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5일 [8월 성모 신심 미사 ]
루카 2,15ㄴ-19
힘들게 기억한 것은 잊어버리기도 힘들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베들레헴에서 목자들의 방문을 받습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한 말이 정말 그대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놀라워합니다.
성모님은 마구간에서 분명 이들의 도움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하.사.시.』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날 당신을 보기 위해 방문했던 목자들의 이름을 다 아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머니가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의 숫자는 열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번씩만 자신의 이름을 어머니에게 소개해주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이름을 다 기억했다가 아드님께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모님께서 이 일을 곰곰이 생각한 덕분입니다.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이름 외우는 일입니다.
기억력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성의가 없는 것입니다.
성의가 없다는 말은 나의 에너지를 다른 것을 기억하는 데 썼다는 뜻도 됩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말은 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그러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미사를 하는데 아는 얼굴 둘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불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인사하셨는데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유학 중 잠시 쉬러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었습니다. 저는 참 고마운 분들이었지만, 얼굴과 이름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분들을 그 이후로는 다시 떠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흘러 지나가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필요할 때는 기억하고 필요가 없어지니 기억하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의 열매인 것 같습니다.
유튜브 채널에 ‘이슈 체크’에서 ‘1.5kg밖에 안 되는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는 28년 후, 간호사를 깜짝 놀라게 하는데….’라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29년 전 빌마는 간호 수습 기간을 마치고 평간호사가 됩니다.
빌마의 첫 일은 신생아실이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 30주밖에 안 된 엄마가 1.5kg밖에 안 되는 아이를 낳습니다.
그날 밤 빌마는 신생아실 밖에서 앉아있는 한 남성을 만났고 그가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빌마의 손을 잡고 아들의 이름이 ‘브랜든’이라고 하며 잘 부탁한다고 말했습니다.
빌마는 브랜든을 자기 아이처럼 돌보았고 아이는 건강하게 인큐베이터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브랜든이 초등학생이 되어 엄마와 함께 간호사를 찾았지만, 빌마는 다른 병원으로 이동했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빌마는 일하는 병원에서 소아청소년과 레지던트를 만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브랜든이라고 소개합니다.
빌마는 깜짝 놀라 태어난 병원과 시간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간호했던 아이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빌마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며 브랜든을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나중에 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미숙아였던 ‘브랜든’에게 어떤 특별함이 있었기에 28년이 지난 후에도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나요?”
빌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브랜든은 제가 전담 간호를 맡은 첫 번째 아이였어요.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이에요.
하지만 그 이유가 제가 브랜든을 28년이 지나고도 기억한 이유는 아니예요.
심장이 유난히 약했던 ‘제이슨’, 사람만 보면 잘 웃던 ‘아만다’, 저는 제가 보살폈던 아이들 모두 가슴 한 켠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게 특별하지 않았던 아이는 없습니다.
제가 보살핀 수많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저에게 소중하고 특별한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사용하고 버리는 물건처럼 도구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교구장님은 기억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십니다.
한 번 본 신자들도 아주 시간이 오래 지나도 기억하시고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이것에 많은 분이 감동하십니다.
저는 그분이 단순히 기억력이 좋은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분은 누군가를 만나고
들어오시면 그 사건과 이름을 써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렵게 외우는 것입니다.
쉽게 외우는 것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어렵게 외우면 잊히기도 어렵습니다.
이것이 성모님을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저도 사제로서 본당에 있지만, ‘어차피 떠날 건데!’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꼭 필요한 만큼만 이름을 외우는 데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만남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섭리의 일환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섭리로 우리를 만나게 해 주셨는지를 묵상하다 보면 자꾸 이름과 얼굴을 떠올려야 하고 그러면 저절로 잘 외워질 것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기는 하지만, 저도 하루에 5분 만이라도 오늘 만난 사람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 섭리를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5일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마태오 14,1-12
쇠락과 소멸, 그리 나쁜 것이 아니랍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더불어 초스피드하게 쇠락하고 소멸되는 세례자 요한의 생애와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면서도 흥미진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생애를 요약해보니 이렇습니다.
‘주님은 점점 커지셔야만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만 한다.
나는 쓸쓸하게 저무는 석양이요, 그분은 황홀하게 떠오르는 태양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묶어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구약 시대 마지막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신원의식으로 인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잘 수행하실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세례자 요한의 위용은 엄청났습니다.
그의 날 선 설교와 거침없는 행보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면, 추종자, 제자들이 줄을 이었고, 세례자 요한 당(黨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고, 떠날 순간이 왔음을 직감하자마자, 평생 준비해왔던
마지막 사명을 시작합니다.
그간 공들여 교육시킨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물려드립니다.
손톱만큼의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잘 준비해놓은 무대를 예수님께 넘겨드리고, 조용히 무대 밑으로 내려옵니다.
틈만 나면 내가 누군 줄 알아?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만 열면 자화자찬이요, 별것도 없으면서 어깨에 잔뜩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여야 하는데, 지나치면 그것보다 더 꼴불견은 다시 또 없습니다.
자꾸만 한 살 한 살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롤 모델이요 이정표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쇠락과 소멸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는 그런 모습,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소명입니다.
잘 아시는 바처럼 나이를 점점 더 먹어가면서, 더 이상 젊은 시절의 가슴설렘이나 파릇파릇함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참으로 견디기 힘든 순간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활짝 떴던 세례자 요한의 눈으로 바라보면, 오시는 주님을 위한 나의 쇠락과 소멸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노화와 병고, 죽음조차도 결딜만한 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런 것이다>
2023. 08. 05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마태오 14,1-12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그런 것이다>
의가
불의에
죽지 않으니
의롭게
죽임 당한 이가
불의하게
죽인 이에게만은
되살아나는 것이다
의를
불의는
죽일 수 없으니
의롭게
죽임 당한 이를
불의하게
죽인 이만은
되살리는 것이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