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거리 소나무
김 홍 우
동짓달 한풍을 붉은 생채기투성이로 맞고 서 있는 모습이 처연하다. 서슴없이 위아래로 잘려 나간 가지마다 핏물이 밴듯하여 애처롭다. 한마디 위로의 말을 키 동무하여 건네줄 이 아무도 없고 생기 잃은 파리한 잎에 머무르지 못하는 바람만이 휑하니 상처를 덧내고 달아날 뿐이다.
소나무 한 그루가 육거리 시장 입구에 서 있다. 전봇대같이 껑충한 키다. 다른 나무는 보이지 않고 무심히 물끄러미 홀로 서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치고 하늘로 솟구치며 땅으로 드리웠을 무성한 가지가 잘려 나간 무참한 꼴이다.
소나무는 마치 반정을 꿈꾸다 역적이 된 우국 충신이 포승 되어 유배지로 떠나는 수레에 덜컹덜컹 실려 가는 것처럼 끌려 왔을 것이다. 어느 날 청천벽력으로 가지가 잘리고 뿌리가 뽑혀 꽁꽁 포박된 채로 푸른 산과 맑은 물을 뒤로 하고 떠나왔을 것이다.
겹겹이 결박된 몸으로 어두운 밤이 지나고 오한과 갈증에서 깨어나 희미하게 눈을 떴을 때 사위는 사뭇 낯설었다. 부모 · 형제와 친구들이 둘러서 있는 숲이 아니고 산골 물소리와 산새 소리 들리는 산이 아니었다.
투박하고 빼곡한 회색 괴물들이 앞을 막아섰고, 철갑 상자들은 끊임없이 괴성을 지르고 매연을 뿜으며 지나쳐 갔다.
소나무는 솔잎을 베고 누운 솔 씨가 솔바람에 귀를 열고 솔가지가 떨구어 준 이슬방울에 눈이 씻기어 움이 트고 자랐을 것이다. 밝고 따스한 햇볕과 갈잎 솔잎의 시원한 바람과 살랑살랑 물푸레나무의 푸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소나무는 절망했다. 이제는 단란했던 가족 정겹던 친구들과 숲속 이야기 조곤조곤 나누던 풀꽃들과도 영영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몸서리치는 꿈이라고, 꿈이라면 빨리 깨어나기를 바랐다.
사람들의 이기주의가 무섭다. 사람들의 소나무 병이 독하다. 왜 꼭 소나무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동그마니 홀로 서 있는 그 자리에 장수목인 느티나무나 은행나무를 심어도 좋고 사철 푸른 사철나무나 동백나무를 심어도 좋을 텐데 굳이 소나무여야만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소나무 생가지를 이리저리 잘라버리고 전신주처럼 우뚝하게 심어 놓으니 볼 때마다 생경하기만 하고 절로 눈살이 시어진다.
기왕에 나무를 심으려거든 두세 그루 함께 심어 낯선 환경에 서로 의지도 하게 하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덜 안쓰럽게 할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외사랑으로 중증의 소나무 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숲의 일원으로 멀쩡하게 숲을 이루던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베어지고 그 자리에 소나무가 심어졌다. 도회지 도심의 교통섬에도 여지없이 소나무가 심어져 도시 공해에 절며 한데 바람을 맞고 있다.
소나무는 세상 여러 나라 사람들이 드나드는 인천공항에서 반듯반듯 큰 키를 자랑하기도 하고 조성되는 공원이나 신축건물 터에서 우세를 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소나무는 제 살던 곳에서 천수를 누리며 십장생의 꿈을 꿈꾸지 않았겠는가. 사람들이 저 좋다고 도회지 찻길 한가운데로 혈혈단신 맨몸 묶어 붙들어 오는 것은 사납다. 사뭇 낯선 풍경 속에서 심한 소음과 먼지 공해에 시달리는 삶은 끔찍하고 슬프다.
소나무는 잘 자라서 어쩌면 구중궁궐의 기둥이나 대들보 같은 건축재가 되길 선망했을 것이고, 어쩌면 찬장 · 도마 · 목기 같은 식생활 용구가 되어 종가 안주인의 후덕한 삶에 온기를 더하기 바랐을 것이며, 어쩌면 쟁기나 풍구 · 가래 같은 농기구가 되어 사철 부지런한 농부에게 고단함을 덜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소나무는 또 눈 서리 견디며 아름으로 자라 장엄한 모습의 늘 푸른 기상과 곧은 절개, 굳은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고, 때로는 선비의 사랑방 송연묵이 되어 시도 되고 그림도 되고 싶었을 게다. 그러다가 그마저도 아니면 어진 농부의 마지막 길에 동행하는 관이라도 되고 싶고, 영겁으로 누운 촌부의 도래솔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산새 들새 숲으로 드는 저녁, 교통섬에 매인 소나무들이 자신의 처지나 한탄하며 바늘같이 따가운 설움을 속울음 하지나 않는지 .....
육거리 소나무가 한생을 다하는 훗날 아주 훗날에, 눈보라 치는 동짓달 저문 날에 따뜻한 난롯불이라도 되어 타닥타닥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다. 소나무 스러져간 그루터기에 은총처럼 눈이 내려 소복소복 쌓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