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보다 무서웠던 것
11월 중순(中旬)이 되었을 때 미 해병 1사단은 선도 부대(先導部隊)가 장진호 인근의 하갈우리에 도달(到達)했지만 미 10군단의 여타 부대에 비하면 느린 진격 속도(進擊速度)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10월 25일에 중공군(中共軍)이 등장(登場)한이후 전쟁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맥아더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조짐(兆朕)이 좋지 않았습니다.
가장 우려스러운 곳은 미 8군의 우익(右翼)을 담당하고 있는 국군 2 군단 지역(地域)이었습니다.
↑하갈우리의 얼어붙은 계곡에서 경계를 서고있는 미해병대원의 모습
↑미 해병 1사단의 진격 속도는 인접 부대에 비해 뒤졌습니다
만일 이곳이 붕괴(崩壞)되면 미 8군과 동부전선(東部戰線)의 미 10군단 사이에 커다란 간극(間隙)이 발생하여 전선이 단절(斷絶)될 우려(憂慮)가 컸습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예방(豫防)하기 위해 가장 가까이 있던 미 해병 1사단에게 장진호에서 낭림산맥(狼林山脈)을 넘어 전선을 미 8군과 조속(早速)히 연결(連結)하라는 명령이 다시 하달되었습니다.
그동안 앞만 보고 공격하다가 벌어진 전선의 간격을 막기 위해 내린 고육책(苦肉策)이었습니다.
↑미 해병 1사단에게 미 8군과 전선을 연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미 해병 1사단은 7연대가 유담리(柳譚里)로, 5연대가 무평리(武坪里 : 희천과 강계 중간지점) 방향(方向)으로 진격했으나 11월 27일, 중공군(中共軍)의 강력한 저항(抵抗)에 저지(沮止)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單純)한 교전(交戰)이 아니라 매복(埋伏)하고 있던 5배 가까운 적들이 쳐 놓은 포위망(包圍網) 안에 미 해병 1사단이 들어와 있던 무시무시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사실이 정찰대(偵察隊)에 의해 확인된 직후부터 사방팔방(四方八方)에서 중공군의 공격(攻擊)이 개시(開始)되었습니다.
↑미 해병 1사단은 중공군이 쳐 놓은 포위망에 갇혔습니다
미 해병 1사단에게 가해진 압박(壓迫)은 전 전선(全戰線)에 엄청난 영향(影向)을 주었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장진호 일대에 고립된 2만의 미 해병 1사단을 포위(包圍)한 것은 함경도(咸境道) 일대에 출몰(出沒)한 공산군(共産軍)의 전부라 해도 과언(過言)이 아닌 10만으로 추산(推算)되는 중공군(中共軍) 9병단(兵端)이었습니다.
만일 여기서 미 해병 1사단이 격파(擊破)되면 저 멀리 함경북도까지 올라가 있던 나머지 미 10군단 예하 부대들은 자동적(自動的)으로 고립(孤立)되는 형국(形局)이었습니다.
↑압록강변 혜산진을 점령한 미 7사단도 위험해졌습니다
↑ 좌측, 중공군과 격렬한 전투로 지친 미7사단 31연대전투단 병사들이 눈 덮힌 장진호가 보이는 참호에서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과 우측, 128km의 죽음과 공포가 뒤섞인 포위망 돌파 혈투를 마치고 흥남항에 도착하는 유엔군들
[자료제공=생명의 항해]
그들은 미 10군단 전체의 생존(生存)을 위해서라도 좌절(挫折)하지 않고 탈출(脫出)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중공군 못지않은 무서운 적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밤에 영하 30도 가까이 내려가는 날씨였습니다.
수많은 병사(兵士)가 처음 겪는 혹한(酷寒)에 노출(露出)되어 하염없이 쓰려졌고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구출(救出)된 이들도 동상(凍傷)으로 손발을 잃게 된 경우가 부지기수(不知其數)였습니다.
이후 이를 계기(契機)로 미군의 동계전투 전술(冬季戰鬪戰術)이 새롭게 연구(硏究)되었습니다.
↑처음 겪는 혹한이 가장 무서운 적이었습니다
철수 명령(撤收命令)이 하달(下達)되자 이런 극악(極惡)한 조건(條件)에도 불구하고 스미스(Smith)는 가장 앞에 서 있던 양(兩) 연대를 12월 4일, 사단 본부(師團本部)가 있는 하갈우리로 철수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부상병(負傷兵)을 둘러매고 중공군 4개 사단의 집요(執拗)한 방해(妨害)를 물리치고 이룬 결과(決科)였지만 이것은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에서 써 내려간 신화(神火)의 시작(始作)에 불과했습니다.
하갈우리에는 4,300여 부상자를 포함한 10,000여 명의 병력과 각종 장비가 집결했습니다.
↑5연대와 7연대가 적진을 뚫고 하갈우리에 집결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중공군 8개 사단에 포위된 이들이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함흥(咸興)까지 안전하게 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해 보였습니다.
이때 중장비(重裝備)는 유기(遺棄)시키고 병력(兵力)만 공중(空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이는 마지막까지 활주로(滑走路)를 엄호(嚴護)해야 하는 2개 대대를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불명예(不名譽)스러운 행동(行動)이라며 거절(拒絶)하고 단지 4,300명의 부상자(負傷者)만 수송기(輸送機)로 공수(空輸)시키고 주력(主力)은 지상(地上)으로 탈출(脫出)하기로 결정(決定)했습니다.
↑하갈우리에 축성된 임시 비행장에서 이송되는 부상병, 퇴각하는 미 해병대 1사단 7연대 해병들이 동상환자를 비행기로 실어나르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1950년 12월 22일
다행히도 진격(進擊) 당시에 곳곳에 확보(確保)하여 놓은 보급로(補給路)와 물류 기지(物類基地)는 미 해병 1사단이 극악(極惡)한 조건(條件)에서 생존(生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특히 하갈우리에 만든 임시 비행장(臨時飛行場)은 결정적(決定的)인 생명선(生命線)이었습니다.
툭하면 알몬드 미 10 군단장(軍團長)이 미 해병 1사단의 진격 속도가 지지부진(遲遲不進)하다고 불만(不滿)을 표시(表示)했었지만,
결과적(結果的)으로 이러한 신중(愼重)함이 미 10군단 전체(全體)를 살린 지름길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