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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5 열반을 상기 (4) (법문: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아비담맛타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우빠사마눗사띠(열반 상기) (4)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깜맛타나 장에서 아눗사띠 10가지 중에서 우빠사마눗사띠(upasamānussati) 강의하고 있습니다.
8. ①Buddhānussati ②dhammānussati ③saṃghānussati ④sīlānussati ⑤cāgānussati ⑥devatānussati ⑦upasamānussati ⑧maraṇānussati ⑨kāyagatāsati ⑩ānāpānassati ceti imā dasa anussatiyo nāma. |
붓다께서는 중생들이 수행을 통해서 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붓다가 되신 거죠. 중생들은 전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든지 벗어나야 된다고 가르쳐주려고. 그래서 <아비담맛타상가하>의 제일 마지막 장인 제9장이 수행에 대한 것입니다. 중생들은 그냥 살아도 행복한데 말이죠.
수행의 장에서 아눗사띠 10가지 강의하고 있습니다. 상기하면 좋은 것. 10가지를 상기한다고 해서 열반을 볼 수 있는 게 아니죠. 열반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려고, 10가지 중에 뭔가 하나를 상기하는 것, 이거는 사마타죠. 아눗사띠는 사마타입니다. 마음을 번뇌로 시끄럽지 않게, 조용하게 만드는 아눗사띠 10가지입니다.
그중에서 우빠사마눗사띠 하고 있습니다. 우빠사마눗사띠는 '열반에 대해서 거듭해서 상기함'입니다. 그런데 열반이라는 걸 모르지 않습니까? 모르니까 상기할 수가 없겠죠. 그래서 열반의 좋은 점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열반의 공덕
열반의 공덕에 대한 게송이 있는데 그 뜻을 설명하겠습니다. 게송을 일단 한번 읽겠습니다. 이 교재(<아비담맛타상가하>)에 없고 복주서(마하간다용 사야도의 <바사띠까>)에 있습니다(게송의 일부는 께왓따 경(D11), 범천의 초대 경(M49)에도 나온다).
Viññāṇaṁ anidassanaṁ, anantaṁ sabbato pabhaṁ; 윈냐낭 아니닷사낭 아난땅 삽바또 빠방 특별한 지혜로만 볼 수 있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원하고, 모든 사마타 주제들의 종착지인 열반이 있다. Ettha āpo ca pathavī tejo vāyo na gādhati. 엣타 아뽀 짜 빠타위 떼조 와요 나 가다띠 이 열반으로 인하여 지수화풍 4대가 생겨나지 않는다. viññāṇassa nirodhena, etthetaṃ uparujjhatī’ti. 윈냐낫사 니로데나 엣테땅 우빠룻자띠. 생을 만드는 업이 아라한도의 지혜로 소멸되어 이 물질과 정신이 소진한다. |
'윈냐나(viññāṇa. 특별한 지혜로 알 수 있는)'는 보통 ‘알다. 지혜’라는 뜻이죠. 여기서 윈냐나는 ‘범부들이 알기 어려운, 범부들의 지혜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도의 지혜, 과의 지혜로만 알 수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넘치는 지혜, 과한 지혜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나친 지혜, 고귀한 지혜로만 알 수 있는 열반입니다.
여기서는 윈냐나가 '특별한 지혜, 성인의 지혜로만 볼 수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존재하는 빠라맛타(paramattha)입니다. 빠라맛타의 뜻이 아비담마 처음 시작할 때 '고귀한 핵심'이라고 했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변치 않는 것이고 불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믿고 의지해야 된다면, 변치 않고 고귀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믿고 의지해야 되겠죠. 변하고 미천하고 그리고 항상하지 않은 것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고 의지해서는 안 되겠죠? 그래서 믿고 의지할 만한 실제로 존재하고 변하지 않고 항상한 것, 네 가지 빠라맛타입니다.
그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범부의 눈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 안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내 마음도 내가 스스로 볼 수 없는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내가 모르는데, 나의 안에 있지도 않은 열반을 범부의 지혜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오온에 속하지도 않는, 마음도 아니고 물질도 아닌 열반을 범부의 눈으로 범부의 지혜로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범부의 지혜로는 알 수 없습니다. 도의 지혜, 과의 지혜, 성인이 돼야지만 볼 수 있는 열반입니다. 여기서 윈냐나는 '성인(아리야)들의 지혜'입니다. 제6장 물질의 장 끝에 열반이 나왔죠. 열반은 물질도 아닌데 물질의 장 끝에 열반에 대해서 나와 있었습니다. “제9장 수행주제”에 열반에 대해서 상세하게 나옵니다.
‘아니닷사낭(anidassanaṁ. 보이지 않는)'은 열반의 특징입니다. 열반이 빠라맛타로서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열반은 실제로 존재하고 그리고 고귀하고 변치 않습니다. 그렇게 분명한데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물질과 정신이 소멸하고 완전히 고요해서 아주 조용합니다. 조용하다는 게 좀 이상하지만 하여튼 없으니까 고요한 거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 이것이 열반입니다. 어떤 행복, 어떤 고요함, 어떤 고귀함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 수가 없습니다. 무엇과 같다고 예를 들 수가 없는 거죠. 예를 드는 게 불가능합니다. 열반을 어디에 비추어서 설명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기껏해야 관념이고 좀 더 똑똑하면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물질과 정신에 대해서 좀 알게 되고, 이제 그거 넘어서 한참 더 가서 열반을 보는데, 우리가 아는 범주 안에서는 열반을 설명할 수가 없죠. 우리가 아는 것을 갖고 와서 비유해서 얘기해야 하는데 열반은 아는 영역 밖인 거죠. 열반에 대해서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열반은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도 없고 어떤 비유도 할 수 없습니다. 무엇과 비슷하다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은 ‘아난땅(anantaṁ. 영원한)’입니다. 마음은 처음 시작해서 생기고 머무르고 사라짐이 있죠. 가장 빠르다는 마음도 생기고 머무르고 사라지는 순간이 있죠. 중간에 머무르는 시간도 있습니다. 근데 열반은 이런 생기고 머무르고 사라지는 세 부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반이 소멸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정신은 생기고 머무르고 소멸합니다. 죽음이 있는 거죠. 근데 열반은 물질과 정신이 아니니까, 그리고 관념도 아니므로 생기고 머무르고 소멸하는 게 없는 거죠. 이렇게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열반은 항상 존재하는 것, 항상 존재해야 되는 것, 항상 존재하지만 범부는 볼 수 없는 것이죠. 오기가 생겨서 보고 싶어 할 것 같은데 범부는 이렇게 약을 올려도 꿈쩍도 안 합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볼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데 볼 수 없습니다. 어리석어서. 그리고 이것은 생기고 머무르고 소멸하지 않고 항상 존재합니다.
'삽바또 빠방(sabbato pabhaṁ.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모든 사마타 주제들]를 지닌)', 대양(大洋. 열반)으로 들어가는 '모든 해변가 나루터들(sabbato pabhaṁ)', 큰 바다로 들어가기 위해서 '해변(pabha)'을 통해서 깊은 바다로 들어갑니다. 깊은 바다로 들어가기 위한 해변이 있는 것처럼, 40가지 사마타 수행주제가 있죠. 40가지 사마타 수행주제가 열반이라는 바다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원인)입니다. 사마타를 하는 이유는 열반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결국 열반을 보기 위해서 사마디를 키우는 거죠.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사마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마타는 열반을 보기 위해서 하는 위빳사나를 하기 위한 전 단계입니다. 또 다르게 말하자면 그냥 우리 눈으로는 번뇌의 더러움에 가려 열반을 볼 수 없다. 빛(pabhā)이 들어와야 볼 수 있다. 어두움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열반도 번뇌에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데, 번뇌가 벗겨졌을 때, 지혜가 생겼을 때 열반을 볼 수 있다. 어둠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지혜라는 밝음이 들어오면 열반이 보인다. 그리고 열반에는 번뇌라는 더러움이 조금도 없다. 열반을 가리는 약간의 먼지만큼의 번뇌조차 없다. 선정에 들었을 때도 [잠재된] 번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선정도 ‘나’라는 유아견으로 보는데, 열반을 볼 때는 ‘나’라는 먼지가 완전히 없는 거죠. 모든 번뇌의 근원인 유아견이 완전히 없어졌을 때 열반을 봅니다.
'엣타 아뽀 짜 빠타위 떼조 와요 나 가다띠(Ettha āpo ca pathavī tejo vāyo na gādhati. 여기서 물, 땅, 불, 바람의 요소가 생겨나지 않는다.)'
현재에 존재하는 물질들이 생기도록 마음이 영향을 줍니다. 정신이 지속되도록 물질도 영향을 줍니다. 이 책을 쓰신 사야도께서 요즘 세상의 스마트폰을 보면 깜짝 놀라실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전화기가 있었겠죠. 하여튼 물질이 생겨나도록 정신이 영향을 끼치죠. 스마트폰을 만들기 위해서 스마트폰을 원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게 만들어진 거죠. 그리고 또 마음이 지속되도록 물질도 영향을 줍니다. 마음이 지속되도록 몸으로 음식을 먹어야 되고, 자야 되죠. 물질과 정신이 서로 서로 영향을 끼치죠. 서로 서로 주고받습니다. 정신이 유지되기 위해서 계속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으면 욕계 중생이 살 수가 없죠.
물질과 정신 둘 다 변화무상한 것이 서로서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생겼다가 사라지고 그리고 사라지고 죽고, 그러면 다시 또 생기고, 물질이 생기기 위해서 정신이 영향을 끼칩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날 때, 이전생에서 지었던 선업, 욕계 선업의 결과로 인간으로 태어났지 않습니까? 마하 위빠까 찟따(mahā-vipāka-citta)가 모태에 입태되었으니, 정신이 인간의 몸을 갖도록 만든 거죠. 이게 마음이 물질에 영향을 끼친 거죠. 태어나서도 또 서로서로 계속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서로를 후원합니다.
그러니까 물질도 무상하고 정신도 무상하고, 둘 다 무상한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계속 서로를 유지합니다. 서로 지속되도록 도움을 주는 거죠. 우리가 죽을 때가 되면 몸에 힘이 빠져서, 이 몸이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되면, 낡은 몸을 버리고 다른 새로운 생에 태어나고 싶어 하죠. 그러면 이 노쇠한 몸이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마음에 영향을 끼치겠죠. 그래서 또 다른 데, 또 다른 고통을 찾아가 안착합니다. 서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립적이지 않죠. 그래서 계속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이렇게 지속됩니다.
그런데 물질도 정신도 아닌 열반은 물질이 생기도록 하지도 않고 정신이 생겨나도록 하지도 않습니다. 만들지 않는다는 거죠. 열반 자체는 정신이 생겨나도록 만들지도 않고, 새로운 몸이 생겨나서 만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열반을 흙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라는 기본 4대를 후원하지 않는다. 열반을 위해서 4대가 후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열반이 마음에도 물질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은 물질 4대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윈냐낫사 니로데나 엣테땅 우빠룻자띠(viññāṇassa nirodhena etthetaṃ uparujjhatī. 업을 짓는 마음이 소멸되어 이 물질과 정신이 소진한다.)'
아라한도의 순간에 어리석음과 집착을 제거함과 동시에, 업을 만들 힘[= 업을 짓는 마음]이 소멸합니다(viññāṇassa nirodhena). 그래서 새로운 생을 계획할 수도 없고 더 이상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etthetaṃ uparujjhati). 아라한의 도가 완전히 어리석음과 집착을 잘라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생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과 집착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들어 낼 수가 없죠. 무지와 집착의 도움을 받아야 새로운 업을 만들 수 있는데 도움을 줄 친구가 완전히 없어져 버린 거죠.
윤회의 바퀴를 계속해서 굴려왔는데 아라한들은 더 이상 굴리지 않고 반열반에 들게 됩니다.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라한도 반열반에 들기 전까지 물질과 정신과 연관된 여러 가지 고통들을 받습니다. 물질과 정신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고통들을 느낍니다. 고따마 붓다께서도 반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혈변을 보시고 몸에 심한 고통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이 기진한 상태에서도 법문을 하셨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viññāṇassa nirodhena) 다 소멸합니다(etthetaṃ uparujjhati).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담마삐야
* 2023-06-15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386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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