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오스트리아와 2014년 크림반도
193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Austria)의 대통령 권한 대행(大統領權限代行)인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ß-Inquart, 1892년 7월 22일~1946년 10월 16일)는 빈(Vienna)을 방문한 히틀러의 참관(參觀) 아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合倂)에 관한 법률(法律)에 서명(書名)했습니다.
약 한 달 후에 형식적(形式的)인 국민투표(國民投票)를 실시했으나 불과 20년 전만 해도 역사(歷史)를 선도(先導)하는 열강(列强) 중 하나로 군림(君臨)해 왔던 오스트리아는 그렇게 독일의 한 지역(地域)으로 편입(編入)되면서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겉으로는 평화적(平和的)인 행위(行爲)처럼 보였어도 이는 독일의 침략(侵掠)이었습니다.
실제로 바로 전날 독일군이 국경(國境)을 넘어와 오스트리아를 점령(占領)했습니다.
비록 교전(交戰) 없는 단순한 진주(進駐)였지만, 이는 명백(明白)한 군사작전(軍事作戰)이었습니다.
더구나 1919년 체결(締結)된 생제르맹 조약(Treaty of Saint-Germain-en-Laye)에 따라 양국(兩國)의 합병(合倂)은 20년간 금지(禁止)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단죄(斷罪)해야 할 영국과 프랑스는 '양국 합병은 독일 민족(獨逸民族)의 내부적 행위(內部的行爲)이고 어차피 내년(1939년)이면 가능(可能)하기에 문제 삼기는 어렵다.'며 에둘러 변명(變名)했습니다.
히틀러는 기고만장(氣高萬丈)해졌습니다.
↑1938년 3월 빈에서 모인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빈에 입성하는 독일군. 군대가 월경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도발 행위입니다
2014년 2월 27일, 친(親)러시아(Russia) 무장 세력(武裝勢力)으로 위장(僞裝)한 러시아군이 크림(Crimea) 반도(半島)를 기습 점령(奇襲占領)했습니다.
그리고 보름 후에 실시된 주민 투표(住民投票)를 근거(根據)로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합병(合倂)했습니다.
1954년 흐루쇼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1894년 4월 15일~1971년 9월 11일)가 러시아 관할(管轄)이던 크림반도를 양 공화국(兩共和國)의 우의(友誼)를 위한다며 지리적(地理的)으로 가까운 우크라이나(Ukraine)에 넘겨준 것이 문제의 시발점(始發店)이었습니다.
1991년 소련(蘇聯)이 해체(解體)되자 주민 대다수가 러시아인이고 전략적 가치(戰略的價値)가 엄청난 크림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은 당연히 컸습니다.
결국 우크라이나가 핵(核)무기를 포기(抛棄)하고 세바스토폴(Sevastopol)에 러시아 함대(艦隊)가 주둔(駐屯)하는 것을 조건(條件)으로 영토(嶺土) 문제는 일단락(一段落)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은 세계 질서(世界秩序)를 흔드는 커다란 도발(挑發) 행위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나라가 인정(認定)하지 않지만 원래 자신의 영토를 회복(回復)한 것뿐이라는 러시아의 주장에 적극 대응(積極對應)하지는 못하고 단지 외교적 항의(外交的抗議)와 경제적 제재(經濟的制裁) 정도만 단행(單行)했습니다.
푸틴(Vladimir Vladimirovich Putin, 1952년 10월 7일~)은 기고만장(氣高萬丈)해졌습니다.
↑2014년 크림반도를 점령한 러시아군
1938년 체코슬로비키아와 2022년 우크라이나
1938년 9월 30일, 현대 외교사(外交史)의 치욕(恥辱)인 뮌헨(Munich) 협정(協定)이 체결(締結)되었습니다.
당사자(當事者)의 동의(同意) 없이 영국(England), 프랑스(France), 이탈리아(Italia)는 체코슬로바키아 (Czechoslovakia)의 영토(領土) 중 독일인의 비중(比重)이 큰 주데텐란트(Sudetenland)를 독일에게 양도(讓渡)하기로 결정(決定)한 것이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정도면 히틀러의 욕구(慾求)를 만족(滿足)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判斷)했습니다.
다음날 독일군은 독일계 주민들의 열렬한 환대(歡待) 속에 국경을 넘었고 영국 수상 챔벌레인(Rt Hon. Neville Chamberlain, 1869년 3월 18일~1940년 11월 9일)은 '우리시대의 평화(平和)를 지켰다'고 자화자찬(自畵自讚)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게르만(Germany 민족(民族)의 영원한 생존(生存)을 위해 옛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강역(疆域)에 더해 무궁무진(無窮無盡)한 자원(資源)의 보고(寶庫)인 동(東)유럽과 서부(西部) 러시아까지 독일이 지배(地排)해야 한다는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존권(生存圈)을 주장(主張)하던 인물(人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견(意見)을 자서전(自敍傳) 등을 통해 공공연히 피력해 왔습니다.
결국 불과 6개월 만에 독일이 나머지 영토를 장악(掌握)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5개월 후에는 제2차 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계 주민의 환대 속에 주데텐란드에 진입하는 독일군
2022년 2월 22일, 러시아군이 동부 우크라이나의 루한스크(Луганськ)와 도네츠크(Donetsk)에 진입(進入)했습니다. 우크라니아의 지배에 반대(反對)하며 자치공화국(自治共和國)을 세운 현지 러시아인들을 보호(寶號)하기 위해서라는 명분(名分)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도발(挑發)에 미국이 꺼내든 카드는 나토(NATO) 접경 지역(接境地域)의 방어력 증강(防禦力增强)과 경제 제재 조치(經濟製才調治)였습니다. 그러면서 군사적(軍事的)인 대응(對應)은 나토가 공격받지 않는 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외교적 해결 방법(外交的解決方法)이 열려 있음을 밝혔습니다.
반면 푸틴은 당일 행한 연설(演說)에서 우크라이나가 역사적(歷史的)으로 러시아의 일부 임을 강조하며 자신의 의도(意圖)를 명확(明確)히 했습니다. 존재(存在)를 부정(不定)한 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현재의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식민지(植民地)'라는 외교적으로 상당히 거친 언사(言辭)까지 동원(動員)했습니다. 이를 통해 본다면 마치 히틀러에게 주데텐란트처럼, 푸틴에게 루한스크와 도네츠크는 우크라이나 전체(全體)를 차지(此地)하기 위한 단순한 통로(通路)가 될 가능성(可能性)이 컸습니다.
↑루한스크와 도네츠크를 승인한 푸틴의 조치에 환호하는 현지 러시아계 주민들
이것이 마지막이 아닐 수 있는 이유
작년 10월부터 나토의 확장(擴張)을 저지(沮止)한다는 명분(名分)으로 우크라이나를 군사적(軍事的)으로 포위(包圍)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현지 러시아인 보호(保護)가 목적(目的)이라면 반(反)러시아 감정(感情)이 크고 러시아인이 적은 서부(西部) 우크라이나까지 군사적으로 압박(壓迫)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인 2월 24일,
러시아는 마침내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현재의 행태를 보면 레벤스라움을 주장했던 히틀러처럼 푸틴의 욕심(慾心)이 우크라이나만으로 멈출 것 같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기갑부대. 세계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공공연히 옛 소련의 부활(復活)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자신의 의도(意圖)대로 정리되면 발트 3국과 몰도바(Moldova)가 러시아의 다음 침략(侵略) 대상(對象)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인근(隣近)의 발트 3국은 반러 의식(意識)이 강한 곳입니다.
그런데 2월 22일 연설(演說)에서 무려 1,000년 전 역사(歷史)까지 거론한 것을 보면 푸틴의 야심(偌甚)(野心)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고 판단(判斷)됩니다.
↑독일 주재 러시아 대사관 인근에서 러시아를 규탄하는 반전 시위대, 많은 이들이 데자뷰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20세기 초 제국(諸國) 당시에는 핀란드(Finland), 폴란드(Poland)까지도 차지(此地)했었습니다.
물론 푸틴이 이곳까지 욕심낸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습니다.
더구나 발트 3국과 폴란드는 나토 회원국(會員國)입니다.
그런데 체코슬로바키아를 평정(評定)한 히틀러가 다음에 침략(侵略)한 나라는 영국, 프랑스와 동맹(同盟)을 맺은 폴란드였습니다.
그런데도 제2차 대전은 시작되었습니다. 동맹이 전쟁을 막은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지 두려워집니다●
[출처] 역사는 반복될 것인가?j|작성자 aug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