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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2]
샬롬을 주셨어요! (Shalom ON)
참고말씀: 창1:3; 11:31; 18:8; 32:30; 출4:10,13; 레2:1; 수24:2; 삿6:6,11-14,33; 삿13:19-23; 렘1:5; 23:29; 29:11; 롬4:17; 16:20; 고전1:26-29; 빌4:9; 살전5:23; 히4:12; 11:3
읽을말씀: 삿6:15-32
주제말씀: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첫째, 여전히 부르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적은 자니이다.”(삿6:15)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까? 아닙니다. 한동안 계속 망설이고 주저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자신의 무능력이나 현실만을 바라보면서 자포자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적은 자니이다.”(15절)
계속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자신의 집과 자신이 작다는 점입니다.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적은 자니이다.”(15절 하)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유력한 집안을 배경으로 둔 사람이라야 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으며, 자기 집에서 가장 큰 자라야 더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약한 가문도 들어 쓰시고 가장 작은 자도 들어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이와 같이 자신의 환경이나 한계만을 바라보는 것은 누구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까? 엔샬롬의 사람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이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상황이나 환경만 바라볼 뿐,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잘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좀처럼 주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자신만 바라보면 답이 나옵니까? 우리 주변만 바라보고 있으면 방법이 보입니까? 나올 수가 없습니다. 찾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주목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16절)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만 바라보고 우리 환경만 바라보면 도무지 답이 안 나옵니다. 우리 상황만 바라보고 우리 형편만 살피니깐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안 됩니다!’, ‘나는 할 수 없어요!’,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등의 말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언제까지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무능력이나 상황만을 탓하면서 무기력하게 살아갈 작정입니까? 언제까지 모세나 예레미야처럼 안 된다고만 말하며, 언제까지 못한다고만 말할 작정입니까? 지금 당장 부르심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출4:13) /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렘1:5)
둘째, 여전히 무언가를 더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삿6:17,18)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16절)라는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어떠했습니까? 여전히 주저하고 망설였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좀 더 확인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해 확인해보고 싶었습니까? 자기에게 나타나 위로(12절)와 소명(14절), 확신(16절)을 주신 분의 정체입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17절)
어째서입니까? 말이란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나 능력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평범한 사람이 뱉으면 평범한 말에 불과하지만, 위인(偉人)이나 현자(賢者)가 말하면 격언(格言)이 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 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다릅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11:3 상)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전능하신 창조주(創造主)이시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하)
참고로, 미디안 사람들은 당시 어떠했습니까? 거의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두루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삿6:6 상) 그런데 이런 미디안 군대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16절)는 말씀은 인간적으로 보기에 너무도 터무니없는 것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자신에게 말씀하신 이가 누구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졌을 것이고요.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무엇입니까? ‘예물’입니다. 즉 그에게 예물을 드려서 어떻게 처리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신원을 파악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리리라 하니라.”(18절)
참고로, 기드온이 가져온 예물은 귀한 선물을 특별히 대접할 때 내어놓는 음식이기도 했지만,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창18:8) ‘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민느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레2:1 상)
이를 간파한 여호와의 사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즉 바위에서 불이 나와서 기드온이 가져온 고기와 무교병을 사르게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았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21절) / “이에 마노아가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리매 이적이 일어난지라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본즉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간지라...”(삿13:19,20)
사실 본문의 ‘여호와의 사자’는 누구였습니까? 단순히 천사들 중에 하나였습니까? 아닙니다. 성자 예수님, 곧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① 본문에 ‘여호와의 사자’(11,12,20,21,22절)와 ‘여호와’(14,16,23,절)가 교차적으로 사용된 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14절)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16절)
② 여호와의 사자와의 대면을 여호와와의 대면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22절) /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32:30) /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삿13:21,22)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기드온처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저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채, 주저하면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무언가가 더 필요하며 여전히 무언가가 추가적으로 확인되어야 의구심을 떨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원컨대, 확인받고 싶었던 기드온에게 그 표징을 주심으로써 소명 가운데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말씀을 통해 우리를 우리의 비전 가운데로 천천히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 부르심 앞으로 과감하게 첫 발을 내딛기를 원합니다.
셋째, 엔샬롬에서 샬롬의 모습으로 회복되어갔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삿6:23,24)
아무튼 이를 통해 기드온은 비로소 무엇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자신과 말씀하신 분이 바로 ‘여호와의 사자’, 곧 ‘여호와’시라는 점입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인 줄을 알고...”(22절 상) 그런데 그 순간 그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하였을 뿐 아니라 시험하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22절 하)
이는 후일 누구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까? 삼손의 아비 마노아입니다.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깨닫고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삿13:21,22) 물론 그는 시험까지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대면하였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노아는 아내의 답변을 통해 하나님의 본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셨더라면 그들의 제사도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고,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런 말씀도 처음부터 하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삿13:23)
기드온의 경우는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까?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고 직접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3절)
이를 통해 그는 어떤 점들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미래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셨다면, 처음부터 ‘큰 용사’라고 부르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삿6:12 상)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내라’고 소명을 주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삿6:14 상) 처음부터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는 말씀도 아니 하셨을 것이며,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16절 하) 처음부터 ‘내가 너를 보낸다’고 말씀하지 아니 하셨을 것이며,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삿6:14 하) 처음부터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도 아니 하셨을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12절 하) /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16절 상)
또한 이를 계기로 누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까? 여호와 샬롬, 곧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샬롬(여호와는 평강이시라)이라 하였더라...”(24절 상) /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롬16:20 상) /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하)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5:23 상)
지식적으로만 알던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귐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결과 비로소 무엇을 체험하기 시작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평강, 곧 샬롬입니다. “...여호와 샬롬(여호와는 평강이시라)이라 하였더라...”(24절 중)
결국 샬롬의 회복은 무엇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엇을 통해 이루어집니까?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엔샬롬의 모습이 아니라 샬롬의 모습으로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부터 제대로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평안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넷째, 여전히 부족했지만 부르심을 믿고 계속 나아갔습니다!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삿6:32)
물론 부르심에 응답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고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고 순종해가다보면 우리의 믿음도 자라고 우리의 신앙생활도 점점 더 온전해지며 큰 용사, 곧 하나님의 사명자로서의 면모를 하나둘씩 갖추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자신의 집에 있는 우상을 타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년 도니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25,26절)
사람들이 두려워서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했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27절)
하지만 그가 이렇게라도 실행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해주셨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의 아비 요아스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기드온을 변호하게 하심으로써 말입니다.
“성읍 사람들이 요아스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을지니 이는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곁의 아세라를 찍었음이니라 하니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선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30,31절)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손에 먼저 맞아죽을 줄 알았는데, 그가 아들을 위해 변호에 나서다니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부르심에 순종하면, 나머지 일은 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지켜도 주시고 변화도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우상숭배자였던 그의 아비가 가나안 행을 주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24:2 하) /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룻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창11:31 상)
아무튼 기드온은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별명을 얻게 됩니까? 여룹바알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알과 다투는 자입니다. “그 날에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불렀으니 그가 바알의 제단을 파괴하였으므로 바알이 그와 더불어 다툴 것이라 함이었더라.”(32절)
또한 후에 이스라엘을 미디안 자손들에서 구원할 때 누가 가장 먼저 앞장서서 그를 도왔습니까?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삿6:33)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우리도 여전히 부족한 모습이 많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여전히 연약한 모습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용기 있게 결단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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