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은 올곧게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리라
호세 14,2-10; 마르 12,28-34 / 사순 제3주간 금요일; 2023.3.17.; 이기우 신부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 모세5경의 핵심이었던 십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단 두 계명으로 줄이셨습니다. 이 대목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말씀이었는데(마르 12,28-31; 마태 22,34-40; 루카 10,25-28), 당신 제자들에게는 이를 다시 한 가지 계명으로 줄여서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가르침이야말로 올곧은 주님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 이전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예수님 이후 교회의 역사에서도, 의인들은 이 길을 따라 걸어갔고 죄인들은 이 길에서 비틀거렸습니다.
십계명의 첫 세 계명을 압축한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은 신명기 6,4-7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주 하느님은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희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사실 마음을 다 기울이거나, 정성을 다 비치거나, 힘을 다 쏟거나, 게다가 목숨을 다하거나(마르 12,30),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도 동어반복(同語反覆)적인 부사를 표현을 바꾸어 되풀이하는 취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도, 우리 한민족도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祭祀)를 최우선으로 정성껏 바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이어 참하느님 백성으로 모인 교회에서는 이를 전례(典禮)라고 하는데, 제사에서든 전례에서든 기본적인 요소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대해 감사드리는 기억 행위와, 이를 표현하는 예물 봉헌 행위(탈출 34,20), 그리고 이를 위해 일을 쉬는 파공(罷工)과 안식(安息) 행위(탈출 34,21), 또한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실행하기 위한 예언 활동과 식별 작업이 뒤따랐습니다. 이 예언과 식별의 골자에 대해서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하느님의 최고선 가치와 여기서 파생되는 인간 사회의 공동선 가치로 가르칩니다.
십계명의 나머지 일곱 계명을 압축한 이웃 사랑의 가르침은 레위기 19,18을 인용한 것으로서, 율법 학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구절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부각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 사랑이 인간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인들은 그 ‘이웃’의 범위를 동족으로 한정해 오고 있었고,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당되는 보편적 범위로 넓히셨습니다. 더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를 통해서는 도움이 필요한 모든 경우와 모든 사람으로 이웃 사랑이라는 행위의 질을 한껏 높이셨습니다. 유다인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발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이 지점에서 구분됩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또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을 떠받들어 온 한민족의 사상도 이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으나, 사상을 넘어 삶의 실천으로는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확한 기준은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전해진 것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의 가치와 이에서 파생되는 공동선 가치를 인간의 존엄성, 재화의 보편성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연대성과 보조성으로 가르칩니다. 이 모든 가치들이 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기 위한 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나 한민족의 역사에서나 그리고 교회의 역사에서도, 이 길이 올곧은 주님의 길인데 이 길을 따라 걸어간 의인들도 있었지만 이 길에서 비틀거리던 죄인들도 있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가 받들었던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올곧게 실천한 의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호세 14,6).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고 전례에 참여하며 청해야 할 축복은 이런 것이지요. 자기중심적인 기복신앙이 성화되어야 할 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최고선의 가치들과 공동선의 가치들이 한껏 꽃피우고 열매까지 맺게 될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샤마니즘의 범주에 들어가는 역술이나 무속 또한 마찬가지로서, 가치를 배제하고 자기 이익만을 하느님께 청하는 정신 자세로는 이기적이라는 혐의를 벗기가 어렵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모든 종교적 행위를 미신의 범주로 내몰고는 사회적인 지향에만 몰두하는 온갖 무신론적 시도들도 오래 가거나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시다.
오늘 미사의 화답송과 복음 환호송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 전에는 모르던 말씀을 나는 들었네. ‘내가 그 어깨에서 짐을 풀어 주고, 그 손에서 광주리를 내려 주었다. 곤경 속에서 부르짖자 나는 너를 구하였다.’ 천둥 치는 구름 속에서 너에게 대답하였으며, 므리바의 샘에서 너를 시험하였다. 들어라. 내 백성아, 내가 너희에게 타이른다. 이스라엘아, 부디 내 말을 들어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첫댓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말씀해 주셨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고선과 공동선 구현이라는 사랑의 실천 방식도 말입니다. 가톨릭의 '보편적'이라는 의미의 확장성도 떠올려 봅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 때가 되었음.. 카이로스라는 단어도 묵상해 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