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설계자로 더 잘 알려진 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 대표이자 명지대학교 건축대학장 김석철 교수가 쓴 ‘석학인문강좌’ 시리즈 열다섯 번째 책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이자 도시설계자로 수학, 철학, 물리학 등 여러 개의 프리즘을 통해 건축을 바라보는 거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김석철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언어 영역인 인문학과 시각 영역인 도시와 건축을 어우르고자 한다. 인류 문명의 원류인 고대 문명과 중세 문명의 하드웨어인 건축과 도시가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통해 오늘 우리의 건축 도시 공간이 된 과정을 설명하고, 디지털 혁명이 이룬 21세기 건축 도시의 새로운 물결을 함께 생각해 보자고 제안한다. 또한 남북 공동 도시 회랑, 4대강 사업을 통한 ‘한반도 인문학’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40년 동안 쉬지 않고 이루어 온 건축과 도시설계 작업 및 작품들을 소개하며 새로운 구상들을 함께 엮어 놓았다.
하나의 건축을 넘어 도시계획을, 도시계획을 넘어 한 국가의 마스터플랜을 제시하는 김석철 교수의 인문학적 사유와 예술가적 감수성, 광활한 역량을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에는 세상의 깊이, 잠재력, 가능성 등이 모두 들어 있다!
_ 건축과 도시 공간은 인문학의 하드웨어
“인문학은 공동체의 큰 흐름을 보게 하는 학문으로, 우리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해 준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하드웨어를 이해하기 위한 모든 학문의 기초다. 인문학의 바탕 없이는 어떤 일에서도 탁월함을 이룰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지혜가 인문학에 담겨 있는데, 그것을 공부하지 않거나 모르고는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없다.”
인문학을 이와 같이 정의한 저자는 인문학에 관한 한 자신은 관객이지 무대의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하며, 가장 손쉽게 인문학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독서라고 주장한다. 그 가운데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종교와 철학이라고 생각해 불교와 서양철학을 열심히 공부했으며, 이후 동서양 문헌을 끊임없이 탐독한 것이 건축가로서의 혜안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한다. 인문학과 과학기술을 넘나든 독서 몰입이 건축가로서의 여정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로마 시내에 있는 고대 로마 도시 포로 로마노에 들어섰을 때, 포로 로마노가 얼마나 훌륭한 도시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치와 경제, 문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사서삼경, 주역 등을 탐독한 결과 유학의 발원지이자 동양 인문학의 메카인 취푸 신도시의 의미를 알 수 있었고, 이는 곧 ‘주역과 풍수지리 원리에 의한 도시’를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어졌다고 회고한다.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신도시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니체의 저서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탐독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저자는 고대 문명의 가장 큰 상형문자인 그들의 공간, 즉 건축과 도시를 인문학과 관련시켜 설명한다. 인문학은 도시 문명과 함께 시작되어 건축과 도시설계의 중심이었으며, 건축과 도시 공간은 인문학의 하드웨어라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인문학자가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설계할 때 참다운 도시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건축과 도시의 삶을 살아 왔으며, 이 책을 통해 언어 영역인 인문학과 시각 영역인 도시와 건축을 어우르려는 시도를 꾀한다.
건축은 삶에 대한 사유에서 나왔을 때 진정한 존재 가치를 지닌다
_ 완전히 계획된, 중세 최고의 도시 서울을 위한 제언
인간은 시한부 삶을 살지만 인간 공동체는 천 년을 지속한다.
저자는 국적 불명의 건축이 난무하는 현실을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의 옛 건축과 유럽의 중세 도시를 통해 건축의 의미와 가치, 나아가 시간과 존재에 대한 본질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건축은 삶에 대한 사유에서 나왔을 때 진정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역사가들이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말하지만, 유럽의 주요 중세 도시들을 둘러본 저자는 중세는 결코 암흑시대가 아니라 빛의 시대이며 시민의 시대라고 말한다. 아울러 유럽 중세 도시는 인류 문명의 꽃이며, 저자 자신이 추구해 온 도시철학의 상당 부분이 고대와 중세 도시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럽 중세 도시는 최소의 에너지를 통해 최고의 삶의 경쟁력을 갖춘 도시로, 중세 도시의 코드 그린(범지구적 환경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클린 에너지, 에너지 효율성, 자연 보호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 전략)이 오늘의 인류가 추구해야 할 신도시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유럽 중세 도시만큼 아름답고 강력한 도시가 중세 초의 불교 도시 경주와 중세 말 최고의 신도시였던 서울이라고 말한 저자는 경주와 사대문안 서울의 재생 계획을 이야기하며 서울을 걷는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가운데를 한강이라는 거대한 자연이 흐르고 있으나 정작 도시 곳곳은 콘크리트의 사막같이 되어 버린 도시라고 말한 저자는, 이런 서울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려면 역사와 지리와 문화 공간을 한데 모은 문화 인프라, 즉 광장과 거리를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삼각산, 북한산이 광화문, 대한문 광장으로 이어지고, 남산을 지나 한강에 닿아야 서울이 자연과 인문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적인 도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이 세계 도시들 앞에 서려면 웅대한 자연을 도시 속에 깊이 연계시키는 일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한반도,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운다
_ 한반도의 인문학
우리는 한반도라는 특정한 공간 영역에서 2000년 문명을 만들어 왔다. 한반도는 아직 한반도만의 세상이 아니고, 우리가 한반도의 역사와 지리를 안다고 하기도 어렵다. 저자는 이런 때일수록 ‘한반도 인문학’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리의 역사와 지리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가능성을 확대하는 것이 제대로 된 인문학을 하는 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먼저 한반도 인문학은 60년 이상 지속된 남과 북의 실체를 인정하고 공존, 연합, 통일의 세 단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저자는 천 년 동안 한반도의 중심이었던 개성과 서울이 함께 세계 도시화의 흐름을 주도해야 한다는 ‘남북 공동 도시 회랑’을 제안한다. 21세기 인류가 지향할 만한 도시를 남과 북이 천년 도시인 개성과 서울이 합한 곳에 만들자는 것이다.
또한 정치·정략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한반도 인프라 상생의 길로 이끌자고 제안한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은 남이 이룬 것을 배우고 전하는 일에 그칠 뿐 우리가 당면한 세계화, 남북문제,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른 자본 집중과 경제 평등에 대한 인간 중심의 인문학적 접근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수천 년을 지속해 온 역사와 자연을 훼손할 수밖에 없는 신행정수도, 4대강 사업에 대해 아무런 답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신행정수도와 4대강은 한반도, 한민족의 기본 전제에 관한 문제로 우리 시대만이 아니라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칠 대상이므로, 인문학의 본문이 실사구시에 있음을 밝히고자 굳이 이 책에 더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저자는 한민족의 삶의 근원이었던 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의 각 강별 문제점을 정확히 해결하는 개발, 각 강별 특성을 제대로 살리는 개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나의 건축·도시·인문학 40년
현재 한국 최고의 건축가로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는 몇 년 전 암 선고를 받은 뒤 세 번의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지난 6년 동안 병상에서 그린 자신의 작품들과 함께 한국인의 정신적 중심과 문화가 표현된 건축과 도시를 부록으로 실어 소개하고 있다.
현실과 영원이, 세속과 종교가, 기하학적 질서와 유기적 질서가 이원적으로 결합해 같은 공간 환경에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한 한국의 건축과 도시를 경주 왕릉·불국사·해인사 불교단지·경복궁·창덕궁·종묘 등을 통해 보여주며, 여기에 한국 현대 건축의 현재 모습도 담았다.
또한 1960년대에 그린 다양한 스케치들과 직접 설계하고 건축한 김포공항, 조선호텔, 여의도 마스터플랜, 예술의전당, 한샘 공장,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제주 영화박물관, 해인사 신불교단지, 아덴과 바쿠 신도시, 서울사이버대학과 성신여대 운정캠퍼스, 버클리 음악대학원과 대학도시, 만인성채 등 지금까지 40년 동안 쉬지 않고 이루어 온 작품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40년 전 도시설계와 건축설계를 시작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을 보노라면, 오랜 세월 건축과 도시를 통해 인문학의 인프라를 만들려고 노력한 저자의 의무와 사명이 새삼 깊이 느껴진다.
첫댓글 김석철 지음 / 출판사 돌베개 | 2011.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