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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셨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피정을 하고 왔는데, 지도를 부산교구 허성 야고보신부님이 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들려주신 이야기 중, ‘희망기도’로 유명한 대구대교구 최봉도 신부님이 본당 사목하실 때 있었던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한 자매가 울면서 최 신부님을 찾아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기나 한 것이냐고 따졌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본 즉 이렇습니다.
식구가 4명인데 월세로 한 방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알코올중독이라 일도 나가지 않고 술만 마시고, 큰 딸은 결핵에 걸렸지만 돈이 없어서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여 집에 있고, 작은 딸은 가출해서 소식도 없는데, 이번엔 자신이 다니는 직장이 부도가 나 그 자매까지 직장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월세를 내지 못해서 쫓겨날 판이고 이제 모든 식구가 길에 나앉게 되었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최봉도 신부님은 그 자매에게 그러면 일주일간 속는 셈 치고 ‘감사기도’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알코올중독인 것도, 딸이 하나는 결핵으로 죽어가고, 또 하나는 가출하여 집에 없는 것도,
또 자신이 직장을 잃게 된 것도 다 하느님의 은총이니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고 하였답니다.
그 자매는 불난데 기름 붓느냐며 화를 내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뒤 그자매가 환한 얼굴로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신부님께 화를 내고 집에 돌아와서 할 것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한풀이를 할 겸 하루 종일 방에서 큰 소리로, “남편이 알코올중독이라 감사합니다.
내 딸이 결핵에 걸려 감사합니다.
막내가 가출을 해서 감사합니다.
제가 직장을 잃어서 감사합니다. ...”라며 계속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도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당 빈첸시오회에서 오더니 오스트리아 선교사 하 마리아가 운영하는 결핵요양소에서 딸을 무료로 받아주겠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러니 진짜 감사의 기도가 나오더랍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문 밖에서 “엄마!”하는 작은 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집에 돌아온 것입니다.
정말 감사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남편이 생전 처음으로 술을 안마시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동안 미안했다고 하며 아예 술을 끊었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자매도 옆에 병원이 새로 생겨서 거기에 주방근무자로 취직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일주일 안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히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 안에는 믿음과 순종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죄는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 그래서 순종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바보스러운 일로 보일까요?
저런 상황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고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카나의 혼인잔치가 나옵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첫 기적을 행하시는 장면입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복음의 상황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혼인잔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미사성제’를 생각하셔도 될 것입니다.
미사가 곧 그리스도와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혼인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술이 없는 잔치는 본 적이 없습니다.
술은 잔치의 필수 요소입니다.
즉 술이 없으면 더 이상 혼인잔치가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미사 때 빵과 포도주가 없으면 그리스도와 한 몸이 이루어지는 잔치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양식과 음료가 거저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님을 오늘 복음은 알려줍니다.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로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될 수 없음을 잘 아시고, 아드님께 성령님을 청합니다.
그러나 아드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여인이시여, 그것이 당신과 나와 무슨 관계입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청을 거부하시는 명확한 표현입니다.
여기서 성모님의 힘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성모님이 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하고 말씀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모님은 기적을 ‘강요’ 하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스테르서를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왕비인 에스테르가 임금으로부터 내침을 당하느냐, 아니면 유다 백성을 살리느냐의 기로에서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다가갔듯이, 성모님도 당신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 포도주를 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작정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명령한 성모님을 당신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내치셨다면 성모님 역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만한 기적을 강요할만한 믿음과 순종이 있으셨습니다.
성녀 제르뚜르다에게 누가 와서 기도를 청했다고 합니다.
제르뚜르다는 수많은 기도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성녀의 기도 때문에 은총을 받게 되었다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성녀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제가 기도도 해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지요?”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그분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잉태할 때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며 그분의 뜻만을 따르기로 결심한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이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작은 믿음들이 있는데 이 믿음들이 봉사자들의 믿음입니다.
한 여인과 그 아들이 이상한 말을 주고받은 다음에 술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고 그것을 떠서 잔치 맡은 사람에게 가져다주라고 하는 데 이것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도 대단한 믿음인 것입니다.
사제들이 바로 이 작은 믿음들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위에 성모님의 믿음이 있지만 사제들도 밀떡과 포도주를 바라보면서 이 예식을 그대로 행하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피’ 하면서 나누어 줍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인데도 정말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하고 있다고 비웃음을 받는 행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당신 믿음뿐만 아니라 교회의 이런 작은 믿음들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하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신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혼인잔치의 믿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몸!’하면 ‘아멘!’이라는 응답을 해야 합니다.
적어도 그런 믿음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적은 믿음을 통해서 완성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기적은 별거 없는 것 같습니다.
잠시 자신을 내려놓고 ‘믿고 순종’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교회는 믿음과 순종으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납니다.
은총을 받고 싶다면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 봅시다.
“네가 내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토요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성모님께서 바로 여기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교회 역사 안에 등장한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단 한명도 빼놓지 않고 지니고 있었던 신심이 있었으니, 성모님을 향한 신심입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빼놓을 수 없는 성인, 성모님 신심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성인이 바로 돈보스코 성인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은 도움이신 성모님 신심의 전파자였습니다.
그는 한평생 성모님께서 자신의 성소 여정에 늘 함께 하시면서 자신이 펼친 청소년 구원사업에 가장 큰 협조자였다는 것을 늘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돈보스코 성인은 성모님을 능력이 탁월한 변호사로 여겼습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 나아가게 될 하느님 대전에서 우리를 변호해주시고 도와주실 강력한 협조자로 확신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돈보스코 성인은 성모님께서 언제나 자신 가까이 현존함을 강력히 느꼈고
언제나 자신을 성모님께 의탁했습니다.
험난한 성소여정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 마다 성모님의 강력한 도움에 의지했고, 곤경에 빠질 때 마다 그분의 손길을 청했습니다.
기회 닿을 때 마다 돈보스코 성인은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이여, 여러분들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배경은 거룩하신 성모님을 향한 신심입니다.”
결국 돈보스코 성인이 바라봤던 성모님의 이미지는 오늘 복음, 갈릴래아 카나의 혼인잔치에 비춰지는 성모님 상과 동일합니다.
이웃의 필요성에 관대하게 응답하는 성모님, 이웃의 곤란함 앞에 나 몰라라 하지 않는 자상하신 성모님, 이웃에게 진심어린 관심을 기울이는 부드러운 성모님, 결국 도움이신 성모님의 모습입니다.
물론 복음서 안에 나타나는 성모님의 이미지와 그분의 역할과 구세사에 기여하신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탄생 예고 때는 겸손한 하느님 여종의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는 이웃을 향한 참된 봉사와 헌신의 모델로 제시됩니다.
골고타 언덕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는 고통을 수용하고 극복하는 모습으로, 예수님 부활 이후에는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 인간들을 위한 도우미로서의 성모님 역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재자, 하느님 앞에 우리의 변호사로서, 항상 나약하고 죄인인 우리의 의지처요 마지막 보루요, 희망으로서의 모습을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돌아가시기 3년 전, 1885년 6월의 일입니다.
당시 살레시오 수녀님들은 프랑스 니짜 몬페라토란 곳에서 총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력이 쇠한 돈보스코 성인께서 수녀님들에게 총회 마무리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쇠한 돈보스코 성인은 알아듣기 힘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많은 것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나는 이미 늙었고 말하기 조차 힘듭니다.
그래서 간단히 한 말씀만 드리자면 성모님께서 여러분을 정말 사랑하신다는 이 말씀을 드리고 깊습니다. 아십니까?
성모님께서는 여기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당시 돈보스코 성인을 수행하던 보네티라는 사제가 돈보스코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말을 받아 수녀님에게 큰 소리로 통역 아닌 통역을 해드렸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여러분의 어머니시고 여러분을 보시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보네티 신부의 전언이 마음에 안 들었던 돈보스코 성인께서는 그게 아니라며 안간힘을 다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게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이 집에 계시며 여러분들에게 흡족해하고 계십니다.”
보네티 신부가 다시 돈보스코 성인의 말을 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정하겠습니다.
돈보스코께서 말씀하시길, 여러분이 항상 잘 하신다면 성모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만족하실 것입니다.”
또 다시 엉뚱한 말을 전하는 보네티 신부에 화가 난 돈보스코 성인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치십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여기 여러분 가운데 정말로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이 집안을 거닐고 계시며 당신의 망토로 이곳을 덮고 계십니다.”
돈보스코 성인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성모님은 도움이신 성모님이십니다.
실제로 우리 옆에 현존하시며 우리의 일생을 동반하십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모든 걸음에 함께 하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2023. 01. 07 주님 공현 전 토요일
요한 2,1-11 (카나의 혼인 잔치)
그때에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그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정결례에 쓰는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데, 모두 두세 동이들이였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물독마다 가득 채우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이제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날라다 주어라.” 하셨다. 그들은 곧 그것을 날라 갔다. 과방장은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났는지 알지 못하였지만, 물을 퍼 간 일꾼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과방장이 신랑을 불러 그에게 말하였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대 기쁨이 되어
슬퍼하는 이들을 품어라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대 희망이 되어
쓰러진 이들을 일으키어라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대 빛이 되어
어둠에 잠긴 이들을 비추어라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대 소리가 되어
침묵하는 이들을 울리어라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대 사랑이 되어
버려진 이들을 보듬어라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대 평화가 되어
갈라진 이들을 이어라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대 살림이 되어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어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