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1)-1
공사 井上 馨(이노우에 카오루)의 실권(失權)
강화조약 이튿날 4월18일,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와 무쓰 무네미쓰(陸奧 宗光)는군함 八重山(야에야마)로 히로시마(廣島)에 가서, 행궁(行宮)의 천황에게 강화담판의 경과와 그 결과를 보고했다.
전권대신으로서의 책임을 전부 완수한 이때, 여러 해 병마에 시달려온 무쓰의 육체는 피로의 극에 달했다. 정신력만으로, 이날까지 버티어온 것이다. 그는 휴가를 얻어, 반슈 마이코(播州舞子/兵庫縣.須磨와 明石의 중간)에서 정양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몸이 묻힐 정도로 두꺼운 요에 몸을 눕혀도, 안도하는 생각에 쌓여 깊은 잠을 잘 수가 없다. 강화조약의 내용을 안 제 외국은, 이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까---- 이 한 가지가 언제나 무쓰의 작은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생각 한 그대로 무쓰는 주러 니시 토쿠지로(西 德二郞)공사와 주독 아오키 슈우조우(靑木 周藏)공사로부터, 그 나라들이 시모노세키조약에 대하여 무엇인가의 간섭을 시작할 듯 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쓰는 마이코(舞子)에서 이토총리 앞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쳤다.
「구주(歐洲) 각국으로부터 강력한 간섭이 올 것이 거의 확실하다. 바야흐로 우리 정부는 어떤 위험을 무릅써서라도 한발도 양보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총리의 생각하는 바를 알고자 함」
이 전보를 친 것은 4월23일이지만, 그날 중에 무쓰는 하야시 타다스(林 董)외무 차관으로부터 중대한 통지를 받았다. 그 내용은----
「도쿄(東京)에 주재하는 러∙독∙불의 3공사가 외무성에 와서 하야시(林)차관과 면담하고, 각각 본국정부의 훈령으로 『대륙의 일부인 요동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육지와 맞닿아 있는 조선의 독립을 위태롭게 하고, 청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동양평화를 위하여, 일본은 이것을 포기할 것을 권고 한다』고 했다」
하야시(林)차관은 이토와 무쓰에게 지휘를 요청해 왔다.
무쓰(陸奧)는 고려했다.
<형세는 일본에게 용이한 것이 아니다. 특히 러시아는 작년 이래, 강대한 해군력을 일본과 청국의 연해에 비치하고 있다. 게다가 이방면의 함대는 24시간 내에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도 있다. 따라서 이때, 일본정부의 태도에 따라서는, 국가의 안위가 걸린 중대한 국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경거(輕擧)는 경계해야 되지만, 그러나 일본이 3국의 간섭에 굴하면, 작년 이래 다대한 희생을 치루고 승리를 더둔 육∙해군이나, 참담한 경영고심을 거듭해온 정부요인들, 또 일청강화조약 조인을 환영하고 있는 국민은 얼마나 실망하고, 격분할 일인가.
3국의 간섭에 굴복하면, 러시아를 비롯하여 제 외국과의 충돌의 위험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국내의 격렬한 반발을 억제할 수 있을까>
당시의 일반국민은, 무쓰가 「전승의 열광은 사회에 충만하고, 허황된 공상은 거의 절정에 달하고 있다」고 적은 바와 같이, 전쟁에 진 청국에 이것저것 요구하자는 공상을 부풀려 희열에 넘치고 있었다.
내외정세를 노려보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무쓰가 일단 결론을 내고 그것을 이토에게 알리려 하고 있을 때, 이토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보가 왔다.
「3국 간섭 건에 있어, 본일(24일) 어전회의가 열리기 때문에, 의견을 알릴 것」
이에 대하여 무쓰는, 「나의 의견은 앞의 전보에서 말한바 대로, 일응 3국에 대하여 일보도 물러서지 말고 강한 태도를 보이고, 그들이 어떤 각오로 이건에 몰두하고 있는가를 잘 관찰한 후에, 다시 조정의 평의를 마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함. 그러나 대단히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부디 그때까지는 평의결정이 없기를 바람」 이라고 답전을 쳤다.
이 무쓰의 전보가 히로시마에 도착하기 전에, 어전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이토는 다음 3가지를 제의했다.
(1)개전을 사양하지 않을 각오로, 단연코 러∙독∙불의 권고를 거절할 것인가
(2)열국회의를 초청하고, 요동반도 문제를 그 회의에서 처리할 것인가.
(3)3국의 권고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청국에 요동반도를 시혜적으로 환부할 것 인가.
어전회의는, 이 3가지 대책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때 천황은 4월27일부터 “교토(京都)로 행차하실 예정”이어서, 몇 사람의 각료는 이미 선발하였으므로, 히로시마에 있었던 사람은 이토(伊藤)총리와 야마가타(山縣)육군대신, 사이고(西鄕)해군대신, 이 세 사람뿐이었다. 어전회의는 참석자의 신중한 토론 끝에, 먼저 「개전도 불사할 각오」의 첫 번째 대책이 지워졌다.
당시, 일본 육군의 정예 대부분이 요동반도에 주둔해 있고, 또 강력한 함대는 전부 팽호도에 파견되어 있어, 내국의 육∙해 군비는 없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작년 이래 청국과의 전투에서, 함대는 전보다 인원, 군비 다 같이 피로와 결핍을 알리고 있었다. 지금 3국 연합의 해군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 한나라의 함대와 항전할 힘도 불안하다. 새로운 적국을 상대로 싸움을 건다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어서 3번째 대책도 「무조건으로 3국의 권고에 따른다는 것은 너무나 기개가 없다고, 여기에서도 국민감정을 중사하여, 채택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어전회의는. 두 번째의 「열국회의를 초청하는 안」으로, 거의 결정했다.
이것을 무쓰에게 알리고 그의 의견을 듣고자, 그날 밤에 히로시마를 떠난 이토가 마이코(舞子)에 도착한 것은 25일 이른 새벽이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대장대신, 노무라 야스시(野村 靖) 내무대신, 두 사람도 마이코에 와 있었다. 병상에서 상반신을 일으킨 무쓰를 둘러싸고, 긴급회의가 시작 되었다. 무쓰는 어제 히로시마로 쳤던 전보의 주지를 재차 설명했으나, 이토는, “이때에 3대강국의 권고를 거절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하지 않을까. 작년부터 러시아의 거동을 생각하면, 그 속마음을 살필 것도 없이, 일전을 사양하지 않을 각오가 명백하다. 그것을 다시 도발하여, 상대구실을 주는 것은 심히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마쓰카타, 노무라 양 대신도 이토의 설에 찬성했다. 무쓰는 “더욱더 외교상 일전(一轉)의 대책을 강구해야 된다”는 자기의 설을 철회했다.
그러나 무쓰는, 어전회의에서 거의 결정한 「열국회의설」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러∙독∙불 이외의 2,3국을 더 추가하여 회의를 열기 까지는 상당한 날짜가 걸리는데, 일∙청 강화조약 비준교환의 기일은 5월8일, 남은 날짜가 십 여일 밖에 없다. 청국은 그 기회를 틈타서 비준을 포기하고, 결국은 시모노세키조약을 공문화(空文化)시킬 우려가 있다.
또 열국회의에 참가한 제국(諸國)이 각각 자국의 이해를 주장할 것은 확실하고. 문제는 요동반도에만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스스로 찾아서 구주대국의 새로운 간섭을 부르는 결과가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토를 비롯하여 2대신도, 이 무쓰의 설을 긍정했다. 그렇다면 3국간섭이라는 긴급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3국을 상대로 싸울 힘은 없다는 전제가 있는 이상, 3국 권고의 전부, 또는 일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3국에는 양보하지만, 청국에는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는다는 결의로,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목하의 급선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날 밤 노무라 내부대신은 마이코에서 히로시마로 급행하여, 이 결의를 천황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았다.
강화조약 비준교환까지는 아직 십여 일이 있다. 무쓰는 일본의 입장을 호전시키기 위해 작은 가능성도 노치지 않겠다고, 병든 몸을 질타하면서 노력을 계속했다. 그는 각국 주재 일본 공사에게 각국의 동향을 타진하게 했다. 그것은 먼저 3국 간섭의 주도국인 러시아에서 시작되었다. 주러 니시 공사는 무쓰의 훈령에 근거하여, 외무대신을 면담하고, 장시간에 걸쳐 힘껏 말했다. “일청강화조약은 이미 천황의 비준도 끝냈으므로, 요동반도를 포기하는 것은 지난하다. 러시아 정부가 일∙러간의 친밀한 관계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리라고 생각한다면, 이번 권고를 재고해 주기 바란다.
또 일본은 요동반도를 영구점령 한다 해도, 러시아의 이익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것은 물론,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는 러시아정부가 충분히 만족하도록 할 용의가 있다“
외무대신은 이것을 황제에게 전했으나, 그 회답은 예측대로 「거부」였다. 동방을 향한 진출에 의욕적인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 중으로, 그 완성까지는 극동의 현상유지를 강하게 바라고 있었다.
영,미 두 나라는 일본에 호의적이면서 「국외중립(局外中立) 범위 내에서의 협력」 이상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무쓰에게 새삼 알려왔다. 영국의 외무대신은 주영 가토 다카아키(加藤 高明)공사에게. “러시아는 굳은 결의로 일청문제에 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은 충분히 준비하도록” 이라고 주의를 환기했다.
결국, 무쓰가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强援(강한지원)”은 아무데서도 얻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