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북쪽에서 온 방문자
작성자 SKOON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암울한 어둠의 편린이든, 투명한 빛의 편린이든, 과거는 누구에게나 공통되게 적용되는 법칙과도 같은 것이니까. 나는 가끔씩 생각한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또는 내일로 이어질 미래, 잠시 후면 다시 현재가 될 내일이 단절되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런 행운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언제나 느끼는 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그 모두가 분리되고 유리된 개념이 아닌 하나의 긴 끈과도 같다는 것뿐이다. 그래, 지금 이 순간조차도 숨 막히게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는 이 절망의 끝에서도 나는 그 사실 하나만은 끝까지 인지하고 있다.
문득 주위가 시끄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지만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드는 이 파공성은 진정 무딘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한번 그 근원지를 응시하게 되지 않을까? 나의 고개는 자연스레 그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넘어진 테이블과 깨진 접시, 그리고 컵, 혼란스레 뒤엉킨 음식물들과 바닥을 적시고 있는 술들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또 흔하디흔한 그런 시비겠지. 용병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그런 다툼.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이미 다 식어버린 녹차를 들이마셨다.
상념이 너무 길었었던가... 식어 변질되어 버린 녹차의 씁쓸한 맛은 내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계속되어 내 귓가를 때리는 저 쇠를 긁는 듯한 고함 소리도.
“...어디 다시 한번 지껄여 봐라! 이 자식!!”
“어이, 어이. 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구. 챙피하잖냐? 그래도 댁은 이름 있는 가드(Guard)같으신데... 나 같은 용병 나부랭이... 웃!”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다시 그쪽을 향한다. 그러나 크게 관심은 가져지지 않는다. 분명 사소한 자존심 다툼일 테니까. 다만 내 바람은 이 시끄런 소동을 제발 빨리 끝내 주었으면 하는 것. 내 눈이 향한 곳에 근육으로 다져진 크고 넓은 등이 보인다. 그리고 그 등의 주인에게 거칠게 멱살 잡혀 있는 남자도. 멱살을 잡고 있는 남자의 거대한 몸집에, 잡혀 있는 남자의 몸이 반 이상이나 가려질 정도로 두 사람의 덩치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런 만큼 제발 빨리 끝내주길 바라는 바이지만.
“네 놈, 아까 뭐라고 씨부렸지?”
“아, 아. 그러니까 말야... 댁이 그 유명한 고스크(G.O.S.Q)의 출신이시라길래...”
고스큐(G.O.S.Q)...?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그 덩치 큰 남자, 고스큐 출신이라는 그 남자를 응시했다. 뒤쪽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상당히 단련된 몸과 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몸집 그 어디에도 군살은 보이지 않는다. 흉부와 복부만을 가린 신소재 경갑옷 사이로 보이는 그의 근육들이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고스큐 출신이라면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곳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생각으로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고스큐 출신이라고 말했을 때 네놈이 뒤에서 뭐라고 씨부렸느냐고 묻고 있는 거다!!”
남자가 더욱 목소리를 돋구며 위협적으로 상대방 남자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들어올렸다. 실로 엄청난 힘이다.
“켁...! 켁...! 그, 그러니까...!”
멱살 잡힌 남자의 괴로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스큐 출신이라는 남자에게서 떨어져 가고 있었다. 멱살 잡힌 남자가 고스큐 출신의 남자의 머리 위로까지 들려 올려져서야 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붉은 머리, 붉은 눈, 왼쪽 뺨의 상처... 참 인상이 독특한 남자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그 남자는 자신의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히죽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자식이...! 지금 웃고 있냐!!!”
“그, 그러니까 말야... 고스크 출신이라고 떠들어봤자... 그 녀석들이 너를 도와주러 올 리가... 없다고... 말했잖아!!!”
아주 순간의 일이었다. 무력하게 멱살을 잡혀있던 그 붉은 머리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무력하게 축 늘어져 있던 그의 양손이 아주 빠르게 자신의 멱살을 부여잡고 있던 남자의 목에 정통으로 작렬했다. 보는 사람이 끔찍할 정도의 엄청난 타격음과 연이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크왁!!!”
고스큐 출신 남자는 몸을 웅크리며 자신의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 쥐었다. 그의 입에서는 침이 질질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대로 발을 들어올려 남자의 턱을 걷어 올려 찼다. 무서울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상대의 복부에 연이어 주먹을 꽂아 넣었다. 그 큰 덩치가 완전 ㄱ자로 구부러진다. 너무나도 괴로워서 비명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듯, 고스큐 출신의 남자는 자신의 복부를 부여잡으며 계속 컥컥대기만 하고 있었다. 그의 비틀거리는 다리를 붉은 머리의 남자는 천천히 걸어 넘어뜨렸다. 쿵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며 그 거대한 덩치가 바닥으로 함몰해 갔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쓰러진 상대의 얼굴을 발로 세차게 밟았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너한테 개인적 감정 따윈 없어. 그런데 말야, 난 고스크란 말만 들으면 토할 거 같거든.”
다시 한번 거친 그의 발길질이 그의 얼굴에 작렬했다. 이미 짓밟힌 남자에게 의식은 없다.
“도망이 주특기인 놈들에게 의지해봤자 나오는 것 따윈 아무 것도 없단 말이지. 재수 없게 고스크를 거들먹거리며 떠벌리다니... 딴 건 모르지만 그건 정말 못 들어주겠단 말야.”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렇게 근거조차 희박한 비난의 말들을 내뱉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선 고스큐에 대한 강한 불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슬슬 내 이성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고스큐 출신이라는 저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그러나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내가 나설 이유 같은 건 없지만 상대가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저런 근거도 없는 비난을 쏟는 것을 눈감아줄 정도로 내가 타락해 버린 것은 아니니까.
“이제 자기 과시는 그만하시죠.”
목소리에 한껏 경멸과 냉소를 담아 상대에게 건넨다. 이런 식의 말투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상대가 저런 상대라면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예상대로 붉은 머리의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금새 의외라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마 상대가 여자, 그것도 한참 어려보이는 여자이기에 그럴 것이다.
“...마음 여린 아가씨에겐 너무 잔인한 장면이었나? 미안하군.”
“아뇨. 그것보다 저는 맹목적인 자기 과시를 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기 싫을 뿐이었어요.”
“킥킥, 뭔가 내게 불만이 있는 듯한 말투군. 왜? 내 말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당신이 고스큐에 대해 뭘 안다는 거죠?”
“고스크...?”
붉은 머리의 남자는 전혀 의외의 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반문해 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회색빛 재킷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내며 피식 웃었다.
“고스큐의 팬이셨나?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나는 노골적으로 불쾌함이 담긴 시선을 그에게 보내며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검정색 진(Jean)의 먼지를 털고 허리띠 양쪽으로 채워진 검 피탈 방지 끈까지 팽팽히 줄이고 나서야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문득 주변의 모든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시선을 끄는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도 이 남자의 행동은 그냥 지나쳐 줄만한 것이 아니다.
“사과가 안 먹히나?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왜... 싸우기라도 하자는 건가?”
붉은 머리의 남자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눈매는 전혀 웃고 있지 않다. 그 표정에서 나는 그가 진심으로 사과할 마음 따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사과하세요. 그럼 못 본 걸로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헤에~ 못 본 걸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만. 뭐, 네 허리에 차여있는 그 긴 검부터가 상식으로 이해되는 물건은 아닌데 말야, 용병? 아니면 가드? 그것도 아니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군요. 사과가 싫다면 당신이 한 그 근거도 없는 비난에 대해 설명을 해 보시던지요.”
“근거가 없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 날카로운 눈매를 더 가늘게 뜨며 묘하게 웃었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상대에게 불쾌함을 주는 명백한 조소. 나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만약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저도 납득하고 그냥 물러나겠습니다.”
“좋아, 좋아. 그쪽과 다투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말야. 그래, 혹시 아가씨는 뉴캠베르크 참사에 대해 들어봤나?”
“..........!!”
이 남자, 무슨 생각으로 그 사건을 들춰내는 걸까? 당연히 모를 리가 없잖아. 내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고 싶지 않은 기억, 내 치부가 훤히 드러나는 그 기억이 내 머릿속을 잠식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붉은 그림자를 이끌며 나아간 한 남자의 등, 그의 미소, 그리고 그가 내게 남긴 말. 그 말이 내 머릿속에 갑작스레 울려 퍼져 나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눈치 챘을까?
“분명 2년 전이지? 그 사건이... 혹시 알고 있나? 뉴캠베르크 참사의 생존자는 없다고 하지만 말야, 실제로는 살아 돌아왔던 사람이 한명 있었다는 것을?”
“설마...! 당신이 그...!?”
“어이, 어이. 그럴 리가 없잖아.”
머릿속이 윙윙거린다. 그 때의 일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피를 뒤집어 쓴 채로 내 앞에 서있던 남자. 그 남자의 미소. 흔들리지 않던 그의 굳은 의지의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 해 나는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2년 전 말야, 뉴캠베르크 참사가 일어나던 그 날... 성왕녀가 직접 이끌고 온 고스크의 나이트들 수십 명이 누만 시에 있었지. 그리고 그들은 만났던 거야. 그 지옥에서 빠져나온 한 남자를 말이지.”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그에게 되물었다. 그는 내 반응이 조금은 의아스러운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선의 상징이라는 성왕국 문 팔레스(Moon Palace)... 그리고 그 정의의 실천자라는 고스크(Guardians Of Saint Queen)... 뭐, 특별히 그런 문구들이 아니꼬운 건 아니야. 단지, 그 놈들의 위선과 가식이 구역질나는 것뿐이니까. 그 정의의 실천자란 놈들이 뉴캠베르크 위험을 알리러 온 그 남자를 완전히 무시했거든.”
“...........!”
“쉽게 말해 그 놈들은 북쪽의 마인을 피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시켰다는 거지. 킥킥, 그 때 그곳에 누가 있었는지 아나? 정의를 대변하는 문 팔레스의 위대하신 성왕녀, 그리고 고스크 나이트들의 정점이라는 크레인 레드포트... 그 대단하다는 인간들조차 꼬리를 말고 도망치기 바빴다는 얘기잖아. 그래놓곤 자신들은 정의의 수호자라 외치다니. 킥킥킥, 아가씬 구역질이 안나나? 난 미치도록 속이 메스꺼운데 말야.”
그의 말은 더 이상 내 귀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다. 그 때 그 사람을. 어쩌면 그 사람과 친구? 아니면 형제? 그러고 보니 어딘가 느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그 사람은... 그 살아 돌아 왔다던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간절히 빌었다. 이 정체모를 붉은 머리의 남자가 그가 살아있다고 말해주길. 내 질문에 그는 허탈한 듯 맥없이 웃어보였다. 그의 미소가 너무나도 씁쓸해서 나는 그의 대답을 듣지 않았어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알잖아? 뉴캠베르크 참사의 생존자는 없다는 것을...”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숨이 닿을 듯한 거리까지 다가와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짙은 조소를 머금고는 내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나는 당당하지 못했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 또 이 남자의 시선을 피해버리고 만다. 이번에는 그가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다니.
“뭐, 고스크 녀석들도 죽음은 두렵다는 거겠지. 그래도 너무하는 군.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누만시를 위협해 오는데도 숨죽인 채 애써 외면하고 있다니... 고스크의 높으신 분들도 참 힘드시겠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여파는 점차 확산되어 가, 이제는 내 몸 전체를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분노? 아니, 그게 아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복받쳐 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건 그 분이 내게 남기고 간 열등감. 그래, 그 분이 나에게 준 유일한 것이 이 열등감이란 것을 깨달았을 때도 이런 기분이 들었다. 이 남자에게 나를 조롱할 의도 같은 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 내 의식을 지배하는 건 지울 수 없는 무력감과 그와 동반해 언제나 찾아오는 이 지독한 열등감이었다. 마치 눈물이 흐를 듯 하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낡은 감정들이 지금 내 몸에 다시 흘러들어와 내 머릿속을, 그리고 내 마음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아가씨도 죽음은 두렵겠지... 하지만 이곳에 왔다는 건 그 두려움조차 떨쳐버릴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가...?”
“...........”
필사적으로 참아내고 있다. 사실은 너무나도 치욕스러워 이대로 등을 돌리고 달아나고 싶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그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나에게 들이대었다. 그러니 이 남자가 지금의 내 모습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가 없겠지. 이렇게 심하게 떨고 있는데. 입술을 꽉 깨물며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데.
“킥, 내가 너무 심했나? 미안하군. 아직 어린 친구한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서 한발자국 물러났다. 나도 덩달아 그에게서 한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주위의 시선이 따갑다. 어느 덧 주위가 고요해진 것을 느낀 나는 이대로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주위를 채운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향해져 오는 것 같았다. 온 몸에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에 몸이 휘청거렸다.
‘아직 멀었구나... 이사에리안...’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비틀거리며 이곳을 도망쳐 나가려 했다. 내 기분 탓인지, 아니면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가는 탓인지 출입문까지의 거리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작게 웅성대는 사람들 틈을 헤쳐 나가며 나는 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강해지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인데. 언제나 과거에 얽매여서는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고 만다. 이것이 지금의 나. 예전보다 더 추하고 무력해진 나의 모습이다.
손을 내밀어 문을 잡아당긴다. 아니, 잡아당기려 했으나 낡은 나무판자로 된 문은 삐걱거리며 오히려 내 몸을 밀쳤다. 다리에 힘을 잃고 있던 나는 별로 강한 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어느 덧 거대한 그림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인영이 너무나도 거대해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그 정체를 확인해야만 했다.
“음? 아, 부딪혔나 보군요. 실례했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 자상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왠지 낮이 익어 그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숨이 콱 막힐 듯한 충격이 나를 덮쳐왔다.
“우왓! 이봐요, 키트. 갑작스레 여자 앞에 불쑥 그 얼굴을 들이대지 말라고 했죠! 정말 당신의 인상을 고려하라구요~!”
여자의 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나에겐 그런 건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내 시선은 오로지 내 앞을 가로막은 이 거구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게 새어버려 약간밖에 남지 않은 금발, 예전보다 더욱 깊게 패어진 이마와 양미간의 짙은 주름, 날카롭게 각이 진 얼굴선과 턱선, 붉어져 나온 광대뼈... 비록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어떻게 내가 이 사람을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그런 반가운 마음은 아주 잠시였다. 나는 곧, 내가 처한 상황을 인지하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람들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시 처음 내가 않아있던 자리로 빠르게 도망쳐왔다. 그리곤 테이블을 부여잡으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그는 아직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으니까... 더 이상 연관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저, 실례합니다.”
등 뒤에서 오싹한 기운이 밀려들어온다. 하필이면 왜 나일까? 나는 돌아보지도 못한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자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합석을...”
“아아~ 잠깐 물러나 있어요, 키트! 저 아가씨가 얼마나 놀랐으면 당신을 쳐다보지도 못하잖아요! 여기선 내가 나설테니까.
예의 그 여자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나는 살짝 고개만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한 20대 초쯤의 젊은 여성이었다. 머리에는 흰 두건을 두르고 몸에는 여행자용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다행히 이 여성은 내 기억 속에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 키트는 지금 단독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일까?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싱글벙글거리며 내게 말을 걸어온다.
“잠시면 되요. 우리말이죠, 여기 도착하고 나서 계속 여기저기 주점이며 바며 가게며 다 돌아다녔는데 온통 만원이라서요. 보니까 아가씨도 혼자인 것 같은데 잠깐 합석 좀 할게요~ 부탁~”
여성은 쾌활하게 말하며 부탁한다는 듯이 양손을 합장해 보였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의 미소가 너무 해맑아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와아, 땡큐, 땡큐! 이봐요, 키트. 어서 정식으로 이 아가씨한테 사과해야죠.”
“음, 아까는 정말로 실례했습니다.”
키트는 나를 바라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그저 미안한 표정으로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에게 별달리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아니지, 이 사람은 언제나 겸손하고 정중한 태도로 사람을 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10년이 지났어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잠깐, 10년? 아... 그렇구나, 10년이나 지났어. 이 사람이 나를 보았을 때 나는 겨우 8살짜리 아이였으니 내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질 못하는 것이로구나. 다행, 다행이다.
나는 작게 한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이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제 서야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2미터가 넘는 거구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키트와 그 덕에 그와 대조적으로 작고 가냘퍼 보이게 된 여성. 어찌보면 매우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꽤나 오랫동안 같이 다닌 듯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였다.
“뭐, 어쨌든 이것도 인연이니까 통성명이나 하죠. 나는 샤이니. 샤이니 피브리언츠라고 해요. 이쪽 무서워 보이는 아저씨는 키트 브라이언. 보기와는 다르게 굉장히 순하고 마음 여린 사람이니까 너무 무서워하면 상처 받아요~”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아하하~ 뭘 그리 정색을 하고 그래요, 키트! 농담, 농담이라구요.”
자신을 샤이니라 소개한 여성은 그렇게 쾌활한 웃음소리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는 여행자용 망토를 벗어 곱게 접어 갈무리한 뒤 내 맞은 자리에 앉았다. 키트 또한 다시 한번 나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그녀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어느새 인가 주위는 다시 시끄러워져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웅성거림이 오히려 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아까의 일은 모두 잊어버린 듯, 그들은 제각각 자기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있었다. 샤이니는 어느 덧 다가온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받은 뒤 이것저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키트는 샤이니의 물음에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별달리 음식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듯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고개만 계속 끄덕이고 있었다.
“나 참, 이봐요. 그렇게 고민해봐야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니까요. 애시 당초 여기 누만시로 북쪽의 마인이 남하한다고 했을 때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요.”
“글쎄요. 저는 그래도 겨우 몇 십 명 정도의 규모로 생각했었는데... 이 곳에 있는 인원들은 적어도 몇 백은 될 거 같습니다.”
“그럼 더 좋죠!”
샤이니는 팔을 붕붕 흔들어가며 키트의 걱정스런 말에 아무 문제없다는 듯 간단히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걸까?
“북쪽의 마인은 살아있는 재앙!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로부터 원한도 많이 사고 있으니까 당연히 이 정도의 인원은 몰려야 정상이잖아요? 게다가 우리 편이 더 많아졌으니 마음도 든든하겠네. 도대체 뭐가 걱정이예요?”
“제가 걱정하는 건 쓸데없이 피해가 커지는 겁니다.”
“아아~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도 몰라요? 당장은 몰라도 이 사람들 중에 우리에게 도움이 될 사람들이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게다가 이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여길 왔겠죠.”
“하지만 이들은 정규군이 아닙니다. 단합된 힘이 필요한 이 시기에, 이들은 목적도 또 싸우려는 이유도 모두 틀리기 때문에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나중에 고민해도 된다니까요! 일단 먹어요, 먹어!”
샤이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진 음식들을 키트에게로 밀어주며 그렇게 말했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미루어 볼 때, 이들 역시 북쪽의 마인이란 이름에 끌려 이곳에 온 듯싶었다.
북쪽의 마인. 살아있는 재앙이라 불리는 자. 그가 이곳 누만시로 남하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 달 전 가량부터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소문이다. 여기에 이만한 숫자의 가드(Gaurd), 용병(Soldier)들이 모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에게 걸린 현상금이 얼마며, 그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이 도대체 얼마나 될지. 개중에는 그 어마어마한 현상금 탓에 충분히 목숨을 걸어볼 일이라 생각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 덕분에 이 곳 누만시는 때 아닌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분명 국왕 명령으로 누만 시민 모두는 인근의 헬스팅 마을로 피난길을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각 주점 및 가게, 바의 마스터들은 자리를 비우지 않고 상인으로서의 투철한 직업 정신을 보여 주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거리가 너무 한산하여 으스스했었는데, 성문에서 가장 가까운 가게에 불이 켜져 있어 들어가 보니 그 안은 정말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온통 신경이 곤두서있는 용병들, 가드들, 마도사들이 그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 곳 뿐만이 아니라 누만시 곳곳에 있는 모든 가게들이 마찬가지였다. 그 안을 채운 이들은 모두 북쪽의 마인에게 용무가 있어 온 이들일 것이다. 결국 나는 수십 차례나 발걸음을 돌린 뒤에야 이 변두리의 조그만 가게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음식 맛도, 또 가게 환경도 썩 별 볼일은 없지만 이 가게 또한 붐비고 있다. 그러니 이들이 나에게 합석을 제의한 것도 의아해 할 일은 아니다.
“으~ 그나저나 이 가게 굉장히 어두침침하네. 너무 비좁고, 요즘 시대에 우중충하게 나무로만 내부 인테리어를 하는 경우가 어디 있어. 나 참, 나 같으면 바닥은 대리석으로 쫙 깔고 저 어두침침한 마법등도 다 떼고 형형색깔 마법등으로 확 바꿔버리겠다. 으웩~ 천장에 거미줄이...! 맙소사~~~~”
샤이니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둥근 나무 테이블을 두드리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말라보여서 별로 식욕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고기를 우걱우걱 뜯는 모습을 보니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별로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그런 쪽으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샤이니는 매우 시장했는지 바쁘게 음식을 먹으면서도 계속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무슨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어어? 저 인간은...? 제, 제인트잖아???”
그녀의 눈이 동그래진다. 나 또한 그녀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겨 보았다. 그곳에는 아까 전의 나와 잠시 마찰이 있었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깐 전에는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이 엎어져 매우 지저분했었는데, 언제 치운 것인지 그의 주위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던 그 남자를 비롯하여 그 다툼의 흔적들이 이미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그 또한 테이블에 몸을 기대어 앉아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다시금 아까의 기억이 떠올라 살짝 몸이 떨렸다.
“저 사람을 아시나요?”
나는 치밀어 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샤이니에게 물었다. 샤이니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붉은 전갈의 붉은 머리 제인트하면 용병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니까요. 뭐, 그냥... 얼굴만 아는 정도랄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샤이니는 힐끔힐끔 그 제인트라는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뒤로도 한참을 먹은 후, 물을 마시고 냅킨으로 가볍게 입을 닦은 후에야 식사를 끝내었다.
“아, 배부르다. 이제야 살 거 같네.”
샤이니는 그렇게 말하며 키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키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진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않고 있었다. 샤이니는 그런 그가 불만스러운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나 참, 나이가 들면 느는 게 걱정이라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그렇게 고민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아... 음, 미안합니다.”
“미안할 거까지야 없지만 말예요, 사람이 먹을 때는 먹어야죠.”
“글쎄요... 별로 식욕이 나질 않는 군요.”
“도대체 뭐가 문젠지...”
샤이니가 가슴을 탕탕 치며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키트는 그 불만스러운 중얼거림이 자신에게 하는 질문으로 들은 것인지 정색을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꽤 심각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어째서 문 팔레스가 움직이지 않는 것인지... 이런 경우를 대비해 고스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인데... 카스하(KasHa) 또한 마찬가지로 내전 탓에 발이 묶여있고, 다른 나라들도 이 일에 관해선 그저 침묵만 하고 있을 뿐이니... 이 문제가 오늘 내일 버틴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
“그렇긴 한데요... 아아! 정말 북쪽의 마인이 마음먹고 남하하면 다음 피해자는 자기들이라는 걸 모르나!”
샤이니는 답답하다는 듯이 외치고는 모든 게 귀찮다는 듯 테이블에 푹 하고 엎드려 버렸다. 그래, 키트의 말대로 아마 고스크는 앞으로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문 팔레스의 10개의 기둥, 10인의 영주(Lord)들을 경계하기 바쁠 테니까. 충성의 징표도 받지 않은 채로 무책임하게 사라져 버린 성왕녀 탓에, 고스크는... 크레인은 또 한번 불명예를 안게 되더라도 결코 문 팔레스를 비워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고스큐가 움직일 수 없는 이유.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 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 정도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때였다. 갑작스레 오싹한 느낌이 내 전신을 덮쳐왔다. 그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금새 가게 안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란이 가게 안을 채워가고 있었다.
‘엄청난 요기다!’
목이 바싹 마를 정도의 거대한 요기. 그것을 느낀 나는 침을 삼키며 키트와 샤이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도 이미 이 거대한 요기를 느꼈는지 표정이 모두 굳어져 있었다. 샤이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키트에게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키트... 우리가 이곳에 온 다음에 분명 성문이 폐쇄되었었죠? 누가 우리를 따라온 것 같지도 않았는데...”
“예, 그리고 이 요기는 아마 인간의 것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혹시 그가...”
키트 또한 긴장감이 베어있는 목소리로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의 넓은 등에 메여 있어 오히려 작아 보였던, 그러나 결코 작지 않은 배틀 엑스를 뽑아 들었다. 그의 큰 손아귀에 쥐인 배틀 엑스의 손잡이에는 형형색깔의 보옥(寶玉)이 박혀있었다. 아... 그래, 분명 키트는... 마법사였었다. 정말, 도끼를 휘두르는 마법사라니. 키트의 이 거구 탓에, 그리고 그가 들고 다니는 무기 탓에 사람들은 종종 키트가 마법사라는 것을 망각해 버리곤 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정체불명의 거대한 요기는 점차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재미있군. 벌써 북쪽의 마인이 움직이는 건가?”
어느 사이엔가 우리 쪽으로 다가와 있던 제인트란 남자가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양 손에 각각 검과 도를 들고 있었는데, 이미 싸울 준비를 다 마쳐놓은 듯 매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샤이니는 그의 말을 듣고 더더욱 호들갑을 떨었다.
“버, 벌써!? 와앗, 이쪽은 전혀 준비가 안 되었는데...!”
“북...쪽...의 마인...의 요기...가 겨우... 이 정도...일리...가 없다...”
어딘가에서 마치 녹슨 쇠로 벽을 박박 긁는 듯한 느낌의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특이한 목소리와 말투의 주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왼쪽 눈을 가릴 정도로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보라색 면사로 얼굴을, 보라색의 로브로 비쩍 마른 몸을 감싸고 있는 아주 특이한 모습의 남자였다. 무엇보다 특이한 건, 로브 바깥으로 나온 그의 깡마른 목과 팔, 면사로 가려지지 않은 얼굴 부분이 전부 기괴한 문신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카락 밖으로 드러난 그의 오른 쪽 눈은 흡사 뱀의 눈을 닮아 있었다. 매우 기분 나쁜 눈빛이었다.
“물...러... 나라...”
그는 다시 한번 쇳소리같은 그 탁한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하고는 양팔을 들어올리며 몸을 기괴하게 틀었다. 잠시 후, 온 몸을 비튼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의 몸에서 가게 바깥쪽에서 밀려오고 있던 정체불명의 요기와 맞먹는 요사스러운 기가 풍겨져 나왔다.
“안브로저드의 주술...? 저 남자, 위험하군.”
키트의 중얼거림이 들려오고, 또 곧이어 그의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들 벽쪽으로 물러나시오! 위험합니다!!”
그의 외침에 따라 가게 안에 있던 모두가 우르르하는 소리를 내며 양 벽 쪽으로 분주하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가게 중심에는 주술을 시전하고 있는 기괴한 모습의 남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괴로운 듯 비틀비틀 거리며 한발 한발 앞으로 발을 떼어 놓더니 갑작스레 팔을 쳐들고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점차 그의 문신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어 마치 그의 몸이 불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 빛이 강해질수록 요사스러운 기운이 점차 강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문득 키트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아아, 여전히 상냥한 사람이구나. 예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어. 내 앞을 가로막고 선 그의 넓은 등은 그렇게 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크아아아악!!!!”
주술을 시전하던 남자는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손을 내뻗었다. 순간, 엄청난 양의 빛이 내 눈을 강타했다. 그 강렬한 빛에 눈을 질끈 감아버린 나는 연이어 들려오는 엄청난 폭음에 귀도 틀어막아야만 했다. 그 주술의 여파로 벽면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는지 돌가루와 흙먼지가 휘몰아치며 내 몸을 덮쳐왔다. 키트가 앞을 막아주고 있기에 큰 충격은 없었지만, 그 기괴한 남자는 정말로 엄청난 파괴의 주술을 시전해 버린 것 같았다. 한 차례의 폭음과 먼지바람이 더 휘몰아쳐 온 뒤에야 점차 시위가 조용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살짝 눈을 떠본다. 아까 전 강렬한 빛의 자극 탓으로 시야가 조금 희미했지만 사물이 식별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주변에 흙먼지와 연기가 계속적으로 피어올라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벽면은 산산이 부서져 나가고 없었다. 그 앞에는 어느새 깊게 내린 어둠에 물든 하늘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주술사가 상대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날려버린 것일까?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 먼지가 조금 걷히고 나야 상황이 정리될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모두들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렇게 모두가 잠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어디에선가 걸걸하고 호탕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이런. 안브로저드라니. 대단한 환영식이군, 에드워드. 우리는 그저 길을 지나가고 있던 것뿐이었는데.]
“아아, 그래...”
연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앳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상한 건 분명 들려온 목소리는 두 개인데 점차 드러나고 있는 그림자는 하나뿐이란 것이었다. 어디엔가 또 다른 누가 숨어있다는 건가? 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허리에 메여있는 검의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이대로 힘을 주면 검집이 열리며 바로 검을 뽑을 수 있게 되어있다. 검신의 길이가 내 키에 달할 정도로 길기 때문에 이런 식이 아니면 발검 할 수 없는 특수한 검이다.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눈에 힘을 주어 다시 한번 그 그림자를 주시한다. 동시에 주변의 인기척도 살핀다. 또 다른 존재가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변의 연기가 걷히며 상대의 윤곽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 때 또다시 그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환영식을 받았으면 자기소개를 해야 하잖나, 에드워드? 모두들 너에 관해 궁금해 하고 있는 듯싶다.]
“그런가...”
내 눈이 크게 떠졌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의외로 앳되어 보이는 금발 머리의 소년이었던 것이다. 비록 눈 밑으로부터 목 부분까지 붕대로 칭칭 감싸 놓았지만, 그의 눈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얼굴선은 그가 아직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오른 손에 사람 크기에 달하는 엄청난 대검을 들고 있었다. 결코 소년이 들기란 불가능해 보이는 엄청난 크기였다. 검의 모양도 그렇지만... 더더욱 놀라운 건 검에 사람의 눈알이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듯, 그 눈동자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더더욱 소름 끼쳤다. 검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순간, 그 소년의 눈과 나의 눈이 순간적으로 마주쳤다. 붕대의 가려져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이름은 에드워드 그로니스...”
그의 눈을 본 순간, 난 나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에서 힘을 풀어버렸다.
“...북쪽에서 왔다.”
드디어 1편을 썼습니다. 하아~ 에르페란이 너무 우울한 캐릭터라서 글을 쓰기가 힘들군요. 어쨌건 즐겁게 읽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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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북쪽의 아저씨가 너무 빨리 나오면 매력이 떨어지는 듯.
헤에, 새 글이네요. 기대할게요. 조금 길긴 하지만서도.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