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아사(餞迓詞)
신석정
포옹(抱擁)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얼룩진 역사(歷史)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階段)에
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
좌표(座標)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音樂) 같은 가녀린 소리
철 그른 가을비가 스쳐 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祖國)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叱責)함은
아아, 어인 지혜(智慧)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있는 한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웃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黃河)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孕胎)한 함성(喊聲)으로
다시 억만(億萬)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槍)을 겨누리라
새벽 종(鐘)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시집 『산의 서곡』, 1967)
[어휘풀이]
-스스러워 : 수줍고 부끄러워
-만가 : 상엿소리
[작품해설]
신석정은 첫 시집 『촛불』(1939)에서 식미 치하의 어둠과 절망의 시대 상황 속에서 어머니에 대해 느끼는 고립감과 낙원에 대한 동경(憧憬)을 노래하다가, 『슬픈 목가』(1947)에서는 이러한 꿈들이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목가적인 시풍으로 삭막한 현실과 대면한다. 해방기와 6.25의 격랑(激浪)을 거치면서 신석정 시의 여성적 정조(情調)의 화자드은 남성적인 기개(氣槪)로써 역사와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부정을 깨우치려는 저항의 목소리를 드러내는데, 『빙하』(1956)와 『산의 서곡』(1967) 등의 작품집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시는 관념적인 내용이라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작품이지만, 감상의 실마리는 바로 제목 ‘전아사’에 있다. ‘전아사’의 ‘전(餞)’은 보내다의 뜻이며, ‘아(迓)’는 맞이하다는 뜻이다. 즉 ‘송구영신(送舊迎新)’이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시인이 보내려고 하는 것은 밤이며, 맞이하려고 하는 것은 새벽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포옹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살아온 시인이 ‘밤’으로 표상된 고난의 역사를 보내고, ‘새벽’으로 표상된 새 역사를 맞이하겠다는 현실 극복 의지를 남성적 어조로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 공간은 ‘좌표 없는 대낮’으로, 밤보다 어두운 상황이다. 통곡을 하기에도 스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는 음악과도 같이 가녀린, 가을비와도 같이 흐느끼는,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것 같은, 목마르게 그리던 그리운 목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당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당신’은 인자한 얼굴과 환한 웃음으로 다가와 시인의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한편, 빛나는 지혜의 눈으로 꾸짖어 주면서 좌표를 잃고 시대의 어둠 속을 헤매던 시인을 깨어나게 한다.
마침내 시인은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 내 귓전에 있는 한 /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든 ‘사탄의 가슴에 창을 겨누’고 그것과 맞서 싸우겠다고 하면서 얼룩진 역사에 종언을 고하고 새벽을 맞이하겠다는 의지를 다짐한다. 이렇듯 이 시는 일제 치하라는 암흑의 긴 세월을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지럽기만 한 1960년대 초 조국의 현실 상황을 바라보는 시인의 역사 인식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작가소개]
신석정(辛夕汀)
본명 : 신석정(辛錫正)
석정(石汀, 釋靜), 석지영(石志永), 사라(沙羅), 호성(胡星), 소적(蘇笛), 서촌(曙村)
1907년 전라북도 부안 출생, 보통학교 졸업 후, 향리에서 한문 수학
1924년 『조선일보』에 시 「기우는 해」 발표
1931년 『시문학』 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한 이후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작품활동 시작
1972년 문화포장(文化褒章) 수상
1974년 사망
시집 : 『촛불』(1939), 『슬픈 목가』(1947), 『빙하』(1956),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 (1970),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