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냉담과 어제의 고드름
백인덕
1.
영창映窓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서늘하고 푸른 달빛이 보인다. 까치발로 목을 최대한 늘여 골목 이쪽저쪽을 살핀다. 밤새우기의 한 가운데, 즉 새벽 세 시 무렵은 무엇을 결정하기가 참 애매하다. 서둘러 작업을 마치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첫 발소리가 들리기 전에 잠들 것인가, 독주毒酒를 마시면서 아침 햇살의 나른한 쓰라림을 다시 맛볼 것인지가 그렇다. 무엇보다 겨울에는 한기를 뚫고 부족할 것만 같은 담배나 화요(火堯, 25도 증류주)를 보충하기 위해 집 밖을 나서기가 하염없이 망설여진다. 겨울의 골목은 늘 텅 비었다기보다는 어떤 황량함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황소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을 서둘러 닫고 쓰기에 집중하려 해도 손끝과 달리 혀는 계속 입맛을 다신다. 이미 쓴 불이 목구멍과 아랫배를 지나(?) 머리에 가득 차버렸다. 괜히 창문을 열어 더 창백해지는 달빛을 살피다 기어이 외투를 챙겨 입는다. 냉담冷淡하기 어려운 시간, 아니 그런 나이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섣부른 핑계를 떠올린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허기일까, 춘정春情
의 시작일까, 잘못 든 길의 단순한 공포일지도 모른다.
누가 오지 않아도 저절로 깊어가는 밤은 낮은 곳에서부터
웬 고양이 울음에 찢길 것이다. 모르는 사이, 매장埋葬의 긴
행렬이 폐허를 수놓고 들뜬 상춘객 얼굴 달린 꽃잎보다 넘쳐
도 더는 상상하지 않는다. 그저 모르는 사이일 뿐.
- 백인덕, 「모르는 사이」 부분
차갑게 팽창한 공기, 선명하게 날 세운 불빛들, 아무 움직임이 없는 거리는 곧바로 ‘냉대冷待’를 떠올리게 한다. 그럴 리 없겠지만, 일상에서 잠시 방심하면 나는 순식간에 마치 내가 세상의 중심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한겨울, 한밤중의 거리에도 평소 내가 안이하게 상상하는 것처럼 가로등 아래는 곧 헤어질 듯한 연인이 서 있고, 눈더미 위에는 짓궂은 검은 고양이, 편의점 테이블엔 철학을 할 것만 같은 사내가 앉아있어야 한다. 물론 계산대 아르바이트생은 졸고 있고. 그런 적은 없다, 인용 시처럼 나는 겨울에 찾아오는 냉대의 느낌을 ‘모르는 사이’라는 간단한 관계 정의로 회피하곤 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를 “더는 상상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애초에 모순이다. ‘모르는’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아는’이라는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판정하기 위해 ‘모르는’을 최소한 만나거나 보거나 들어야 한다. 즉 아예 접촉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은 우리 인식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밤의 냉대란 사실 내게는 익숙한 감정이다. 앞 작품은 “누가 오지 않아도 밤은 깊어간다”라는 명제로 시작한다. 한겨울, 한밤중이 냉랭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은 누가 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실 내가 냉혹한 무엇, 혹은 누구를 찾아가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2.
일반 심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백수였을 때도 ‘빨간 날(공휴일)’을 만나면 빈둥거리면서 죄의식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약간 유쾌해지기까지 했다. 비슷하게 ‘방학’이라는 말에 천성인 게으름이 극한까지 치솟아 열흘 가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았다.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낮의 무료함 속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2020년에 개봉한 크리스퍼 놀란 감독의 《테넷》이란 영화를 IPTV로 보았다. 놀란 감독의 같은 계열의 전작들, 《메멘토》,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을 다 보았지만(물론 영화관에서 본 작품은 없다.) 이 작품은 줄거리를 쫓아가기에도 벅찼다. 몇몇 블로거들이 후기 제목을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라고 한 걸 보면 줄거리 이해마저 벅찬 게 나 하나만은 아닌 게 분명한가 보다. 사실, 얼마나 개판인 세상을 물려줬으면 미래에서 과거를 박살 내 세상을 끝장내려고 할까, 미래 세력에 동조하는 심정 때문에 이 개판인 세상을 구하려 노심초사하는 주인공(주도지)의 활약에 공감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복잡한 전개 중에 ‘인버전’을 요약해서 들려주는 ‘휠러’라는 등장인물의 한 마디, “세상이 아니라, 당신이 역행하는 겁니다(You are inverted. The world is not.)”라는 명대사를 건질 수 있었다.
이미지(예전에는 ‘image’와 ‘imagery’를 구분해서 사용했지만 요즘 추세는 이미지가 군집 형태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 것 같다)는 기억의 모사나 재현 그 자체가 아니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었던 것일까, ‘영창’, ‘달빛’, ‘황소바람’, ‘냉대’와 ‘냉혹’은 사실 ‘고드름’을 연상하기 위한 전조前兆였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낙숫물 따위가 밑으로 흘러내리는 도중에 추위로 물이 얼면서 생긴다. 고드름은 얼음이 녹고 얼 수 있도록 영상과 영하의 기온이 함께 있어야 생긴다. 고드름의 초기 형성과정은 과냉각된 물이 물체의 모서리에 모이게 되며 차가운 공기 중에서 미결정의 물방울이 형성된다. 물은 물체에 닿은 후 물의 가장자리가 얼면서 얇은 얼음막이 형성되고 빼앗긴 열은 공기 중이나 모서리 끝에 전도된다. 얼지 않은 물은 얼음의 밑부분에 매달리게 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고드름은 점점 크게 만들어진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고드름, 아니 물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 한겨울의 한가운데서 간혹 마주치는 고드름은 우주의 불변일 것 같은 ‘엔트로피 법칙’에 일말의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아래로 성장하는 고드름은 ‘열(에너지)’을 잃는 것이 아주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또한, 이 생각은 O. 파스의 “종교처럼 시도 인간의 원초적 상황, 즉 인간이란 잔혹하고 냉담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과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시인도 나름의 부정적인 경로로 언어의 가장자리에 닿는다. 그 가장자리는 침묵이며 백지다”(『활과 리라』)라는 지적을 차갑게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래저래 이 겨울에는 침묵의 고드름을 찾아다녀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