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9일 [주님 세례 축일]
마태오 3,13-17
세례는 은혜를 갚아나가는 출발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 여사는, 1914년 평안북도 운산 태생으로,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평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 평생의 반려인 정일형 박사를 만나 결혼했지만, 남편이 신학교 교수로 근무하던 1942년, 강의에서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이길 확률은 희박하다.”라고 한 것이 국가원수모독죄가 되어서 감옥에 끌려갔고, 결국 생계를 꾸리기 위해 교사를 그만두고 이불 장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가위의 날이 잘 들지 않아 “날이 잘 드는 가위 하나만 있었으면…” 하는 것이 이태영의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이불보를 만드느라 밤새 가위질을 하고 낮에는 이불을 이고 집집마다 다니며 팔았습니다.
전차 삯을 아끼려고 이불 보따리를 이고 수십 리를 걷는 날이 허다했습니다.
그런데 광복이 될 즈음에 감옥에서 나와 아내의 손을 잡은 남편은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습니다.
아내의 오른손 엄지가 90도 넘게 뒤로 젖혀지고 검지와 중지도 크게 휘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일제 말기 전쟁무기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를 죄다 쓸어가 이불보를 자를 제대로 된 가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날이 무디기만 한 가위질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손가락이 휘어 기형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아내를 위해 이제 자신이 무거운 보따리를 바꿔 질 때였습니다.
남편의 격려로 이태영 여사는 1946년 서른셋의 나이로 법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서울대학교 역사 최초의 여대생이자 주부학생으로 입학한 이태영은 가방을 두 개 들고 다닐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1949년 8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첫 여성이 되었고 한국의 첫 여성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훗날 남편 정일형 박사는 외국을 나가거나 멀리 여행을 다녀올 때면 아내를 위한 선물을 꼭 하나씩 사 왔는데, 그것은 바로 가위였습니다.
잘 드는 가위 하나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아내의 옛 소망을 그렇게나마 풀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 모은 가위가 200개가 넘었습니다.
[참조: 부부 가위 이태영 정일형|작성자 고야]
오늘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날입니다. 세례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하느님 사랑의 보증인 성령님을 받아야합니다.
예수님도 성령님을 먼저 받고서 하느님으로부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인정받으셨습니다.
성령님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전부로써, 성령님을 주신다는 것은 아드님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사랑에 비해 예수님은 아직까지는 아버지를 위해 한 것이 특별하게 없으십니다. 사실 세례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은혜를 조금씩 갚아나가시기 시작하십니다.
공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아버지께서 베푸신 사랑을 갚으십니다.
즉 받으셨던 성령님을 아버지께 다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혹은 성령님을, 완전히 보답해 드렸을 때, 혹은 돌려드렸을 때, 세례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태영 여사는 남편을 위해 손가락이 기형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훗날 정일형 박사는 아내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녀의 공부를 돕고 그 감사의 마음을 매번 가위를 사다줌으로써 표현했습니다.
정일형 박사가 받은 사랑이 성령님과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갚아나가는 사랑도 성령님입니다.
그 사랑의 증표 안에서 둘은 더욱 완전한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너는 것이 세례의 상징입니다.
죄의 땅 이집트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탈출하게 해 주셨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홍해를 건너도 여전히 사막입니다.
그 세례는 비로소 여호수아를 통하여 요르단 강을 건널 때 완성됩니다.
그 전까지는 하느님의 완전한 백성이 되기 위해 이전의 자신들을 죽이는 작업을 해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피와 물을 흘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피와 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그 은혜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가도록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받은 세례를 완성해야 합니다.
세례는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인식하고 그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긴 여정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완전히 봉헌되기까지는 우리가 받은 세례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9일 [주님 세례 축일]
마태오 3,13-17
주님 세례!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겠다는 표현!
세례(洗禮)! 말마디 그대로 더러워진 몸과 영혼을 씻는 예식, 죄 사함의 의식이요 전례입니다.
그런데 죄나 오점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티 없으신 하느님의 외아들, 무죄하신 어린양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르단강을 찾아오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세례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한갓 피조물인 세례자 요한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너무나 황송해서 당황스러웠던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오 복음 3장 14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오 복음 3장 15절)
오늘 우리는 주님 세례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는 하느님의 지극한 자기 낮춤의 표현인 육화 강생인 성탄에 이어
다시 한번 극단적 자기 낮춤의 명료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듯 우리의 하느님은 임마누엘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죄인인 인간과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 우리의 죄와 타락이 너무나 안타까우신 나머지, 우리의 일상사에 늘 현존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 곧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런 애틋한 마음을 지니신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주님 세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셨다는 의미입니다.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과 동고동락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 여정을 동반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토록 자신을 한없이 낮추셔서 구질구질한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낮추어, 우리보다 가난하고, 우리보다 더 고통받고 있고, 우리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 사이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까>
2023. 01. 09 주님 세례 축일
마태오 3,13-17 (세례를 받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까>
세례 받은 이로서
살아가면서
가끔씩이라도
스스로에게 물어야지
참으로 내가
하느님의 마음에 드실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