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2)-1
왕비암살 계획
갑신정변에서 살아남은 박영효가 조선에 돌아온 목적은, 조국의 독립이었다. 그 무렵의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행동목표로, 청국과 싸우고 있었다. 박영효는 일본을 후견으로 권력을 잡았으나, 그 후 그의 언동에는 이것저것 보신의 면이 두드러진다<먼저 권력의 유지가 첫째. 권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일본이 주장하는 “조선의 독립”이 원칙이라는 것을, 10년의 망명생활을 겪은 박영효는 알았을 것이다. 그것을 알았으면, “조선의 독립”다음에는 일본의 지배력과 대결하는 날이 온다는 것도 알아야 했겠지만, 그는 거기까지의 엄중한 각오가 있었을까----.
3국 간섭 후, 일본과 특수한 관계가 있는 박영효는 각료 중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가 정계에 되돌아온 것은 일본의 지원에 의한 것이지만, 동시에 민비의 보이지 않는 조력에 힘입은 바도 컸었다. 정세의 변화 속에서, 그는 일본과 민비와의 사이에 위태로운 밸런스를 잡아 왔으나, 민비가 그 목표를 “친러(親露)” “배일(排日)”로 선명하게 수립한 지금에는, 더 이상 밸런스를 잡을 수가 없다. 그가 기댈 곳은 일본뿐이었다.
민비에게 있어서 박영효는 벌서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해가 뜨는 기세였던 일본과의 파이프 역으로 이용하기 위해 한때 호의를 보였으나, 지금은 눈에 거슬리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박영효는 감신정변 때에, 민씨 일족의 멸망을 계획했던 한 사람이다.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해 내어 죽인 것과 같이 어쩌면 박영효도----라는 생각을, 민비는 마음속에 묻어두고 있었다.
민비의 복수심을 박영효는 알아차리고 있었을까----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민비를 중심으로 하는 왕실의 친러 정책을 탐지하여, 그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일본과의 관계를 굳히기 위해서이나, 또한 일본 측과 협력하여 민비 일파의 모략을 견제할 목적도 있었다. 박영효는 조선이 러시아와 맺어지는 위험을 말하고 있으나, 그 위에 러시아의 세력 하에서는 정계에서 살 수 있는 길이 끊기는 것이다.
당시, 왕실 경호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미국 군인이 훈련한 시위대(侍衛隊)이며, 고종은 그 교관 제너럴 다이를 신뢰하고 있었다. 내각은, 이 시위대와 일본 군인이 훈련한 훈련대를 교체시키는 안을 거론하고 있었으나, 이것을 주장하고 추진한 것은 내부대신 박영효다. 그는 이것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궁정 내에 미치게 하고, 또 왕실과 러시아 등 외부와의 접촉을 감시 시키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부의 이 안건은 매양 일본의 내정개혁에 의한 방식으로, 왕의 재가를 받들어 허가가 되었다.
담당대신으로부터, 왕궁경호대 교체의 실시를 들은 왕은 노기를 띤 격렬한 어조로 이를 거부했다.
「그것은 짐의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이제까지와 같이 시위대가 경호하도록 하라.
이 건이 이미 “재가 필(畢)”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작년(1894년) 6월(음력)이래의 칙령(勅令)이나 재가사항은, 하나도 짐의 의사에 근거를 둔 것은 없다. 이번의 위병 교체는 물론, 전부를 취소할 생각이다」
왕의 말은 민비와 러시아공사의 사전계획이라고 알려져 있다. 임금의 결단 뒤에 민비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있는 상례다.
공공연한 자리에서 없었다고는 하지만, <작년 이래의 내정개혁은 일본의 강압 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왕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기 때문에, 전부 취소할 생각>이라는 내용의 왕의 폭탄선언은, 박정양 내각이 실각하는 원인이 된다.
이 사건은 일본 측에도 충격을 주었다. 스기무라 준(杉村 濬)대리공사는 조선정부 내에서 고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일본인을 모아 긴급 비밀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박정양 내각의 연명을 계획하고, 친일파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것 등을 결정했으나, 왕 부처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저지할 묘책은 있을 수는 없었다.
위병교체안의 주류였던 박영효는 점점 어려움에 빠졌다. 그는 오직 일본에 의지하였으나, 스기무라 대리공사의 문의에 대해, 일본 체재중인 이노우에 공사는, “박영효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차가운 회답을 내고 있다.
박영효의 복심인 이규완(李圭完), 신응희(申應熙) 등은 그의 어려운 입장을 동정하여, 상심을 위로하고자 초여름 어느 맑은 하루, 한강에 배를 띄우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 일행 중에 일본의 정치낭인 몇 사람이 있어, 취기가 돎에 따라 조선정국의 현상을 통렬히 비판하고, 일본 세력이 쇠약해진데 대하여 비분강개했다고 한다. 있을법한 이야기다.
뱃놀이가 있은 지 며칠 후, 사사키 히데오(佐佐木 秀雄)라는 정치낭인이 친구인 한재익(韓在益)과 만나 필담을 나누었다. 얼마 안 있어, 「어느 일본인에게 들었는데, 박영효 일파는 배위에서 왕비암살음모를 논의하였다고 한다」라고 썼다. 사사키에게 이 말을 한 일본인은 누구일까, 사사키는 어떤 의도로 이 중대한 내용의 “전문(傳聞)”을 한재익에게 써서 보인 것일까. 어디에도 명확한 설명은 없다. 이 부분이 일체 밝혀지지 않은 것은, “박영효 재 망명사건” 배후관계의 복잡성을 말해주는 것일까.
한재익은 사사키와의 필담종이를 가지고 궁내 특진관인 심상훈을 찾아가, “박영효의 음모”를 알렸다. 심상훈은 민비의 “충신”이다. 그는 바로 이것을 왕에게 보고하고, 잇따라 박영효 체포의 하명이 내렸다. 그러나 이 “음모”는 증거불충분으로 비판 받은 것인지, 체포 이유는 「왕궁호위의 미국계 시위대를 훈련대로 바꾸자고 한 박영효는, 임금에 대하여 딴 마음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택에 있었던 박영효는, 동지 한사람의 통보에 따라, 간 일발(間 一髮)로 일본공사관에 피해 들어갔다. 스기무라 대리공사는 그를 숨겨주고, 병사와 순사를 붙여서 인천으로 도피하게 했다.
그들이 남대문을 통과할 무렵에는 박영효 처분의 조칙(詔勅)이 게시되어, 시민들은 일행에게 돌을 던지며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박영효와 일본과의 특수한 관계는 누구나 아는 것으로, 그는 반일경향이 강한 대중으로부터 미움을 샀다.
박영효가 인천에서 재차 일본으로 망명한 것은, 7월7일이었다. 다시 박영효 주변의 친일파 몇 사람이 추방되고, 그들을 대신하여 친러파, 친 구∙미파 사람들이 등용되었다. 일본세력의 추방을 꾀하는 러시아공사와 민비의 “박영효 처분”은 성공했다. 그녀에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박영효를 처형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일본, 러시아 등 각국의 의도가 뒤얽혀, 정쟁, 당파싸움이 그치지 않은 이 무렵의 조선에서는, 실로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의 음모에 관련되고 있었다. 사건은 연이어 일어나고, 어떤 사건도 배후관계는 아주 복잡하다.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 2가지 사건이 이면에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동지라고 생각했던 2사람이 실은 구적이이기도 하여, 진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박영효에 있어서도, 「민비의 모략에 의한 “억울한 죄”로 의심 받는다」 「손자의 사건으로 박영효에 한을 품고 있던 대원군의 음모였다」와 같은 「무죄설」과, 사건이 있은지 거의 10년 후에 일본에서 박영효를 만난 한말 독립운동가 이탁(李拆)이 당시의 사건을 묻자, “유길준(兪吉濬)을 과신하고 우리 계획의 일부를 이야기 했는데, 그가 그것을 왕에게 밀고했기 때문에 조국에서 쫓겨났다.”는 「유죄설」 같은 것이 있다. 유길준은 일본에 유학한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사건 당시에는 내부협판이었다.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는 냉대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일한병합”후 일본정부로부터 후작(侯爵)에 서위(敍位)되었다.
이해 여름, 대원군은 한 가지 사건을 일으켰다. 교동도(喬桐島)에 유형된 이준용을 걱정하여 몸도 여윈 느낌으로 그는, 마침내 손자에게 가려고 운현궁을 빠져나왔으나 한강 강안에서 배를 타기 직전에 잡혀, 공덕리라는 한촌의 쓸쓸한 별장 아소정(我笑亭)으로 보내져, 감시를 받으면서 지내는 몸이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권력에 집착 하는 개성이 강한 정치가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고, 손자사랑에 신상이 위험한 것조차 돌아볼 여유를 잃은 노인의 비애만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