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16일 토요일 [(자)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수도회] 함께 아파하시려고 오시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집회 48,1-4.9-11
† 복음 마태 17,10-13
◈ 오늘의 묵상
제자들은 타보르산에서 내려와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높은 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엘리야에 대하여 물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엘리야는
‘신앙의 수호자’이며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날을
준비하려고 엘리야가 재림하여 주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믿었습니다.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의 길을 준비할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말라키 예언자가 말한
엘리야였음을 확신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이 앞서간
고난의 길을 가시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삶은 신앙을 지키고 쇄신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고,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파하였습니다. 구원의 은총은 거저 주어지지만,
우리에게 구세주를 맞이할 자세는 필요합니다. 불의에서 빠져 나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 사치와 허영에서 소박하고 겸손한 삶으로
돌아가며,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은총이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연말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정리합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일, 신앙에 방해되는 것들을 치우는 일들이 우리가 먼저
정리해야 할 ‘목록’에 있어야 하겠습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긍정적인 마음으로
2017년 나해 12월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48,1-4.9-11
복음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0-13
요즘 계속되는 대림특강으로 인해 많이 피곤한 상태입니다. 막히는
퇴근 시간대에 운전을 해야 하다 보니 더 피곤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를 마치고 사제관에 들어오면 그대로 이불 위에서 쓰러집니다.
어제는 씻지도 않고 또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이불 위에 누웠네요.
만사가 다 귀찮았거든요. 아무튼 올해 이제 딱 두 번의 대림특강만
남았습니다. 걱정이 되는 것은 특강을 하는 곳이 비행기 타고서
가야하는 해외 한인 공동체라는 점이지요. ㅠㅠ
다음 주 화요일에 비행기 타고 가서 수요일과 목요일에 강의를 하고
금요일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입니다. 그런데 왜 걱정이
될까요? 강의를 하는 것이 힘들어서일까요? 아닙니다. 강의 때문이
아니라, 비행기 타는 것 때문에 걱정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비행기 타는 것이 너무 싫은 것입니다. 솔직히 비행기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항공사에서 제공해주는
영화보기, 억지로 잠자기, 항공사 잡지 보기, 가지고 간 소설책 보기,
화장실 가기 정도가 아닐까요? 또 하나,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기내식 먹는 것도 있겠네요. 그밖에는 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답답해서 비행기 타는 것을 꺼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에 어떤 신학생이 제게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신부님은 좋겠어요. 비행기를 많이 타셔서요.”
비행기 타는 것이 너무 좋다면서, 한 24시간 정도 타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주도 가는 것도 타기 싫은데, 이 신학생은
아무리 오래 타도 너무 좋다고 합니다. 왜 일까요? 비행기를 그렇게
많이 타지 않아서?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높은 하늘 위에 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안히 목적지까지 바래다주는데 왜
싫으냐고 하네요.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싫다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들이 더욱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과 사람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룬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들이 원했던 것은
이스라엘을 참된 회개의 삶으로 이끌 예언자와 이스라엘을 구원할
구세주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심으로 인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는 미쳤다고
하고,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를 들어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은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절대로 알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금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희망은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희망을 버릴
뿐이지(리처드 브리크너).
이 코뿔소는 자신의 코만 보이나 봅니다. 우리도 이러한 것은
아닐까요?
마음의 평정 얻기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문을 보면서 비난할
것만을 찾고, 산책을 할 때에는 날씨 탓을 참 많이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각종 불평이 나옵니다. 이렇게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흐트러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분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람과 세상 탓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흐트러져 있어 마음의 평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 기복이 심한 것이지요.
옛날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
중 한 명은 이러한 경우에 이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자기 방에 들어가서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먼저 자신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 마음의 평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새로운 일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평불만이 많으신 분, 가장 먼저 규칙적인 생활을 해보십시오.
분명히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갑곶성지 성탄 트리에는 자신의 소원들을 붙일 수 있답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함께 아파하시려고 오시는 주님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16일 대림 재2주간 토요일 마태 17,10-13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함께 아파하시려고 오시는 주님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향한 여정으로 돌아오시려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가 산 채로 승천해 있다가(2열왕 2,11)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에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열두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믿었습니다(말라 3,1. 23 참조).
율법학자들은 현실적인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마태 17,10).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7,11-12) 사람들은 두 번째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이
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악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선구자를 알아보지 못했기에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11,1-19), 선구자를 죽였듯이 메시아를 죽일 것입니다
(14,2-12).
엘리야는 횃불처럼 타오르는 불이 되어 주님의 영광과 말씀을
전했으나 배척 당합니다(집회 48,1. 4).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께서는
영광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으실 것입니다(17,12).
말씀이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랑을 보여주시고 기쁜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유다인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정치범으로 몰려 죽임을 당합니다. 예언자들이 전한 하느님
말씀은 이기심과 탐욕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는 듣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고통받는 우리와 아픔을 같이하려고 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시려고
오십니다. 불의와 핍박으로 시련을 겪는 우리의 삶의 한복판으로
걸어오십니다. 나의 억울함과 신음소리를 축제의 환희로 바꿔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열정으로 모함과 살의
번득이는 악의 무리 앞에 사랑으로 버텨주시려 오십니다.
오시는 메시아 하느님은 모든 것을 이루시는 권능을 지니신 만군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으로 가장 낮은곳 보잘것없는
구유에 힘없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오직 사랑 때문에 인류와 함께
아파하시려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온갖 고통과 시련 속에 걷는
우리의 인생 십자가길의 영원한 동반자이십니다.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데 합당한 태도는 우리와 아픔을 함께하시려는 그분처럼
되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지니셨던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불의에 저항하며, '한마음으로' 시련을
겪어내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맞이하는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불꽃처럼 타오른 엘리야 예언자
2017년 나해 12월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 17,10-13
불꽃처럼 타오른 엘리야 예언자
모세와 더불어 구약시대 위대한 대예언자로 손꼽히는 엘리야 예언자의
생애는 생각할수록 멋지고 존경스럽고 감동적입니다. 그가 보여준
영성의 불꽃은 제자 엘리사에게로 고스란히 전달되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구약시대 마지막 대예언자 세례자 요한과 연결되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로 통합됩니다.
그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 때에 다시 오기로 되어 있던 엘리야로
간주되었고, 주님의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준비하는 새로운
엘리야로 여겨졌습니다.
천둥같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이스라엘의 회개와 새로운 삶을 외치며,
세상의 권세와 불의 앞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던 당당한
엘리야 예언자의 생애였지만, 구체적인 삶 안으로 들어가 보면 참으로
끔찍하고 신산(辛酸)한 생애였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이교도와의 결혼과 우상 숭배 등으로 인해
추락할대로 추락한 이스라엘 왕권에 무시무시한 경고장을 날렸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그를 죽인 아합 왕과 부인 이세벨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이교 신들을 믿던 아합왕의 아들 아하즈야 왕에게는 비참한 죽음을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참된 주님이심을
알리며,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주님께 충실하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친구처럼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갖은 박해요
생명의 위협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이리 도주, 저리 추방을 밥먹듯이
당해야 했습니다. 쫓겨다니다보니 굶기를 밥먹듯히 했습니다. 때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식량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엘리야의 귀는 언제나 주님의 신탁에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릇된 왕권에 보내는 끔찍한
메시지를 아무런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시대는 어찌 그리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우상숭배와 타락과 방황에 찌든 아합왕이 세상을 뜨자, 가난한
백성들은 드디어 새 세상이 올것이란 희망에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왠걸 새롭게 왕좌에 앉은 아들 아하즈야 왕은 아버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지난 십년 가까운 세월 동안의 우리나라 아니면, 지난 수십년
세월 동안의 북녁 동포들처럼 말입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이백퍼센트 충실하게 이행했던
엘리야 예언자였지만 끝내 새 하늘 새 땅을 보지 못한 채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제자 엘리사에게 자신이 못다한 나머지 사명을 남겨주고,
불꽃처럼 승천하는 엘리야 예언자의 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우리의 마음이 차갑게 바뀌는 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제멋대로 살았던 저의 삶이 부서져 내립니다.
교만과 착각이 부서져 내립니다.
부서져 내릴 때 기다려야 할 분이 누군지를 알게됩니다.
하느님조차도 모르고살았습니다.
뒤늦게 하느님을 알게 해주셨던 소중한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삶의 길을 밝혀 주었던 예언자들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 날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서로의 어리석음을 덮어 주는 사랑입니다.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것은 언제나 겸손입니다.
겸손을 배우는 대림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이미 와 계신 분을 알아보는 것은 겸손된 믿음입니다.
모든 걸 바치려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십니다.
우리의 영혼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길 겸손되이 기도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이미 와있던 엘리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엘리야가 종말 전에 온다(말라 3,23 참조)고 하였다.
엘리야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던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는 엘리야가 먼저 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의 오심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 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
(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는 것이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 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고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 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기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구하자.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대림 제2주간 토요일
2017년 나해 12월16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 마태 17,10-13
오늘 성서 말씀은 엘리야 예언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엘리야 예언자를 묵상하면서 예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14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교육 때문에 대방동 성당엘 갔습니다. 제가
책임을 맡았던 교육이기에 2시간 전에 도착했습니다. 봉사자들과
인사를 한 후에 저는 성당 앞에 있는 불가마 사우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저를 찾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저는 목욕탕에서
저를 찾는 방송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강사 신부님이 교통이
너무 막혀서 늦을 거라고 전화를 하셨고, 봉사자들은 제가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와 시간을 바꾸면
문제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저는
성당에도 없었고, 사제관에도 없었고, 성모상 앞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나 해서 목욕탕으로 저를 찾아왔고, 저는 목욕탕에
있었습니다. 목욕탕에서 나온 저는 정신은 없었지만 강의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갈멜 산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둥소리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거센 비바람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조용한 침묵 속에 있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음성을 외부의 환경에서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다시금 하느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서 기다리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기다림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인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나타날 어떤 것이 숨겨져 있다는 믿음으로 그 상황 가운데 기꺼이
살며, 그 곳에 기꺼이 머무르고자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급한 사람들은
늘 다른 어떤 곳에서 진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다른 곳으로
가보지만 그 곳에는 인생의 쓴 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을 맺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루가 8:15)” 세상의 끝 날의 징조에 대해서는 “그리고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루가 21:19)”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로마 5:3-4)”
인내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약속이 있는 그 곳에 머물러야 합니다.
인내하는 삶이란 현재를 능동적으로 살면서 하느님의 약속이 있는
곳에서 기다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태중에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다림의 사람들은 항상 깨어 있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둘째,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은 우리에겐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대부분은 소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났으면, 좋은 집을 가졌으면, 물질이
풍족했으면, 좋은 직장을 가졌으면, 이 고통이 지나갔으면”
우리에게는 소원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다림은 그런 소원과
맞물려 있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의 시작은 길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한 길이입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기다림을
시작하고 끝을 내려하기 때문에 하느님 사랑의 기쁨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망하게 되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리던 진실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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