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15일 금요일 [(자)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수도회] 온갖 틀을 내려놓고 맞이하는 참 지혜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48,17-19
† 복음 마태 11,16-19
◈ 오늘의 묵상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치자,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보아 넘기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시며 그들의 슬픔과 고뇌를 받아 주시자,
사람들은 그분을 ‘먹보요 술꾼’으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지 않은 말에 귀를 막고, 보고 싶지 않은 대상에 눈을 감아 버립니다.
그러기에 편견과 선입견이 당연한 것으로 그들 안에 자리 잡습니다.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선입관과 비판에 대하여 ‘장터에서 패를
갈라놓고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인생이 연극 무대라고 하면,
우리는 거기서 어떤 때는 통곡하는 역할을 하고 또 다른 때는
박장대소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기쁨과 슬픔으로
짜인 옷감과 같습니다.
우리가 소외된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패를 갈라
싸우며 회개하지 않는 무리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의 기쁨을
나누고자 헌신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비방한다면, 우리는 자기 착각에
빠지고 시기심에 갇혀 빈정거리는 사람이 되고, 회개와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거부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비판받는 일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아직 그
진면모가 알려져 있지 않아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꾸준히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모욕과 수치 가운데서 더 진가를
발휘합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 사람을 단련시키고 완성시키시기
때문입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2017년 나해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8,17-19
복음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6-19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저의
어떤 행동을 보고서 한 친구가 깜짝 놀라면서 말리는 것입니다.
검정색보다 빨간색이 더 예쁜 것 같아서 빨간색 볼펜으로 이름을 쓰고
있었거든요. 말리는 친구는 빨간 색으로 이름을 쓰면 그 사람이
아프거나 죽는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얼른 지우고 다시 검은색으로
이름을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뒤 빨간색으로 이름을 쓴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말 때문일까요? 미신인줄 알면서도
쓰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생활 속의 미신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시험 전에 미역국을
먹지 말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발을 선물하지 않는 것, 방에
들어갈 때 문지방을 밟지 않는 것, 손톱과 발톱을 밤에 깎지 않는 것,
밤에 휘파람을 불지 않는 것 등등.... 이 공간을 온통 미신에 관한 말로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많습니다.
이런 미신들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요? 혹시 아십니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 만든 것을 생활 안에서 얼마나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 만든 것은 믿고 따르면서, 정작 우리 삶 안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주님의 말씀은 왜 믿고 따르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주님의 말씀은 말이 되지 않는 미신이 아닙니다. 삶 안에서 실천함으로
인해 더 큰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함으로 인해서
커다란 손해를 볼까요? 물론 물질적인 손해를 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손해는 한 순간일 뿐 영원한 손해는 결코
아닙니다.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얻게 됨을 자주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말도 듣지 않고, 당신의
말씀도 듣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지적하십니다.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했던 세례자 요한을 향해서는 마귀가 들렸다고 말하고,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한다는 것이지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믿었다면 분명히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면 분명히 사랑이신 하느님을 느끼면서 더욱 더 기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불만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니 어떤 말을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느님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습니다.
쓸데없는 것은 믿고 따르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믿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사랑이라는 정말로 중요한 가치를
말씀하시고 직접 당신의 모습으로 보여주신 주님을 믿고 따르면
분명히 더 큰 은총의 선물을 받습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남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라 로슈코프).
어제 강의를 했던 문정2동 성당입니다. 뒤에서 몰래 찍었더니 잘
안나왔어요.
나누면 더 많이 받습니다.
요즘에 대림특강을 다니느라 조금 바쁩니다. 그런데 강의 전에
본당신부님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러한 말씀을 종종 하십니다.
“저희 본당신자들 반응이 별로 없어서 힘들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없다니까요.”
이렇게 반응이 없다는 신자들이 저의 강의 때에는 열렬히 호응을
해주십니다. 제가 호응을 보이는 분들에게 계속해서 초콜릿이나 젤리
등의 선물을 드리거든요. 그래서 그 본당신부님께서는 강의 후에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본당신자들이 이렇게 반응이 좋을지 몰랐습니다. 이제까지
초콜릿이나 사탕은 아이들에게만 주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른들에게도 드려야겠어요.”
무엇인가를 드리면 상대방은 좋아합니다. 하지만 몇몇 분들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이런 말씀을 하세요.
“신부님, 신부님 월급도 많지 않을 텐데 그 많은 선물들을 어떻게
주시는 거예요?”
제게 이러한 작은 선물을 받으신 분들이 나중에 다 보내주십니다.
‘강의 때에 써 주세요.’라는 메모와 함께, 직접 만든 묵주를
보내주시기도 하고 직접 성경 글귀를 써서 책갈피를 만들어
보내주십니다. 또 여기에 상당히 많은 초콜릿과 젤리, 사탕 들이
들어옵니다.
어떻습니까? 나눠주는 것이 손해일까요? 아닙니다. 반응이 좋아서
좋고, 여기에 더 많은 것을 받아서 좋습니다. 나누는 것은 큰
이득입니다.
오늘은 서울대교구 도봉동 성당 대림특강 두번째 시간입니다.
제가 특강 때 나눠드리는 것들입니다. ㅋㅋ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온갖 틀을 내려놓고 맞이하는 참 지혜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15일 대림 재2주간 금요일
이사 48,17-19; 마태 11,16-19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온갖 틀을 내려놓고 맞이하는 참 지혜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구원자이신 주 하느님의 계명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바빌론 침공을 받고 끌려가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48,17-19 참조). 그들은 주님에게서 멀어져 평화도
의로움도 잃어버린 채 어리석음의 바다에서 헤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멀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장터의 아이들에 빗대어 지적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온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마귀 들렸다고
합니다(마태 11,18). 또한 하늘나라를 보여주려고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죄인들, 세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자 천박한 ‘먹보요
술꾼’(11,19)이라고 힐난합니다.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처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장터에서
서로 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11,17)고 말하는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선입견과 그릇된 시선을 지닌 채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도 공감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고
보고싶은 것만 보며, 듣고싶은 것만 들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는 단식과 고행을 해서도 죄인들과
어울려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굳은 사고의 틀과
왜곡된 믿음을 지닌 그들의 눈에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도
메시아도 보일 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 만든
걸림돌에 걸려넘어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전해지는
영의 울림을 감지하지 못했고 다른 이들의 삶에 공명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던 것이지요.
우리도 장터의 아이들처럼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채 자신이 만든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주님의 말씀이 들릴텐데 말입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을
버리고 유연한 의식을 가질 때 남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어지고 왜곡된 사고의 틀과 고집스런
신념은 하느님이나 이웃과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고 영혼의 어둠을
가져올 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1,19) 주 하느님이 바로 지혜이시며,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참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지혜 안에 머무는 사람은 주님의 영을 호흡하기에 주님의 영을
갈망합니다. 주님의 영을 지닌 사람은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들으며
공감할 줄 압니다. 획일적이고 굳어지고 왜곡된 마음과 행동을 버리고
인간다움을 회복해 나가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오늘도 안의 고착되고 치우치고 삐뚤어진 관념의 다발을 태워버리고,
지혜이신 주님을 맞이해야겠습니다. 나를 얽매고 세상을 비정상화
하는 온갖 틀과 걸림돌들을 치우고 만사만인을 순수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주님과 일치해야겠지요. 이 대림절에 나의 틀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마음 열어 더 깊이 공감하여 사랑의 친교를
이루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5일 금.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 19)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예수님처럼 좀더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먼저 보고 싶어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저앉은 사람들 옆에 말 없이 우리를 받아주시는
살가운 친구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친구로 우리 마음에 우리 삶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의 울분과 분노 미움과 증오를 당신 친히 어루만져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을 자연스레 열 수 있는 것은
친구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친구이신 예수님을 통해 귀하고 귀한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손을 우리또한 기쁘게 맞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진정한 친구로 산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닌 친구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맞아들이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친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서로를 살리는 친구가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아기처럼 오른손을 잡혀라./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았다. >
복음: 마태오 11,16-19
독서 : 이사야 48,17-19
아기처럼 오른손을 잡혀라.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 ‘기탄잘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죄수여, 말해주렴, 누가 그대를 가두었는지?”
“그것은 내 주인이 옵니다.”
죄수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으론 누구보다도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보물창고에는 왕에게나 어울릴 돈을 모아
놓았지요. 그런데 깨어보니 나는 보물창고에 갇힌 죄수가 되었더군요.”
“죄수여, 말하렴. 누가 이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을 만들었는지?”
“그것은 나였어요.”
죄수는 말했습니다.
“내가 이 사슬을 정성껏 달구었습니다. 나는 내 불굴의 힘으로 온전한
자유를 누리도록 세계를 사로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이윽고
사슬이 다 만들어져 끊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하게 되자 이 몸은 사슬에
꽉 잡혀 매여 있더군요.”
많은 현인들은 결국 자신을 가두고 묶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는 자신이 하느님
뜻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권력을 지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려고 하는 것에서 결국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화국장 신부님이 ‘오른손’은 ‘주도권’을 상징한다는 강론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절박할 때 오른손을 내밀지만 그 절박함을
벗어나면 바로 손을 바꾼다고 합니다. 왼손으로 상대의 오른손을
잡고 자기가 다시 주도권을 잡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은 물 위에서 주도권 경쟁을 참 많이도 했습니다. 물
위를 걸을 때 베드로는 짐짓 자신의 힘으로 걷는지 착각했다가 곧
두려움에 빠집니다. 예수님은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밉니다. 베드로는 분명 오른손을 뻗어 예수님의 손을 잡았을
것입니다. 힘이 약한 왼 손으로 잡았다가 다시 놓치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배 위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풍랑이 몰아칠 때 베드로는 잠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우지 않습니다.
배 위에서는 자신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배가 가라앉기 직전이 되어서야 자신의 오른손을
예수님께 내밉니다. 예수님은 그 손을 잡고 당신 오른 손으로 풍랑을
가라앉히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왜 이렇게 절박하게
만드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분께
오른손을 내어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룻밤에 당신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베드로는 아직 믿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펄쩍 뜁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일이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자 자신의
오른손을 아무에게나 내어줄 수 있는 겸손함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오른쪽에 그물을 치게 하십니다. 오른쪽을
내어준다는 것은 어쨌든 자신의 주도권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때 153마리나 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물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어제 독서에서 이사야서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주도권을 지니시고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고 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오늘 독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오른손’을 잡아주셔서 우리를 이끄시는
방법은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고 우리 뜻이 아닌 당신의 계명대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도권은 바로 계명입니다.
내가 주도권을 쥐고 싶기 때문에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가난해지지 못하고
부자가 되며 십자가가 아닌 편안하고 넓은 길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오늘 밤에 우리를 데려가신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하느님의 오른손을 잡고 우리 주도권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직은 우리가 물에 빠진 베드로처럼 절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절대
그분의 왼 손을 오른 손으로 잡고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베드로의
절박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더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고 당장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 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지금 당장 내가 그분의 계명에 온전히 내
주도권을 다 내어주고 있는지 돌아보아야합니다.
구원은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가시밭길로 가야하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아야하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내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해야 합니다. 저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러하겠지만 이전에
그렇게도 좋아하던 컴퓨터게임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에너지가 소비되는 데 반해 남는 것은
귀한 시간을 허비했다는 죄책감과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공허함뿐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기 위해서는
그분의 계명을 온전히 따르는 것만이 참 평화와 행복과 구원의 길임을
절실히 깨닫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여전히 현세에서 잘 살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고 있다면
그분이 계명을 절대 따를 수 없게 됩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주님의 뜻에 내 뜻을 온전해 내어맡겨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 뜻을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랐을
때 오는 평화와 행복을 조금이라도 느끼면 이젠 내 모든 삶이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아기는 부모에게 오른손을 잡힐 때 가장
평화로움을 느낍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지혜를 따르는 삶!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고
있었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보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사 8,18)이라고 한 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장터, 곧
광장에 앉아 있었다. 그 장터에는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많이 있으며
시끄러운 곳이다. 또 아이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소리를 질러야 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즉 우리는 너희가 선행을 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너희는 두 가지 선포, 즉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이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마귀 들렸다 하고 예수님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터에 앉아있는 아이들의 비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
(마르 1,4)할 때, 자신을 회개해야 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했고,
주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4,23; 9,35)하실 때,
당신 안의 빛나는 자유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그려 보여 주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하늘
나라에 저항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하늘을
찢으려 한다. 그러나 지혜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서 자신이 전에
주었던 선물을 빼앗아, 순종하며 믿음 깊은 백성에게 선물로 주기
때문이다. 지혜의 선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리고도 알지를 못한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삶이 달라졌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요한의 단식과 금욕적인 삶을 보고서도, 주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의
모습과 하늘 나라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완성하신 분을 단죄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는 고약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대림 제2주간 금요일
2017년 나해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그들은 요한의 말도 사람의 아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
† 마태 11,16-19
건설 현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타워 크레인’입니다.
무거운 짐을 쉽게 옮길 수 있고, 높은 곳까지 옮길 수 있는 장비입니다.
건설 현장에서는 꼭 필요한 장비입니다. 하지만 요즘 크레인의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더 빨리, 더 싸게,
더 많이 하려는 우리들의 욕심이 크레인의 사고를 부른 것 같습니다.
안전에 대한 의식이 있다면,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마음이 있다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인류는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댐을 만들었습니다. 여름 가뭄에 댐에
있는 물은 농사에 꼭 필요합니다. 댐은 홍수에 의한 피해를 예방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하지만 댐은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댐이 무너지면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마치 댐과
같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표현할 수도 없고,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몸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욕망에 따라서 행동하면 몸도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몸이 무너지면 생각도, 마음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심령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만이 심령이 있고, 이 심령은 수학을 잘해서,
계산을 잘해서 암기를 잘 해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적인
능력만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심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고,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지성적인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지능지수이고,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감성지수이고, 도덕적인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도덕지수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영성지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생명체와 다른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내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우리가 욕망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우리의 몸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시고 있습니다. 편견과 열등감 때문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시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에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시고
계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지혜가 이룬 일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하루 이 말을 묵상하면서 지냈으면 합니다. 저도 그 지혜가 이룬
일이 무엇인지 돌아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나해 12월15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마태11,16-19)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하겠습니까?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다 못 마땅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져 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 줄줄
알아야 합니다.“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 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1장18절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볼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콜로3,1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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