계리·수락리에 걸친 수몰지역은 성덕호가 되었다. 성덕호를 건너기 위해 지방도908호선의 무계교가 건설되었는데, 무계교는 현서면 무계리와 수락리 두 지역에 걸쳐 있는 다리이다. 성덕댐의 건설로 무계리 북쪽의 일부 자연마을은 수몰되었으며, 나머지 소규모 마을들이 산간 계곡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다. 면봉산 정상부에는 면봉산기상관측소가 있다.
무계리(武溪里)
함경북도 어랑군 동부에 있는 리.
북쪽은 지방리(芝坊里)·어대진노동자구, 남쪽은 화성군 삼포리(三浦里)·호남리(湖南里), 서쪽은 봉강리(鳳岡里)·양견리(량견리, 良見里)와 접하며 동쪽은 동해에 면한다. 8·15광복 전부터 경성군 어랑면에 속해 있다가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면이 폐지되면서 무계리 일부, 이암리, 오상리가 합쳐져 신설된 어랑군 무계리가 되었다. 리 이름은 풀무개라고 부르던 마을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동부와 남부는 산지이며 서부는 무계천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충적지와 남북으로 길게 놓인 현무암 고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화성군 삼포리와의 사이에는 이 지역 최고봉인 강릉산(707m)이 솟아 있다. 리 북부에 북한 천연기념물 제327호로 지정된 자연호수인 무계호가 있다.
경작지는 군 전체 경지면적의 1.6%로 비교적 적으며 밭보다 논이 많다. 논의 대부분은 무계호 연안에 분포한다. 연안에서는 명태·문어·낙지·임연수 등이 잡히며 동쪽 해안에 무계수산협동조합이 있다. 주요 기관으로는 고등중학교·인민학교와 병원이 있다. 무계리~어랑읍 간, 무계리~어대진노동자구 간 도로가 있다. 군소재지인 어랑읍까지는 14㎞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