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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오류
장철호
회색 도시에서 살고 있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유행처럼 생겨났다는 혁신으로 포장한 도시! 보랏빛 날개를 달고 와서는 동네의 분위기를 한껏 바꿔 버렸다. 새소리, 바람 소리로 가득했던 뒷산 언저리는 공사장의 연기와 소음들로 가득해졌고, 아파트와 관공서들이 들어와 터를 잡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서울이나 수도권에 있다가 거의 반강제적으로 내려와 있는 터라 주말이면 다시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되돌아갔다. 마치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곳 직원들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이전 당했다.” 또는 “끌려 내려왔다.” 등의 수동태가 지배적으로 사용된다. 이 피동적이고 바라지 않던 삶을 하릴없이 계속하다 보면 차츰차츰 자신을 볼모로 삼은 철학자가 되어간다.
무엇보다 나의 생활루틴에도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주해 온 수많은 사람과 뒤섞여 살아가면서 발걸음이 왠지 모르게 빨라지고 심적 여유도 조금씩 잃어갔다. 원치 않게 먼 타지로 내려올 수밖에 없는 심정을 어느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무표정한 표정,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이어폰을 꽂고 달리는 모습들. 인사를 나누는 건 둘째치고 눈 한번 마주칠 여유가 없으니 다들 쌍둥이인 줄 착각이 들 정도였다. 뭘 그렇게까지야? 조금은 민감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
“도시에서 사는 생활이 다 그렇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면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이전의 동네 분위기가 떠오른다. 본래 이 동네는 고구마 한 소쿠리를 들고 가면 되돌아오는 소쿠리에는 옥수수가 빈자리를 채워서 돌아왔다. 고급스러운 왕래는 아닐지라도 소박한 인간미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동네 주민 중엔 자신의 땅과 집을 팔고 외지로 나가버린 영향 탓도 있겠지만, 예전의 사람 냄새났던 그 동네가 새삼 그리워지곤 하는 이유다.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서고 단독주택들이 지어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똑같은 표정과 발걸음으로 바삐 움직인다. 꼭 자신이 다니는 길에 검은 줄을 긋고 자석에 끌리듯 이동한다. 지금의 동네 느낌을 표현해보라고 한다면 회색빛에 검은 줄이 정답일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고정관념처럼 메말라가던 단단한 껍데기의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때쯤 퇴근길의 한 모퉁이에서 우연을 가장한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아옹~”귀여운 소리에 귀가 솔깃해졌다.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엎드려 있는 새끼고양이였다. 고양이 쪽으로 다가가려고 한 발짝 움직이니 그대로 멀리 도망가 버렸다. 예전부터 근처에 살던 것 같았는데 도둑고양이나 들고양인 것처럼 보였다. 원래 동물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눈여겨보지 않던 사소한 것들에게 관심이 갔다.
다음날 똑같은 시각 근처 울타리 옆에서 녀석을 다시 만났다. 맘에 드는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묘한 기분. 요리조리 눈치만 살피고 있길래 마침 가지고 있던 햄버거를 조금 떼서 던져 주었다. 그랬더니 살금살금 다가와서 혀를 날름거렸다. 겁을 먹어서인지 꼬리는 잔뜩 내리고 경계는 절대로 늦추지 않았다. 순간 오래 함께한 친구와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그 녀석 입이 고급지더라고요.”
그때 등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되돌아보니 이름은 모르지만 낯설지 않은, 아마도 집 앞에서 수백 번은 더 봤을 법한 선한 얼굴의 남성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아! 그런가요? 고양이를 안 지 오래되었나 보네요?”
그동안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어색한 대답을 했다.
“고양이가 숙소 앞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더라고요.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며 과자 하나를 던져 줬죠? 아니 글쎄, 킁킁! 냄새만 맞고는 안 먹더라고요.”
말을 전혀 할 것 같지 않았던 그의 입술은 한풀이라도 하듯 춤을 췄다.
“다음날엔 치킨 한 조각을 던져 주었죠. 예상대로 그건 잘 먹데요. 나름 재미도 있고 해서 고양이와 거의 매일 만났죠. 녀석도 나를 기다리는 것 같고….”
그는 역시나 공기업 기관의 직원이었고, 가족들을 서울에 두고 혼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식구들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외로운 시간이 많고,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생활에 무료해지고 있다고도 했다. 괜스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쓸쓸함을 달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까? 고양이에서 파생된 말의 가지들은 거미줄처럼 엉켜서 우리를 둘러쌌다. 입에서 입으로, 눈에서 눈으로, 비슷한 공감대를 만난 사람들처럼 시시덕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네에서 다른 누군가와 선 자리에서 대화를 해본 지가 언제였던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나의 또 다른 뇌는 오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참, 고집스럽게도. 왜? 사람들을 나의 고정된 틀 속에 가두려고 했을까? 그 사람들도 자기만의 생각과 리듬을 가지고 잘 살아갈 텐데….’
편견의 오류에서 오는 민망함은 나의 시계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했다. 혼탁해져 갔던 마음이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내일은 제가 저 녀석 간식 당번이네요?”
그의 농담 같은 진담에 우리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다음은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흘러갔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자연스러웠다. 그와는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고, 주인 없는 애완동물? 아니 둘만의 반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공동 취미 또한 가질 수 있었다.
일상이 지쳐갈 때쯤 뜬금없이 나타났던 작은 고양이 한 마리, 아니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준 그 남자의 덤덤했던 말 한마디!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던 마음에 색깔을 입혀 주었다. 그렇다. 일상의 소소하고 즐거운 만남은 언제든 뜬금없이 찾아올 수 있다.
여행
배혜정
방학식을 하고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열한 살 아이의 입이 동물원에서 본 오리만큼 튀어나와 있다.
”엄마, 우리는 여행 안 가? 오늘 방학 계획 그리기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다 여행 간대“
아이가 내미는 방학 계획표에는 ‘여행 가기’를 붉은색으로 크게 적은 것으로도 모자라 일곱 가지 무지개색으로 별표가 되어있다.
겨울 방학 시즌이 되자 주부 수영 모임에서도 여행 이야기가 많다. 동생들은 내게도 훈수를 걸어왔다.
“여행 계획- 하면 순미지. 걔가 많이 다녀봐서 다 꿰고 있어. 쇼핑, 관광, 레저, 휴양 뭐 목적에 따라 비행기표부터 호텔까지 쫘악 짜줄걸.”
”응. 언니, 어디 가고 싶은데? 가고 싶은 나라 있어? 아님. 국내? 산, 강, 바다, 호팩?“
그래, 어디든 가야겠지.
엄마들이 많이 들어가는 인터넷 카페부터 뒤졌다. 아이들 나이대별로 추천하는 여행지와 숙소, 체험들이 잘 정리되어있다. 그런데 스크롤을 내릴수록 아까 본 데랑 지금 보고 있는 데가 별 차이가 없다. 물놀이, 목공예 만들기, 물고기 잡기 등 체험도 비슷하고 후기들도 비슷하다. 어디든 가서 열심히 일정을 소화하고 오면 숙제를 하는 셈이다.
”윤아, 제주도 가서 동백 보고, 귤도 따고, 숲길도 걷고 그럴까?“
”그건 저번에 다 해봤잖아.“
몇 번의 제주도 여행으로 인해 매뉴얼에 나오는 일정은 더 이상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는다.
오래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돌아 여행을 다녀온 엄마에게 앙코르 사원을 실제로 보니 어땠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다 돌이고 땅이고… 한국 돌이나 똑같더라. 몸만 힘들어. 이제 해외여행 안 갈란다.“
나도 그렇다. 언제부터인지 ‘여행’이라는 말에는 약간의 피곤이 묻어나고 건조하게 느껴진다.
몇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내가 십 대였을 때는 여행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책이나 텔레비전에서 알려주는 여행은 삶의 노른자를 맛볼 기회의 입장권 같은 것이었다.
건강한 몸과 대책 모르는 마음을 가진 나이였기에 쉽게 불이 붙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는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에 미혹되어 멀리 전라북도 남원까지 찾아갔다.
광한루에 성춘향과 이몽룡이 만나 놀았는데, 달이 물에 비치어 두 개가 된다는 표현이 얼마나 매혹적이던지… 엄마에게는 독서실 간다고 해두고 주말 새벽부터 집을 나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오후 늦게나 겨우 도착한 남원 광한루에는 억수 같은 비가 내렸고 그렇게 보고 싶던 두 개의 달은커녕 내게는 하나의 달도 허락되지 않았다. 누각에 다닥다닥 붙어 섰던 다른 이들의 땀 냄새를 맡으며 먹먹하게 연못을 쳐다보았다. 쏟아지는 비속에 하늘도 물도 공기도 푸르둥둥하게 하나가 된 그때 그곳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로 한동안 여행병이 잠잠해지나 싶더니 대학생이던 언니가 선물로 받아온 김용택 시인의 시집이 다시 불씨가 되었다. 시인의 긴 노랫말이 귓가에 쟁쟁 울려대는 통에 그곳이 궁금해지고 말았다. 결국 시인의 산문집까지 사 들고 간간이 등장하는 지명을 따라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또다시 혼자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물어물어 어느새 시인이 산다는 골짜기를 오르고 있었다. 어디쯤인지도 모른 채 어두운 산길을 걸어 시인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정이 다 되었다.
시인의 어머니는 한밤중에 난데없이 찾아온 어린 학생이 성가실 법도 한데, 아들 손님이라 어여 들어오라고 손인사부터 했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시인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벽을 가득 채운 책꽂이에는 지난 시간만큼의 ‘바램’들이 쌓여 구릿빛이 된 종이 뭉치들이 꽂혀있었다.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뱅그르르 돌아보았다. 그땐 어려서 그게 실례가 되는 줄 몰랐으니 좋은 경험을 하였다.
잠자리를 펴고, 시인의 어머니와 마주 보고 누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가 다 뭐냐고, 그게 밥 먹여주냐고… 그런데 많이들 찾아오는 걸 보니 좋은 것이긴 한가 보다고… 할머니는 마르고 갈라진 따듯한 손으로 내 손을 쓰다듬어주었다.
이날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여행처럼 말랑말랑하게 온기를 머금고 아직도 콩닥콩닥 살아있다.
아이에게 엄마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는 좋아하는 동화책을 꺼내 들고 작가의 이름을 살피느라 잠시 여행 타령을 멈추었다.
남다른 여행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대로 고등학교 시절 내 친구들이 그랬다. 그들은 없는 길을 걸어서 나아갈 방향을 만들고자 했다. 역사상 전례 없는 장편 대하소설을 쓰겠다고 고등학교를 자퇴한 친구는 돌연 조선 시대 전통 무예 18기를 수련하겠다고 배낭여행을 떠났다. 경찰서에서 쪽잠을 빌려 자면서 전국에 사범님들을 만나고 돌아온 친구는 무예 정신이 아닌 일상을 배웠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더 멀고 긴 여행을 떠났다. 어쩌다 마음에 불씨가 붙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친구는 스물두 살에 홀연 누비 장인을 찾아 산속에서 5년을 살았다.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 그녀는 누비보다 사람을 배웠다고 했다. 아직도 그녀의 바느질은 재봉틀보다 낫다.
여행을 떠나 길을 만들었던 내 십 대의 친구들은 지금도 길 위에서, 때로는 숲 덤불에서 걷고 뛰고 헤매며 일상을 살고 있다. 또 가끔은 발을 굴려 길을 만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생소한 공간으로 떠나 낯선 감각을 만난 여행이나, 마음에 품을 길을 내러 떠났던 여행은 여전히 설레는 추억이다.
이동 경로와 식당, 숙소, 체험 등 하루를 꽉 채워 잘 짜둔 매뉴얼대로 가는 여행은 일종의 ‘도장 깨기’ 같은 거다. 여기엔 설렘 대신 성취가 있다. 아쉬운 대로 계획들 사이에 조금의 여지를 비워두면 어떨까. 그 틈 사이로 우연과 놓친 감각들이 비집고 들어와 다시 설렘을 살려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혼자만의 감각에 취할 수 없는 가족 여행이라면 서로가 도타워지는 것에 마음을 뺏겨도 좋을 것이다.
다시 여행으로 설레는 날이 올까. 이제 마음에 땔나무도 없고 쉽게 번지는 불쏘시개도 없다. 그래도 깜빡깜빡 불씨가 살아 은근하게 데워지는 날을 만들어 또다시 혼자서 고속버스에 몸을 실어보고 싶다.
태풍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
송다은
살면서 지치고 힘들 때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2020년 여름, 어느 때늦은 장마철이었다. 폭풍이 다가와 창문은 기침하듯 덜컹거렸다. 동생은 잠이 들었고 어머니도 자리에 드셨으며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계셨다. 나는 가내가 모두 평안한 것에 감사했다. 실내가 평온한 것과는 반대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창밖은 살풍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수선거리는 마음이 되어 몸을 차분히 정돈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쉬어야 할 밤에 그러지 못하였다. 이내 나는 밤늦게 글을 쓰기 위해 노트를 펼쳤다. 영감이 떠오르거나 외롭거나 아플 때는 늘 그랬다. 자극적인 환경에 나를 내던지거나 자기 파괴적인 우울을 반복하는 것보단 명상이나 글쓰기가 더 안전하고 나았다.
악몽 같은 슬럼프와 상처를 견뎌낸 후 나는 내 생활에 감사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살면서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몸도 다치고 어리석은 선택 때문에 밤새 후회로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내 곁에는 항상 가족이 있어 주었다. 스트레스가 쌓여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상실감과 패배감을 숱하게 겪었지만, 그런데도 나는 살아가는 일에 대해 고단이 있더라도 결국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갖게 되었다.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은 곱씹어 보면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일들이지만 그 모든 것들을 일종의 통과의례, 성장통으로 여기기로 했다. 나는 과거를 되살려 허우적대는 대신 외국어 공부, 독서 등에 눈을 돌렸다.
매년 한국에 찾아오는 태풍이라는 연례행사를 치르게 된 어느 여름밤 나는 그렇게 힘겹게 극복하며 지나온 시간을 떠올리며 다시금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을 마셔가며 정신을 세우고 글을 썼으며 그날의 바람이 내 손님이었다. 가끔 물을 홀짝이는 소리, 찢어지는 비바람 소리, 그에 따라 집이 반응하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사람을 믿고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기엔 내가 너무 세파에 시달렸고, 비바람에 온몸을 맡기며 바깥을 뛰어다니기엔 내가 너무 허약했으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세상과 격리되기엔 내가 너무 외로웠다. 그래서 글을 썼다. 어린 시절의 가정폭력, 마약 같은 문제로 고통을 겪다 수렁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수기를 보면 하나같이 ‘글쓰기’가 자신을 치유했다고 말한다. 나도 그랬다. 그들처럼 나도 ‘글쓰기’로 인해 모든 사건과 사고들을 견딜 수 있었다. 나는 나보다 먼저 글쓰기로 삶을 극복하고 치유한 선배들의 책을 읽고 자란 독자였다.
시간은 느리게 떨어지는 담즙이었다. 나는 자정이 되기 전 작문을 마치고 금세 빈 물잔을 치운 후 미적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 산 책도 없고 두통도 찾아오지 않은 날이어서 그 밤은 내내 시간이 넉넉했다. 나는 창문의 면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내 손을 쥐었다 폈다. 1년에 단 몇 차례 찾아오더라도 항상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 태풍 같은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비바람에 시달린 뒤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대지를 닮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불을 덮고 누웠으나 속눈썹이 이불을 스치며 사각대는 감각까지 느껴지는 예민함이 내 숙면을 방해했다. 불면증이었다. 잠들기 전의 따뜻한 물도 내겐 소용이 없었다. 일부러 몸을 지치게도 해보았지만 지친 몸과 별개로 또렷한 정신으로 보낸 밤들은 그것조차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일러주었다. 더 이상 몸의 통증을 잊기 위해 맨살을 할퀴거나 이를 악무는 행위를 반복할 필요가 없을 만큼은 건강해진 성인이 되었는데도, 잠들지 못하면 이따금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이 제대로 오긴 글렀으니 나는 이왕 깨어 있는 김에 몸을 바로 한 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내가 사랑하는, 내가 아플 때도 친절을 베풀어준 모든 사람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런데도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수시로 시계를 살펴봤지만 그런다고 빨리 갈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이청조 작가의 <취화음>을 되뇌기로 했다. 크리스천에겐 주기도문이, 불교 신자에겐 불경이 그러하듯 시인을 사모하는 이에겐 시가 바로 위안이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구절은 마지막 구였다. 주렴 걷고 서풍 맞는데 사람은 국화보다 더 야위어 있다.
나는 한 가지 감정에 사무칠 때가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아져 그럴 때마다 정제된 작품독서가 명약 처방이 되곤 했다. 다행히도 예술 작품은 내 동아줄이었다. 그림도 좋고 음악도 좋았지만, 특히 문학이 많은 도움이 되어 주었다. 문학은 한 번 외워두면 다시 끄집어내기가 서랍 여닫는 행위보다 쉬웠다. 내 정신이 각성제라도 맞은 듯 요동칠 때면 나는 좋은 글을 불렀다. 그러면 글은 내 정신을 뚫고 들어와 영혼에 안착했다. 나는 적당히 몽롱해질 때까지 시구를 외웠다. 그러다 보니 백색 소음이 가라앉아 문득 고개를 들었다.
비가 가라앉고 있었다. 동이 틀 무렵이었다. 나는 일찍 잠이 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몸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올해의 마지막 폭우가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늘은 낭비할 틈이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옷을 바꿔 입었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블라인드를 완전히 걷었다. 나는 눈을 뜨고 사라지는 계절의 마지막을 관찰했다. 다음 장마는 1년 뒤에나 올 터였다. 찰나의 아름다움이 손짓하고 있었다.
비가 햇살에 자리를 내주었다. 내 안의 먹구름 역시 물러감을 느꼈다. 물론 잠시뿐이리라. 해가 언제나 하늘을 지배할 순 없듯이 내 먹구름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새벽의 풍경이 눈앞에 있었으니. 회청색, 남색, 감청색, 검은색, 흰색으로 뒤덮인 하늘에 한 줌의 주홍빛이 산산이 흩어졌다. 매일 반복되는 새벽에 매번 볼 수는 없는 장마의 끝자락이 걸려 있어서 다른 날보다 더 아련했다.
짧은 시간이 지나가매 태양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완연한 아침이었다. 경탄과 아쉬움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나는 아름다움을 기억해서 몇 달은 버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전에 내가 수일을 고열로 앓다 일어났을 때도 새벽이었다. 자고 일어났는데 더 이상 아프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환희, 마치 축하해 주듯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었던 하늘, 그 상쾌함은 직접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 나는 몇 년 내내 그날의 기억을 소중히 보관하여 문득 생각날 때면 꺼내서 음미했다. 내 컬렉션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는 것은 분명 경사였다.
그리하여 나는 기념할 만한 날을 기억하기 위하여 새로 글을 썼다. 내 눈이 곧 카메라고 내 손이 나의 충실한 기록자였다.
허약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어떤 대단한 행운을 맞닥뜨리지 않고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먼 곳에서 기적을 찾지 않고 주위에서 각성의 계기와 마음에서 우러나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걸 내가 언제까지나 기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