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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 22. 기이히 여겨 - 마 22: 24. 자식이 없이 죽으면
마 22: 22. 기이히 여겨 -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
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그들은 예수에게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그 대답은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의 협공을 피하면서 도리어 그들의 부패한 심장을 찌른 것이다.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것'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게 되었다. 그들은 압도당하여, 즉 '기이히 여겨'(*, 에다우마산) 놀라고 감탄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 들은 그들의 선생들은 눅 23: 2에서 예수의 이 말씀을 왜곡하여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선동(agitation)했다고 고소한다.
* 눅 23: 2 -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부활 논쟁 ( 22: 23-33. 막 12: 18-27. 눅 20: 27-40 )
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부활에 관한 교리는 기독교만이 갖는 독특하고도 신비한 비밀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해서는 그 역사적 사실성이 객관적으로 계속 규명되어 가는데도 아직 회의와 불신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사람이 있다.
당시의 사두개인들은 바로 이러한 자들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해 믿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본문은 사두개인들의 이러한 독선적인 무지를 통박하시며 깨우치시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교훈이다.
마 22: 23. 부활이 없다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
1]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사두개인들은 당시 합리주의자, 자유주의자이었다.
사도행전 23: 8은,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말한다. 합리주의, 자유주의는 곧 불신앙이요 이단이다.
그들이 언급한 형제 결혼의 법은 신명기 25: 5-6에 규정된 법이었다.
거기에 보면,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사두개인들은 한 독특한 경우를 들어 부활의 불합리성을 증명하려 하였다. 이것은 기발한 착안이었다. 그들은 부활의 관념이 이 율법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부활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하였다.
사두개인(3: 7, 주석 참조)들은 숫자상으로는 많지 않았으나 부유한 귀족들이며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제사장들은 대부분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헬라 사상을 받아들였으며, 자기 민족의 역사적 근거로서 모세 오경은 인정했으나, 기타의 구전, 문서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유전과 서기관들의 성경 해석과 적용을 배척했다. (Winer).
그들은 물질만이 유일한 실체라고 믿었다. 만약 부활이 있다면 그것은 땅에서의 생전의 동일한 조건이 그대로 유지되어 현생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삶이 변함없이 계속되므로 있을 수 없다.
당시 유대교는 죽음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건한 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최후의 부활까지는 음부(스올)에서 그림자처럼 미약한 존재의 형태로 있게 된다고 믿었다.
사두개인들은 사람은 죽음과 더불어 영혼과 육체가 다 없어진다고 믿었다. 그들은 영혼의 존재와 부활의 교리가 오경에서 증명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신 31: 16. 32: 39을 인용하여 오경에서 몸의 부활을 증명하려 했다.
* 신 31: 16 -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 신 32: 39 -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오경 외에 사 26: 14에서도 부활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 사 26: 14 -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 이다.
그러나 그들이 몸의 부활을 원칙적인 교리로 고수했어도 그들의 논의는 필요 없는 상상과 억측으로 흘렀다. 한 예로 그들은 부활했을 때 '어떤 옷을 입고 부활할 것인가?'를 문제 삼았다.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인가의 논의는 삼상 28: 14(죽은 사무엘이 알아볼 수 있게 나타난 사건)에 근거하여 죽을 때 가졌던 모양 그대로, 불구자는 불구인 그대로 부활한다고 주장하였다.
* 삼상 28: 14 -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또한 모든 유대인은 성지 팔레스타인에서 부활한다고 믿고 외국에서 죽은 자들은 지하의 공로(空路)를 통해서 팔레스타인에 이르러 부활한다고 했다. (W. Barclay).
그들에게도 부활은 육체의 부활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교리가 만들어내는 많은 모순 때문에 그것을 비웃고 믿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제외된 자라고 규정했다.
2] 그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마태만이 그 질문이 같은 날에 있었다는 것을 기록한다.
유대 지도층의 세 파가 예수를 시험한 그 날(화요일)은 질문의 날이었다. (Tasker).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의 실패를 보고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논리로 예수를 굴복시킴으로 예수와 함께 경쟁자들을 제압하여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것은 사두개인들이 예수와 직접 관계한 유일한 경우이다. 그들은 예수가 바리새파의 전통적인 부활교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그 교리의 모순된 점을 공격하여 백성의 인기가 최고도에 달한 '선생님'이신 예수로 대답할 수 없게 만들어 망신을 주고자 하였다.
(1) 무지한 사두개인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무지함을 책망하고 그들의 오류를 교정해 주시려고 부활에 대한 바른 견해를 피력하셨다.
①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다.
'너희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고로'(29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은 많은 오해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서 사두개인들은 부활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부활 자체를 부인해 버리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육체 자체를 부인해 버리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였다.
사람들은 육체에서 구별되는 영혼의 존재와 작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사람이 죽으면 정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인가'하고 물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면, 즉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이 모든 불신과 무지로 인해 제기되는 신앙의 회의적인 문제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의 권능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다운 지식의 근원이 되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②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들은 부활과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기록된 성경 말씀을 알지 못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신앙 기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저들의 전통과 유전을 귀히 여긴 나머지 성경을 경시하고 그 뜻을 분별하여 사는 데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성경은 분명히 성도의 부활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에스겔을 이러한 사실을 예언하였다.
* 겔 37: 11-12 –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다니엘도 분명히 이 사실을 언급하였다.
* 단 12: 2 -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 고전 15: 4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와 같이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성경을 알지 못하거나 또 지식적으로 알더라도 그것들의 참된 의미와 의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성경에 대한 무지는 가장 큰 불행이다.
마 22: 24. 자식이 없이 죽으면 -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
그들은 계대결혼(繼代結婚)에 대한 구절을 예로 들었다.
1] 선생님이여.
그들도 바리새파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존경과 위엄으로 자신들의 악의를 가장한다.
그러나 자신들에 대하여 가졌던 우월감 때문에 아첨까지는 하지 않는다.
2] 모세가 일렀으되,
그들은 모세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이론의 근거가 모세에게 있음을 은연(隱然)중 강조한다.
3]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이것은 신 25: 5-6의 요약 인용이다.
* 신 25: 5-6 –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 – 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그들은 신명기를 모세의 말로 인용한다. 신명기까지의 첫 다섯 권을 모세의 저작으로 받는 것은 유대인의 정설(定說)이었다.
원래 레 18: 16. 20: 21에서는 형제의 부인과는 결혼을 금지했다.
* 레 18: 16 -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
* 레 20: 21 - 누구든지 그의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의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그러나 신 25: 5에서는 형제가 자식이 없이(원문: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형제가 형수(제수)를 취하여 아내를 삼도록 했다.
여기 '아내에게 장가들어'(*, 에피감브류세이)는 무자(無子)한 과부인 형수에게 장가드는 자에 대해서 쓰였다. (신 25: 5).
* 창 38: 8 –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구약에는 이곳에 한 번 나온다. 모세 이전에도 이 수혼(嫂婚)의 풍습은 있었다.
그리고 고대에서 근세까지 여러 동양 민족들에게서 그 관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관습을 이스라엘의 법으로 정착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수혼법이 적용되는 무자한 과부를 취할 수 있는 이웃 친척도 같은 지경에 사는 형제에게 국한되었다.
그러나 그 의무는 거부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의무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당사자가 증인들 앞에서 그 남자의 신을 벗기고, 침 뱉고, 저주했다.
* 신 25: 7-10 - 죽은 형제에 대한 의무 – 7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면,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하나이다. 할 것이요 8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말할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를 맞이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노라. 하면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10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
그러나 이것은 예수 당시에는 거의 퇴화된 법조문이었다고 한다.
4]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형을 위하여'는 원문에 '그의 형제에게'(*, 토 아델포 아우투)이다.
'후사'(*, 스페르마)는 원래 파종(播種)을 위해 보관해 둔 씨를 뜻한다.
'세울지니라'(*, 아나스테세이)는 '일으키다'(raise up)는 뜻이다.
수혼법은 자식이 없음으로 인하여 가문이 끊기는 것을 가장 큰 재앙으로 여겼던 고대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었다(Speaker).
형수와의 새로운 결혼에서 낳은 첫 아이는 죽은 형제의 법적인 아들로 간주되어 죽은 형제의 이름을 물려받고 그의 족보에 오르고 그의 상속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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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활에 관한 교리는 기독교만이 갖는 독특하고도 신비한 비밀이다.
💖늘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듯 언제나 새롭고 희망찬 하루
당신의 오늘 하루를 응원합니다.💖
부활에 관한 교리는 기독교만이 갖는 독특하고도 신비한 비밀이다.
설교 감사합니다.
부활에 관한 교리는 기독교만이 갖는 독특하고도 신비한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