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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
응답받는 비결
요 15:16-17 / 피종진 목사
요한복음 15:16~17
우리의 기도에는 분명한 응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있어도, 어떤 사건이 있어도, 어떤 요구사항이 있어도 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의 응답을 받는 비결이란 무엇일까요?
첫째, 열매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우리가 생활 가운데 맺어야 할 열매는 ①손의 열매입니다.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잠 31:31) 손의 열매란 구제를 하면서 선한 것을 심는 것입니다. ②행위의 열매입니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사 3:10) 행위의 열매란 현실이 아무리 왜곡되어 있고 거짓과 죄악이 난무하며 죄를 합리화하고 또 의인이 고난 받고 악인이 형통한 것처럼 보여도 의로운 삶, 불의를 멀리하는 삶, 악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③입의 열매입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잠 12:14) 악하고 더러운 말을 버리고, 정직하고 의로운 말, 축복된 말, 은혜로운 말, 복음을 전하는 말, 평안의 말을 할 때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④긍휼과 선한 열매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7) ⑤평강의 열매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1) ⑥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둘째,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을 살 때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사무엘하 6장 11절을 보면 여호와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동안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는 곳에 축복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에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는지 말씀을 종일 묵상한다(97절)고 했고,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 꿀보다 더 달콤한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103절)고 했으며, 주의 말씀은 어두움을 밝혀주는 등과 빛이라(105절)고 했고, 주의 말씀을 준행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소원했으며(116절),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이 있고 장애물이 없다(165절)고 고백했습니다.
셋째,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믿음으로 구할 때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미 받은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기도하고 의심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약 1:7).
예수님은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속에 빠져 버린 베드로의 손을 붙잡아주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는 있었지만 분명한 확신이 없어 의심하였기에, 거친 바람이 일자 순식간에 믿음을 상실함으로써 더 이상 물 위를 걷지 못하고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의심은 성도로 하여금 아무런 역사도 이루지 못하는 무기력한 삶 속에로 뼈져들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손의 열매, 행위의 열매, 입의 열매, 긍휼과 선한 열매, 평강의 열매, 성령의 열매’ 등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며, 오직 믿음으로 구하여 기도하는 것마다 다 응답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월의 크리스마스
조남신 목사
> 지난주에 예고해 드린 대로 오늘은 "5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5월의 크리스마스!" the Christmas of (the) May! ... May Christmas! Merry Christmas! ...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날을 우리는 "크리스마스"라고 하고, 축하의 성탄 예배를 드려요. 그런데 이번에는 성자가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영으로 오셨어요. 이 분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불러요. 지난주가 바로 그 성령강림주일이어서, 성령강림주일예배를 드렸어요. 그때 생각해 본 것인데, 예수님이 영으로 오신 날이니 이날을 "5월의 크리스마스"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 기쁨의 성령강림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White Christmas가 아니라 Green Christmas이지요. 그런데 성령강림절을 Whitsunday라고도 해요. White Christmas와 비슷한 것 같아요. 또 성령강림절은 Pentecost라고도 해요.
>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지요. 하나님의 영일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이것은 서기 589년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부터 명시되고 있어요. Filioque(필리오케)라는 라틴말로 적혀 있어요. 이 라틴어의 뜻은 "그리고 성자로부터 (나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영이고 그리스도의 영이란 말이에요. ...
>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지요. 그래서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나 " 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해요. 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시 볼 수 있다는 의미 ② 오순절 성령강림과 더불어 영적으로 볼 것이라는 의미 ③ 마지막 최후의 날에 다시 볼 것이라는 의미, 이런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있어요. 그러나 문맥상 두 번째 의미가 가장 무난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영으로 오심으로 우리가 그를 다시 볼 수가 있게 되리라는 말씀이에요..... 그 다음으로 본문 바로 밑에 22절에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세요. 그렇다면 이 구절도 역시 예수님이 영으로, 성령으로 오셨을 때에는, 우리 마음이 기쁘고 우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입니다.
> 성령이 이미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우리 가정 속에서도, 교회 속에서도, 사회 속에서도 성령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역사하고 계심을 실감하시며 사십니까? ..... 지난주에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있는지 없는지가 성령이 임재하고 계신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한 적이 있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우리 마음에, 우리 집에 성령님을 모시고 사십니까?
> 저는 지난주에 성령강림절이니 기쁨이 충만한 날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며 예배찬송을 고르고 있었어요. 성령에 관한 찬송은 169장부터 181장까지 있어요. 그래서 그 중의 하나 169장을 골랐어요. 오늘도 설교 끝나고, 이 찬송을 부를텐데.....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축제적인 분위기가 잘 안 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찬송가에다 "성령"을 넣어서 부르면 어떨까하고 생각도 해 봤어요. ..... "기쁘다 성령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하여라"(115장). ... "천사 찬송하기를 거룩하신 성령께 영광 돌려보내세. 성령 오늘 오셨네. 크고 작은 나라들 기뻐 화답하여라....."(126장). ... 어때요? 이렇게 부르니까 어떻습니까?
>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까 성령의 오심에 대한 우리의 표현방법이 아직 서투른 것 같기도 하고, 모자란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제대로 표현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또 어떤 것은 느낌이 세지요?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성령이 오셨네"(179장)..... 불같은 성령이어서 그러는 것 같아요. 그러나 비둘기 같은 성령도 있고, 단비 같은 성령도 있는데, 어머니 같은 성령인데, ... 성령의 느낌이 강해요.
> 그러나 성령강림절은 또한 순수한 측면도 있어요. 기독교의 명절은 대개 세속화되어 있잖아요. 크리스마스, 부활절, 감사절등 이런 명절들은 세속화되어서 카드장사나 선물장사, 식당, 여행, 관광업자들... 이런 장사꾼들이 더 좋아하고 안 믿는 사람들도 좋아하는 그런 휴일이 되었어요. 그러나 성령강림절 만큼은 지금까지 아직 순수한 신앙적 절기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해요. 아직 상품화가 되지 않았어요. 상품으로 개발되지가 않았어요..... 그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는 무엇이겠어요? 이 명절이 의미하는 내용이 물질적이 것이 아니라 영적이지요? 영적인 선물이에요. 그래서 모방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어쨌든 간에 이 절기만큼은 더욱 더 순수한 신앙적 절기로 자리잡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적 기쁨을 누리고, ...
>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보면, 성령은 수난을 많이 받았어요. 성령기피증이니, 성령공포증 등 믿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반응을 많이 받았어요.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지만, 성령은 그후 계속해서 수난을 받아왔어요. 그래서 서구교회사를 통해서 봐도 성령이 설자리가 없었어요. 예수님도 물론 탄생하실 때부터 그러셨지요. 누우실 자리도 없으셔서, 빈방이 없어서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어요. 공생애기간에도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어요. 수없이 말씀과 이적으로 문을 두드리는데, 별 진전이 없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 구원에 나서니까, 사람들은 서서히 예수를 기리기 시작했어요.
> 그러다가 20C에는 성령의 바람이 부는데, 성령운동은 북미와 남미에서 일어난 오순절 운동의 여파로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세워지기에 이르는데,...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성령이 홀대를 받기도 하고, 환대를 받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오늘날에는 이제 범교단적으로, 그리고 다양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런 성령운동은 공도 있고 과도 남기면서 오늘날에까지 왔어요. 침체된 교회역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 십자가(희생) 대신 열광으로 나아가는 듯 하여 ... 기독교가 아닌 성령교가 되고 싶어하기도 하고, ... 아직도 이런 성령에 대한 인식은 편향적이기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러할 때 앞으로 이제 이런 성령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야 할까도 함께 적극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시점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미 왔지요?! 그러할때 아까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성령강림절은 순수한 신앙적 절기로 자리잡아 가기를 또한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래서 깨끗해지고, 성화되고, ... 위로받고, 치유받고, ...거듭나고 변화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 마치 이런 말씀의 연장선상 속에서 말씀하시듯 오늘 에베소서 본문에는 거룩한 건축, 신령한 건축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요? 마치 성령을 말하면서, 거룩한 영을 말하면서, 전혀 거룩하지 않은 인류문명의 탑을 오늘도 쌓아 올리는 인류를 향해 지적하듯이 ... 초대교회 이후 세계 도처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만, 이런 세상의 교회들은 모두 베들레헴 마굿간의 영성(spirituality)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의 영성을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세속화 , 물질화, 상품화!! 이런 세상의 건축은 헛된 건축이라는 거예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누가복음 12:16절)에 나오는 창고건축도 헛되고, ..... 요즘 수요일에 말라기를 공부하는데, 에돔인들의 건축도 헛되고(말라기 1:4), 지난번엔 하박국을 공부했는데, 하박국의 경우... 갈대아인들의 불의의 성건축도 헛되고(합2:12)....
> 신앙인들의 건축은 이와는 달라야 한다는 거예요. 신령한 건축은 베들레헴의 마굿간을 보고 마가의 다락방을 보면서, 교회를 중심으로 신령한 건축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요. 그래서 여기 에베소서 본문에 보면 건축의 터, 건축대지가 나오는데, 어디에 터를 잡아야 합니까?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하고 있어요. 선지자들은 구약을 대변하고 있고, 사도들은 신약을 대변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은 신구약의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아무리 멋진 건축도 무너지고 맙니다. 그 다음 그 대지 위에 모퉁이 돌이 있어야 하는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모퉁이 돌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해요. 예수가 빠지면 안돼요!! ... 그 다음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가 되기 위해선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거하실 수가 없어요.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그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유대가 필수적인 건축재료이에요. 철골구조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성령 하나님이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탄식하세요.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5월의 크리스마스" 계절입니다. 이런 거룩한 영의 계절에 먼저 우리 교회가 날마다 예수가 탄생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이 항상 강림하여 역사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야 합니다!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서로 손을 잡아야 합니다. 성도가 서로 연결되어야 하나님이 들어와 사세요...... 그러면 사랑과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겠지요. 성령의 축제는 이래야 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어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다같이 노력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선택(5) 열매
요 15:16-17 / 이동원 목사
가을이 오면 제 머리에 어김없이 떠오르는 시 한편이 있습니다. 고 김 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입니다.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시간을 가꾸게 하소서-가을에는/호올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에 열매로 가득한 수확의 황금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삶의 환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열매를 맺어야 할 계절-열매 없이 버려진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애잔한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녕 우리의 삶은 오늘 어떤 열매를 맺고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15장은 소위 포도나무 비유의 장으로 불리워집니다. 포도나무 가지와 같은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을 때 당연히 맺어야 할 열매를 교훈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절의 메시지를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 말씀에묘사된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막힘없이 거함의 상태를 가르쳐 ‘신비적인 연합’(mystical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실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삶의 주인되신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지상의 어떤 관계보다도 신비한 연합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신비한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제의 성격은 신비한 것이지만(교제의 대상이신 주님의 신비성 때문에) 교제의 결과는 결코 신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한 열매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 관계는 신비로운 관계이지만 이 관계의 결과는 삶의 현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컨대 부부사이에 자녀가 생기고 어떤 특성을 갖는 가정을 이루어 가는 결과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부 관계의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런 열매 맺음의 인생 비밀을 가르칩니다.
*바람직한 열매 맺음의 인생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무엇일까요?
1. 열매는 믿는 자의 존재의 이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예수 믿게 하신 이유가 열매 맺는 삶을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그리스도인된 나의 존재 이유는 열매를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는 존재 이유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15장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 다면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15:2을 읽겠습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를 제거하실지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을 연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심판의 경고가 아닌 열매 맺음을 촉구하는 간절한 권면일 따름입니다.
<열린다 성경>의 저자 류모세 선교사는 여기 <제거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포도나무의 특징은 길게 뻗어나가는 가지에 있는데 오늘 날은 Y자 철사를 설치하여 가지가 올라가며 원없이 자라게 하지만 옛날 예수님 당시의 재배법은 달랐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철사가 귀했기 때문에 포도가지는 뱀처럼 땅을 기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땅에 닿은 포도 가지는 열매를 맺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기에는 땅에 닿은 부분이 습기로 인해 썩고 건기에는 본 뿌리에 가지를 내리지 못해서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시대의 농부들은 땅 바닥에 닿아 과실을 맺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가지를 <들어 주어>밑에 돌을 괴어 주는 장치를 함으로 과실을 잘 맺도록 했다고 합니다. 반면 잘 과실을 맺는 가지는 잔 가지를 쳐주는 작업을 함으로 자잘한 포도 열매가 아닌 극상품의 포도 열매를 맺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거한다>는 말의 원어 아이로(airo)는 영어로 말하면 ‘들어올린다’(lift up)의 의미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연약한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들어 올리시며 내 인생의 잔가지를 만지시며 지금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그분의 우리를 향한 소망-우리가 열매 맺는 것을 보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 곧 우리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입니다.
2. 가장 중요한 열매는 ‘이웃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 열매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본문 요한복음 15장엔 몇 가지의 의미로 이 열매가 설명됩니다. 사랑과 기쁨으로 사신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적인 품성의 열매(10-11절) 혹은 본문 16절의 말씀처럼 ‘기도 응답의 열매’(7,16절)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열매는 이웃 사랑입니다. 17절 말씀이 그것을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이미 요한 13:34에서는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이 사랑에는 수고와 땀 흘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포도나무 가지를 들어 올리고 잔가지를 손질하는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농부의수고와 땀 흘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랑의 수고없이 열매는 맺어지지 않습니다. 이번 우리 교회 이웃 사랑 축제는 단순히 전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연습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목숨까지 내어 주신 희생, 그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그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예견하시면서 이미 요한 12:24에서 주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분의 땅에 떨어지심, 그분의 희생과 죽음, 그로 말미암아 오늘 무수한 성도들이 열방 중에 이 주일도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목숨까지 내어 놓는 희생은 아니더라도, 내 이웃들과 함께 하여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그들로 복음을 듣게 하는 가장 적은 수고를 주저하시겠습니까? 사랑의 길에는 때로는 눈물이 때로는 고통이 때로는 깨어짐이 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숙하고 우리는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3. 이웃 사랑의 열매는 결국 ‘그리스도 증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은 실로 다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가장 위대한 이웃 사랑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웃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 중 그리스도보다 더 위대하고 더 좋은 선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무엇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예,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그러면 그 그리스도를 이웃들에게 증거하여 우리 이웃들로 하여금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하는 일-그보다 더 위대한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이 열매의 장은 앞으로 성령이 오시면 그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되리라고 그리고 나와 함께 있었던 너희들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이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되리라는 말씀으로 마무리 됩니다.
본문 26-27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실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음으로 증언하느니라” 누구를 증언합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해 보니 요한의 증언처럼 우리가 그를 경험해 보니 그는 정녕 사랑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경험해 보니 그는 정녕 기쁨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경험해 보니 그는 정녕 평화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경험해 보니 그는 정녕 생명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경험해 보니 그는 정녕 희망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이웃 사랑 축제의 마당을 준비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전도로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고 아직도 묻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혹시 <개구리 왕자>라는 동화를 기억하십니까? 옛날 한 임금님에게 귀여운 공주 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숲 근처 연못에서 금으로 된 공을 가지고 놀다가 실수로 공을 연못에 빠트렸습니다. 그때 개구리 한 마리가 연못에 등장하여 내가 그 공을 찾아 줄 터이니 나하고 함께 식사하고 키스를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공주는 그것을 약속합니다. 공주는 개구리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공을 찾았지만 약속을 무시하고 궁궐도 돌아옵니다. 개구리가 궁궐 문을 녹크하자 임금님도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공주에게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공주는 하는 수 없이 개구리와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개구리가 키스까지 요구하자 징그럽다고 개구리를 잡아 벽으로 던집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당황하고 미안한 생각이 든 공주가 축 늘어진 개구리에게 눈물을 흘리며 키스를 하는 순간 못 생긴 개구리가 한 순간 잘 생긴 왕자로 변신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도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축 늘어진 개구리처럼 삶의 의욕을 잃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이웃들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영혼에 키스를 해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들의 영혼에 키스를 해주는 순간-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딸로 하나님의 왕자와 공주로 태어나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월트 디즈니에서는 새로운 버전의 <개구리 왕자>를 만들고 있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공주가 개구리에게 키스를 하는 순간 개구리가 왕자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공주가 개구리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전도를 잘 못할 때 일어나는 전형적인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전도를 잘 못하면 우리가 이웃을 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세속성과 불신앙을 오히려 거꾸로 닮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슬람권에 선교사로 갔던 자매가 이슬람이 되어 이슬람 남편과 결혼한 케이스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기 전 우리는 분명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안에서만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다는 확신말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저는 전도를 생각할 때마다 지난 주간에 돌아가신 CCC 김준곤 목사님의 <백문 일답>이 떠 오릅니다. 우리가 무슨 질문을 하던 대답은 하나라는 확신말입니다. 한번 해 볼까요? 자, 제가 무슨 질문을 하던 대답은 하나-<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민족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우리 가정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우리 친구들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우리 역사의 소망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평생을 걸고 전해야 할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두 주간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을 우리는 누구에게로 데려와야 합니까? 우리가 두 주간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나누어야 할 최고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우리 인생의 유일한 해답이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가슴 벅찬 열매의 계절을 누리십시다.
너희는 나의 친구라
요 15:14-15 / 뽀뜨르 목사
서론
인사- 민족과 종족은 달라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친구라고 생각합니다.(엡4:5-6)
1)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열거할 때 다양한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주이시며, 선생이시며, 심판자이시며 아버지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친구 되십니다. 이러한 관계를 말할 때 가장 놀랍고 믿기 어려우나 분명한 진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친구 되신다는 것입니다.
2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죄가 전혀 없으신 순결하신 하나님과 한시적이고 죄가 있는 인간 사이를 친구라고 부르고 친구처럼 가깝게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주인과 종으로 표현하거나, 창조주와 피조물로,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훨씬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오늘 저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가까운 친구로서 우정의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본론
1. 계속적인 "대화"가 필요 합니다.
1) 하나님과 우정의 관계를 깊게 하는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과 계속적으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매일 매순간 긴밀한 대화를 가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참석하거나 어떤 일정한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긴밀하게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과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걱정들을 하나님과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2) 매일 일정한 시간을 할애해서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습관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은 여러분이 정한 일정한 생활 계획표에 따라서 그 작은 시간만을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일에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말들 가운데, 모든 문제들 가운데, 모든 생각까지도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매일 매순간 여러분과 계속해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여러분의 대화와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과 여러분의 생각 가운데 쉬기 않고 함께 대화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3) 그래서 살 전 5장 17절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슈퍼마켓에 가실 때도, 차를 운전하실 때도, 모든 일을 하실 때도 계속해서 하나님과 대화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반드시 하나님과 단 둘이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단둘이 보내는 시간은 중요합니다. 예수님 역시 우리에게 하나님과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은 하루 중 작은 시간밖에는 하나님과 같이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5)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으면서도 아주 하찮게 보이는 일들을 하면서도 그 속에 함께 하셔서 대화를 나누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모든 삶 속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함께 하시도록 초청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민감하게 느끼며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것은 바로 삶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우정의 관계를 쌓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계속적인 묵상이 필요 합니다.
1) 하나님과 우정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두 번째 방법은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묵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모른다면 하나님과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성경 공부를 할 수는 없어도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 할 수는 있습니다.
3) 몇 몇 사람들은 묵상을 실천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만 실천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묵상은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며 우리 모두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4)하나님의 친구였던 다윗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가치를 두고 온 종일 말씀을 묵상했던 사람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루 종일 묵상한다면 가까운 친구끼리 서로 숨김이 없이 비밀을 나누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밀을 여러분에게 열어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친구라고 생각했던 아브라함과 다윗, 바울 등 여러 사람들에게 당신의 비밀스런 계시는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5)여러분은 성경을 읽고나서 바로 성경책을 덮고 성경을 얼마큼 읽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고 교회 문턱을 나가면서 바로 들었던 말씀을 모두 머리 속에서 비워내셔도 안 될 것입니다. 읽고 들었던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마음에 되새기시고 그 안에 있는 진리를 반복해서 묵상하실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6) 하나님과 "계속적인 대화" 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는 일을 오늘부터 바로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하도록 인도하며, 묵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상담이 가능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대화와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
3.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 하나님과 우정의 관계를 깊게 하는 세 번째 방법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믿고 순종하고 행할 때 하나님과 아주 강하고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2) 일반적으로 우리는 가까운 우정에 관해서 말할 때 순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부모님이나 직장 상사나 웃어른들에 대해서 자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가까운 친구가 되려고 하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3)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들이지만 하나님과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믿음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로 인해서 감사함으로 순종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억지로 주님을 따르지 말고 주님을 가까이에서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4) 많은 사람들은 의무감과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저주에서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의 자세가 아닌 큰 기쁨과 감사함의 자세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9-11)
6)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원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과 같은 순종을 우리들에게도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의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정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려면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사랑함으로 다 순종하셨고 그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8)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위대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작은 일들 속에서 경외감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9) 순종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나 찬양, 헌금보다도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과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결 론
1)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친구보다도 더 하나님의 친구로서 하나님과 깊은 우정의 관계를 나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우정의 관계는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깊은 우정의 관계를 나누기 위해서는 사모함과 열심과 시간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더 깊은 우정을 사모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선택이 앞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하느냐는 당신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