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일부터 2박 3일 동안 대전장애인고용촉진공단 직업능력개발원에서 열린 아홉 번째 전국장애인운동활동가대회. 매년 꾸준히 참가자가 늘면서 그만큼 새로운 얼굴도 늘어나고 있다. 오랜 시간 시설에서 살다가 탈시설한 이들도 있고,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통해 탈시설-자립생활 이념을 접하며 장애인인권 운동에 관심이 생겨 참가한 이들도 있다.
올해 활동가대회엔 어떤 이들이, 어떤 까닭으로 참여하게 됐을까. 각지에서 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경남 진주 참샘중증장애인자립생활센터 강은경 소장
강은경 소장(29세, 뇌병변장애)은 활동가대회에 올해 처음 참가했다. 올해 소장이 되면서 견문도 넓히고 권익옹호 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기 위해 경남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활동가들과 함께 왔다.
강 소장은 작년부터 진주에서 저상버스 타기 운동을 하고 있다. 강 소장은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인식은 많이 좋아진 것 같다”라고 지난해 시작한 저상버스 타기 운동에 대해 평했다.
“장애인콜택시(아래 장콜) 놔두고 왜 굳이 저상버스 타려고 노력하는지 이해 안 간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때마다 이야기해요. 장콜은 장애인만 타는 건데, 이건 일정한 분류가 있잖아요. 탈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버스는 아무나 탈 수 있어요. 장콜은 늘리는 데 한계가 있지만 저상버스는 100% 도입하면 비장애인, 아이, 노인 모두에게 좋고 모두가 탈 수 있어요.”
저상버스 타기 운동을 시작한 지난해,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과 함께 30분, 1시간을 기다려 버스를 탔다. 처음엔 버스 타는 것을 두려워했던 이들이 이젠 “나도 한번 타볼래”라고 먼저 말한다. 그리고 버스를 탈 때마다 휠체어 리프트가 잘 내려오는지 등 ‘기계 점검’하는 효과도 가질 수 있다. “기계 고장 났는데 왜 타려고 하느냐”라며 면박 주던 운전기사분들도 이젠 기계 고장 난 것에 대해 먼저 미안해하는 등 사람들 인식 변화도 보인다.
강 소장은 장콜에 대해서도 말했다. 진주시의 경우, 현재 운행되고 있는 장콜은 22대로 법정대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여기에 진주 지역만의 특성도 작용한다. 거창군 등 큰 병원이 없는 인근 지역에서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교병원에 왔다가 다시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갈 때는 진주시의 장콜을 이용하게 된다. 그런데 진주 장콜이 다른 지역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장콜 대기시간은 오래 걸리고 그만큼 진주 시내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장콜 대수는 줄어든다.
“예를 들어 22대 중 6대가 나가면 진주시 내 장애인들은 나머지 16대로 써야 하는 거죠. 거제시에 사는 장애인이 경상대병원 왔다가 거제로 돌아간다고 하면, 거제까지 2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그러면 왕복 4시간. 그만큼 대기시간은 길어지고.”
그래서 장콜 대수 확보와 함께 현재 2교대로 운행되고 있는 것을 3교대로 바꾸는 요구도 하고 있다.
“진주시 장콜은 현재 2교대로 이뤄져 있어서, 점심시간(낮 12시~1시)과 교대시간에 운행이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창원은 3교대로 점심시간이 없어요. 장콜 대수 늘리고 3교대로 바꾸는 게 목표에요.”
△강원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빈운경 활동가
올해 활동가대회 참가가 두 번째인 빈운경 활동가(25세, 뇌병변장애)는 “개인적 연대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빈 활동가는 자립생활을 원하고 있으나 현재 부모님의 반대로 좌절된 상태다.
빈 활동가가 자립생활 의지를 밝힐 때면 그의 부모님은 “네가 무슨 자립이냐. 나가서 어떻게 사느냐”라며 만류한다. 부모님의 만류에 빈 활동가는 자립생활하여 독거특례로 활동보조 시간을 많이 받으면 된다고 답하지만 부모님 입장에선 ‘어림없는’ 이야기다.
“센터도 활동보조 중개기간이니깐 자립해서 활동보조 시간 많이 받으면 센터에도 도움되고 좋잖아요. 이런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가 ‘그게 도움이 돼봤자 얼마나 되겠느냐. 활동보조인도 사람인데 네가 아무리 시간을 많이 받아도 누가 주말에 와서 하겠느냐. 결국엔 엄마, 아빠 손길 간다. 그게 더 귀찮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확실히 자리 잡아서 경제적 자립 할 때까지 자립은 생각하지 말라고 하세요.”
그리고 부양의무제도 걸린다. 설령 집을 나온다고 해도 부양의무제 때문에 빈 활동가는 수급비를 받을 수 없다.
턱없이 부족한 활동보조서비스 시간도 난관이다. 현재 빈 활동가는 복지부에서 주는 128시간에 시 추가 50시간을 포함해서 한 달 총 178시간을 받고 있다. 그러나 뇌병변장애 1급의 빈 활동가에겐 잠자는 시간 빼고 모든 일상에 활동보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활동보조 점수를 책정하는 복지부의 인정조사표는 ‘할 수 있다/없다’ 식의 단답형이라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지만 어쨌거나 혼자 할 수는 있는’ 빈 활동가의 입장에선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할 수는 있는데 시간이 엄청 오래 걸려요. 저녁 약속이 있으면 아침부터 준비해야 해요. 주중에 하루 8시간 정도 활동보조를 이용하니깐 주말엔 못 써요.”
활동보조 시간 때문에 2박 3일의 활동가대회도 빈 활동가는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오고 싶었다. 빈 활동가는 활동가대회에서 “사람에 대한 문화적 감수성과 다른 장애에 대한 감수성을 배운다”라고 답했다. 이번 활동가대회 일정 중에선 박주민 변호사의 형사법 강의가 특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집회 현장에서 ‘내가 전경을 때렸나?’ 할 때가 있어요. 그때 많이 당황했는데 투쟁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대처법을 배울 수 있어 좋았어요. 그리고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되면 이걸 어떻게 다 감당하느냐’고 이야기하는 친구들한테 반박할 수 있는 것도 배우고.”
빈 활동가는 종종 “이렇게 투쟁을 계속 하다 언젠가 우리가 진짜 바라는 유토피아가 오면 지루해서 어떻게 살지”하는 상상을 한다고 한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이뤄져 있는 현재의 삶을 차별 없는 사회로 변화시켜서 “즐거운 투쟁”을 더는 할 필요가 없게 되는 날이 오면, 비장애인과 같은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정말 어떨까.
“아이러니하죠. 그게 혼란스러워요. (웃음)”
△ 김홍기 씨
“활동보조가 있었으면 시설에 안 갔을 텐데, 활동보조가 옛날엔 없었으니깐…….”
김홍기 씨(53세, 뇌병변장애)가 26살이던 1986년,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김 씨를 돌볼 이는 형밖에 없었다. 결국 김 씨는 음성 꽃동네로 들어가야 했다. 그곳에서 스물다섯 해를 살다 2011년 1월, 청주 다사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을 통해 탈시설했다. 그러나 김 씨에게 청주는 ‘답답한’ 곳이었다. 밖에 나가도 갈 곳이, 오라는 곳이 없었다.
“집에만 있으니 시설과 다름없었어요.”
그래서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는 그가 음성 꽃동네에 살 때 함께 지냈던 윤국진, 박현 씨 등 동료가 있었다. 그러다 결국 지난 6월 20일, 마침내 서울로 옮겨왔다. 시설에서 나와 청주 체험홈에 산 지 18개월이 지나서였다.
김 씨는 시설에서 함께 살았던 윤국진 씨가 지역사회에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고 한다. 집회에도 나가보고 싶었다. 시설에 있었을 때부터 청주에 살았을 때도, 큰 집회가 있으면 부러 가기도 했다. 처음 참여했던 집회는 2010년도 부산에서 있었던 집회였다.
“아, 이게 뭐야. 좋아, 좋아!”
처음 집회에 참여했을 때의 느낌을 물으니 감탄에 젖은 듯 김 씨는 답했다. 그런데 한편, “왜 우리 요구를 안 들어줄까”하는 생각에 그 현장이 마음 아프기도 했다.
서울 온 지 두 달, 이사하면서 지역을 옮기느라 지난달엔 활동보조 시 추가분이 적용되지 않아 활동보조 시간이 부족해 노들장애인야학에 등록을 해놓고도 다닐 수가 없었다. 김 씨는 현재 복지부에서 주는 370시간에 이번 달부터 서울시의 추가 지원을 받아 580시간을 받는다. 청주에서 살 때는 510시간이었다. 지역마다 추가 지원 양이 다르니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활동보조 시간에 차이가 생긴다.
김 씨는 현재 탈시설 장애인들이 만든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미 한 차례 음성 꽃동네에 방문해 인권교육을 비롯해 탈시설-자립생활의 삶에 대해 알렸다.
“우리나라에 체험홈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나오고 싶은 사람들은 다 나와야 해요.”
그리고 바람이 있다면, “부모 없는 장애인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자신처럼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시설에 보내지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한 자신은 ‘다행히’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수급비를 받을 수 있지만 부모가 있어 수급비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부양의무제가 빨리 없어졌으면 한다”라고도 말했다. 단 한 차례 가본 광화문역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장에 놓인 영정 사진들이 김 씨 마음에 아프게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