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의 뜻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루카5,33)
여기서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라는 표현은 공관 복음의 병행 구절(마태9,14; 마르2,18) 중에서 루카 복음에만 나온다.
'자주' 라고 번역된 '퓌크나'(pykna; often)은 '밀도가 높은', '빽빽한', '빈번한' 이란 뜻이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일주일에 두번씩 (루카18,12),
즉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것으로 여겼던 목요일과
산에서 내려온 것으로 여겨졌던 월요일에 정기적으로 단식하였다.
이만큼 당시에 그들은 엄격한 금욕생활의 일환으로 정기적인 단식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율법은 유다력으로 7월 10일, 즉 속죄일에만 단식(고행)하라고 명했다(레위23,27).
그러던 것이 바빌론 포로 이후에는 1년에 4번이나 단식하는 날이 생겼고(즈카8,19), 그후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계속해서 존경을 받고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서 율법에서 정한 것보다 횟수를 늘려 단식하는 열심을 내보였다.
이러한 이들의 단식은 순전히 인간적인 뜻과 규칙 속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루카18,12; 마태6,16).
그러나 단식은 본래 인간적인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표지이다.
하느님을 전적으로 섬긴다고 하면서 자꾸 인간 중심의 종교로 만드는 그런 행위들은 하느님을 만나는 데 장애가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해악이다.
본절에서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는 원문에
'네스튜우신 퓌크나 카이 데에세이스 포이운타이'(nesteuusin pykna kai deeseis poiuntai;often fast and make prayers)로 번역이 되어 있다.
여기서 '기도'에 해당하는 '데에세이스'(deeseis)는 명사 '데에시스'(deesis)의 목적격 복수이다.
'데에시스'는 공관복음에서 루카만이 사용한 용어인데 (루카1,13; 2,37; 5,33),
유사어 '프로슈케'(proseuche)와는 약간 다르다.
'프로슈케'는 기도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용어이며, 주로 하느님께만 드리는 헌신적 요소를 갖고 있는 단어이다.
반면에 '데에시스'는 주로 단식을 동반한 기도를 나타내는 용어이며,
개인적 가난을 표현하며 그 대상이 사람인 경우에도 탄원의 의미로 쓰였다.
이런 차원에서도 그들의 단식은 인위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되었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에게 단식은 '경건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속죄일과 같은 범국민적 단식의 날 이외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다.
그들은 겉으로 보면 굉장히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선을 가장한 위선자들이며 그들의 단식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았다.
단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왜 단식을 하는가?
식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따라서 식욕은 참으로 억제하기 힘들고 어렵다.
단식은 바로 이러한 식욕을 억제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절제하고 자신의 마음을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맞춘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의미의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절제하고, 하느님의 뜻을 좇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서 58장 6절과 7절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이런 구제와 애덕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도리어 과부의 가산을 등쳐 먹고(루카20,47) 단식을 하느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 위선적으로 행했다(마태6,6).
따라서 주님은 이러한 바리사이들의 단식 행위와 관련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마태5,16) 라고 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단식의 진정한 의미가 자신의 세속적인 욕망을 절제하고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데 있음을 알고,그 단식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할 것이다.
이기적이고 본성적인 생활,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사는 생활,애덕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을 하면서 단식을 해봐야 그 단식 행위와 기도는 하느님께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갈라티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9가지 중에서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져야 하는 열매인 성실, 온유, 절제가 있는데, 이 절제가 9가지 열매 중의 최고봉이요, 가장 높이 평가해야 할 덕행임을 알아야 한다.
체질적으로 조금만 먹어도 살이 찌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비만으로 말미암아 자타가 불편한 경우에는 과감히 절제의 수련과 수양을 닦아야 한다.
왜 뚱뚱한가? 많이 들어 갔으니까 뚱뚱한 것이다.
풍선도 계속 불어 바람이 들어가면 터지는 것이다.
북한 주민들을 보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라.
못 먹었느니까 피골이 상접한 것이다.
아주 단순한 논리이다.
조금 덜 먹고 소식하며, 빨리가 아니라 천천히 꼭꼭 씹어서 사람의 위(胃)가 할 일을 입이 대신 하면 포만감 때문에 평소보다 덜 먹게 되어 있다.
그리고 본인의 관심사가 오로지 육의 양식과 미식과 식도락인지~~
아니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처럼 영의 양식을 많이 도모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의 40주야 단식에서 분명히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6장 20절에서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모든 싸움에서 다 지는 것이다.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이성으로 다스려야 하고, 그것도 그리스도인들은 말씀과 성령의 빛, 신앙의 빛을 받은 올바른 이성으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조절해야 진정한 신앙인인 것이다.
영이 육을 다스려야지, 영이 육을 따라 끌려가면, 그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께서 피로서 구속하신 하느님의 자녀이기를 포기한 영적 전쟁의 낙오자요, 패배자인 것이다.
적게 먹고, 참고 인내하는 것도 배우면서, 그것을 죄보속과 다른 이들을 살리는 희생의 제물로 봉헌도 하고, 덜 먹고 덜 입고 하는 것을 모아 모아서 나누어 줌으로써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형제, 자매들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면 좋겠다.
내가 번 돈,내가 가지고 있는 재화로 내가 먹고,내가 쓰고,내가 현세적이고 인간적 기쁨을 누리는데 누가 나에게 잔소리를 하고 나의 삶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냥 이대로 놔 두세요.
먹고 죽은 귀신 땟깔도 좋다는데?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것은 인간이 다 누리고 즐기고 먹으라고 준 것인데 왜 금욕적인 자세로 살라고 강요하는가?
이런 논리를 가지고 대들 수 있고 자신을 합리화, 정당화, 미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말하는 수덕생활과 구원에 합당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나는 물질이 풍부한 미국의 뷔페 레스토랑에 가끔 가서 보면, 참 느끼고 묵상하는 게 많다.
"아~~~사람이기를 포기한 사람이 참 많구나."
그들의 몸 자체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통제 불가능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저 보기에 딱하고, 불쌍한 정도를 넘어 안됐다는 생각과 더불어 내 숨마저 찰 정도이다.
그들 안에 있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니며, 식탐의 마귀가 그들을 끌고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발견한다.
첫댓글 아멘.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