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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와 희망을 얻으려면
참고말씀: 시139:17,18; 전7:14; 사55:9; 렘33:3; 애3:33; 겔36:37; 호7:7; 마6:32,33 7:8; 눅18:7; 요16:24; 롬3:10; 엡2:8,9; 약4:2; 계1:1
읽을말씀: 렘29:10-14
주제말씀: 렘2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궁금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렘29:11 상)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궁금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자신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왜 궁금해집니까? 평안할 때는 조금 보이는 것 같다가도 곤고한 일이 닥치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 풀릴 때에는 탄탄대로를 달리는 것 같다가도 안 풀릴 때는 좀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험한 길을 달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처음 계획을 세울 때에는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씩 잘 맞아가는 것 같다가도 나중으로 갈수록 자꾸만 엇박자가 생기고 안 맞는 부분이 점점 더 늘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하)
왜 그런 것입니까? 먼저는, 하나님께서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이 두 가지를 항상 병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를 인도하시되 이 두 가지 날을 씨줄과 날줄 삼아서 임의대로 우리의 삶을 엮어 가시는 것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전7:14 상)
또한 우리를 단순히 한 가지 생각만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생각들을 가지시고 그리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우리에게 꼭 맞는 길을 찾아내어 그때마다 적절하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139:17,18)
그러니 무엇이 불가능합니까? 미리보기(preview)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생각이 바닷가의 모래알보다도 많은데 우리가 어찌 그 수를 헤아릴 수 있으며, 하늘의 별들보다도 많은데 우리가 어찌 그 수를 셈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생각은 광대무변(廣大無邊, 넓고 커서 그 끝이 없음)하며 깊고 오묘하며 다 셀 수도 없고 다 깨우칠 수도 없습니다. 실로 그 격차가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9)
그러므로 누가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스스로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우리 중 누구도 그것들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알려주시는 것을 ‘계시’라고 부르며, 이 계시를 한데 모아놓은 것이 바로 ‘성경’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계1:1 상)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궁금합니까? 그런데 이 생각들이 너무도 많아서 미처 다 헤아릴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스스로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밝히 알 수 없음을 깨닫고 있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많고 또 많은 부분 가려져 있다 보니, 흔히 어떤 일이 벌어지곤 합니까? 오해(誤解, misunderstanding)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그릇 되게 해석하거나 아예 잘못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오해하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이해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즉 이해가 안 되니깐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면 무조건 오해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기엔 우리의 이해심이 그리 깊은 편도 아니요 우리의 이해력이 그리 뛰어난 편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 오해를 많이 하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이해심이 적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해심이 적은 사람이 쉽게 누군가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해심이 적기 때문에 쉽게 오해하고 쉽게 토라지며 쉽게 단죄하거나 정죄합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이해가 안 되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 내가 어떻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겠어! 난 그 정도로 이해력이 높은 사람이 아니야! 언젠가는 이해가 될 날이 오겠지!’ 라고 말하는 훈련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해가 안 되면 ‘안 된 채로’ 그냥 놔두십시오. 오해로 넘어가기 전에 일단 멈추고 사방을 폭넓게 다시 한 번 살피기를 바랍니다.
‘현재로서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겠지! 이해가 안 된다고 무조건 오해하지는 말자! 오해(誤解)에서 한 글자만 바꾸면 이해(理解)야!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좀 더 다른 시선에서, 좀 더 다른 입장에서, 한 번 더 살펴보기로 하자! understand!란 그 사람의 아래에(under) 서보는(stand) 거라고 하잖아!’
하나님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많고 또 많은 부분 가려져 있다 보니 우리가 흔히 오해하곤 하는 것 같습니다. 오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통해 직접 그분의 생각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만큼이나 분명하고도 확실한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왜 오해합니까? 상대방에게 직접 듣기보다는 한 단계 건너서 듣거나 우회해서 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직접 대화하기보다는 문자나 글로 접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문자, 곧 기록된 글에는 무엇이 담겨 있지 않습니까?
악센트(accent), 즉 단어를 발음할 때, 어떤 음절을 음의 높낮이나 세기를 이용하여 강조하여 발음하는 것입니다. 왜 악센트가 중요합니까? 같은 글자라도 악센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어법(反語法)입니다. 이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전체의 문맥을 통해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반대의 뜻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문을 통해 자신의 뜻이 무엇이 아니라고 밝히셨습니까? 재앙입니다. “...재앙이 아니니라...”(11절 중)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재앙이라고 여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계획이었습니까?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지내다가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0절)
왜 백성들은 이를 재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70’이라는 숫자가 너무 크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7년도 긴 세월인데 70년을 바벨론에서 지내게 될 것이라고 하니 눈앞이 캄캄해지고 낙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뒤에 있는 선한 말씀은 귓가에도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0절 하) /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절)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평안입니다.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11절 중) 즉 그들을 바벨론 땅에서 다 죽이시거나 멸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바벨론 땅에서 잘 돌보아서 다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연단하시고 변화시키며 새롭게 하셔서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심입니다. 또한 무엇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까? 미래와 희망입니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11절 하) 즉 희망 가득한 미래를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의 본심(本心)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을 드려다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본심은 재앙이 아니시라는 점을 말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도 무엇이 아님이 분명합니까? 재앙입니다. 오히려 분명 평안이요 미래와 희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확신하지 않으면 언제든 오해할 수 있고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확신하기를 원합니다. 설령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더라도 말입니다.
셋째, 미래와 희망을 얻기를 원합니까?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29:12,13)
이 같은 미래의 희망을 얻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12절 상)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13절 상)
어째서입니까? 그래야만 얻을 수 있고,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12절 상) 찾고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13절 하) 즉 구하는 자가 받을 수 있고 찾는 자가 찾아낼 수 있으며, 만나고자 하는 자가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8)
‘구하여야 받는다’는 원리는 여기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 곳곳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37 상)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4:2 하) /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2,33) /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려고 해도,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즉 온 마음으로 구하고 찾고 만나려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13절)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어떻습니까? 좀처럼 구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요16:24 상) 좀처럼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7:7 하) 좀처럼 하나님을 찾거나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3:10 하)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그 동안 구하지 않음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으며, 그동안 찾지 않음으로 인하여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붙잡지 못한 채로 살아왔습니까?
영어속담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도와 성공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력한 만큼 얻게 되지만,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단, 구원 문제는 우리의 노력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미래와 희망을 얻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수동적으로 기다리지만 말고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으라고 하시면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시면 시간을 내어 열심히 기도하며, 온 마음으로 구하라고 하시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라고 하시면 부지런히 찾으며, 하나님을 부르라고 하시면 간절히 부를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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