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가해 12월17일 주일 [(자)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수도회] 기쁨을 회상하고 실천하며 기다리는 주님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61,1-2ㄱ.10-11
○ 제2독서 1테살 5,16-24
† 복음 요한 1,6-8.19-28
◈ 오늘의 묵상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파견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정체를
묻습니다. 군중이 요르단강에 모여들어 그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는
종교 운동에 대하여 지도자들이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에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단호히 고백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기 에, 요한은 명확한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그들의 둘째 질문은 “엘리야요?”입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올 엘리야’라고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었지만 부인합니다.
겸손한 요한은 자신을 위대한 신앙의 영웅인 엘리야에 비기지
않습니다.
셋째 질문은 “그 예언자요?”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 따라 모세가
예언한 그 메시아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요한은 역시 “아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넷째 질문은 “당신은 누구요?”입니다. 신원을 밝히라는 요구에
요한은, 이사야가 말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하고
대답합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우리도 신앙인이 누구인지 자신에게 질문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이며, 그분을 충실히 따르면서
사람들을 그분께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갇힌 사람들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자유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2017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제1독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1,1-2ㄱ.10-11
제2독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 5,16-24
복음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8.19-28
전에 성지순례로 요르단에 가서 겪었던 일 하나가 떠올려집니다.
이스라엘을 거쳐서 요르단에 입국했는데 글쎄 제가 가지고 갔던 여행
가방의 지퍼(zipper)가 고장 나서 닫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지순례
기간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마침
호텔 맞은편에 여러 물건들을 파는 상가가 보입니다.
이 상가는 화려한 백화점이 아니라, 우리나라 7~80년대의 분위기를
내는 잡화상들이 가득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몇 군데를 둘러보면서
가진 생각은 가격을 무조건 깎아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호객 행위도
대단했고, 또 이런 곳에 위치한 상점들은 손님들이 깎을 것을
대비해서 먼저 비싸게 가격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마음에 드는 가방을 발견했습니다. 가격표를 보니 55달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구입하는 가격보다 훨씬 저렴했습니다.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저렴하면서도 동시에 괜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구입하려고 했지만 혹시나 해서 짧은 영어 실력으로
“Discount Please~~”(깎아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주
흔쾌히 “Okey!!”(좋아요)라고 말하면서 25달러만 내라고 하지
않습니까?
두 말하지 않고 25달러를 주고 구입한 가방을 들고서 기쁜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만약 제 생각에 싸다는 생각에 깎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구입했다면 어떠했을까 싶더군요. 딱 두 단어를
말했을 뿐인데, 자그마치 30달러를 깎을 수 있었습니다. 순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생각났습니다.
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내 자신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주는 말도 있으며, 내게 이익이 아닌 오히려 큰 손해를
가져다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자신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말을 해야 하겠지요. 문제는 자신만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함께 하는 사랑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내 마음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함께 기쁨을
간직하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도록 합니다.
대림초의 불을 세 개 밝힌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당시 그는 사람들에게 ‘엘리야, 예언자’등의
호칭을 받을 정도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지요. 이 정도면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맞다.”라고만 말해도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요한 1,20)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동시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라는 큰 겸손의 말을
합니다.
보통은 자신이 짐짓 뛰어다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말합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오늘 제1독서에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61,10)
맞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 안에서 큰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말이 아닌, 주님을 위한 말을
세상에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말은 과연 어떤 말일까요? 세례자 요한처럼 큰 기쁨
안에서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나를
알리는 말을 하기에 급급했던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를 통해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
자신의 허물을 지적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 허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적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파스칼).
2009년도 동창신부들과의 성지순례.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고백
폴란드 심리학자 카지미에시 동브로프스키는 1950년대에 제2차
세계대전의 생존자가 전쟁에서 겪은 충격적 경험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폴란드는 끔찍한
참상을 겪을 수밖에 없었지요. 큰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동브로프스키는 이 생존자들을 연구하다가 놀라운 점을 발견합니다.
생존자 대다수가 전쟁 기간 동안 괴롭고 충격적인 경험을 했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현재 더 책임감 있고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더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겪지 않지 않았으면 소중한
사람에게 감사할 줄 모르고, 게을렀을 것이고, 작은 문제에만
집착하면서 중요한 것을 놓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전쟁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훨씬 더 긍정적이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위기의 순간에 사람들은 변화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통과
시련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좀 더 행복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분들이 많지요. 새롭게 변하게 될
내 자신을 꿈 꿔 보시길 바랍니다. 벌써 행복해지지 않습니까?
전쟁은 안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기쁨을 회상하고 실천하며 기다리는 주님 -
기 경호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재3주일
이사 61,1-2ㄱ.10-11; 1테살 5,16-24; 요한 1,6-8.19-28
“내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이사 61,10)
기쁨을 회상하고 실천하며 기다리는 주님
대림 제3주일은 ‘기쁨의 주일’입니다. 오늘의 입당송은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필리 4,4.5)고 합니다.
제1독서 이사야 61장의 주제 또한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언제나 기뻐하라.”(1테살 5,16)고 초대합니다. 그렇게
머지않아 성탄을 맞이할 우리는 기쁨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영을 내려주시며,
그를 파견하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십니다.”(이사 61,1) 예수께서는 이 장엄한 고백을
실제로 실천하셨지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난한 이를 돕고 상처받은 이를 품어 안으며 묶인
이들의 해방을 위해 힘써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시어”(이사 61,10)
하느님 안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께 사로잡혀 그분께서 바라시는 일을 실행함으로써 참 기쁨의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우리 모두 주님의 제자라는 분명한 신원의식을 지니고 기쁨의 샘이신
주님을 맞이해야 마땅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고백하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7)고 합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분명한
신원의식 정체성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는 신원의식과 주님의 도구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 하느님을 잊어버린 채 비참과 어둠의 늪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은 겸허한 자세와 뚜렷한
신원의식입니다. 그런 신원의식 속에 참 기쁨이신 주님을 만나뵙게
될 것입니다.
참된 기쁨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며 하느님의 영을 받아 우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결코 감상적일 수 없습니다. 참 기쁨의
사람은 기쁨이신 주님을 맞아들여 기쁨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고,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의
선, 정의와 평등, 평화를 이룩하는 소명을 실행함으로써 주님의 기쁨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기쁨 안에 머물려면
주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그침 없이 실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역사의 현장, 삶의 한복판에는 우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십니다. 우리도 나만의 일에 몰두하여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오시는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우리 가운데 오시어 함께 계시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마음이 부서진 이들,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 고통받고 버림받은 형제자매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 뵙고 함께 할 때 영원한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구원의 옷과 의로움의 옷을 입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기쁨의
선물을 주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해야겠습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기쁨 주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일: 가해: 기쁨 주일
대림 제3주일에는 성탄이 그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감싸기 시작한다.
그래서 전례는 전체적으로 기쁨에 들떠있다. 그 기쁨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이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하느님께서 너희를 구원하러 오신다.”
(이사 35,4). 이 기쁨은 피상적인 단순히 감정적인 기쁨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이다. 그 기쁨의 동기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나러 오시고 악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었음’을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그 기쁨은 내가 획득한 기쁨이 아니라,
베풀어진 기쁨이며, 구원의 ‘열매’요 ‘징표’가 되는 ‘기쁨’이다.
제1독서: 이사 35,1-6a.10: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적에 의해 폐허가 되어 승냥이만 살고
있는 성도 예루살렘이 옛 빛을 완전히 되찾아 재건됨을 알리고 있다.
그 도시는 유배지에서 사람들이 되돌아옴으로써 활기를 되찾는다.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에게 ‘환희’와 ‘기쁨’을 준다.
유배지로부터 ‘해방된 이들’(10절)만이 아니라, 변화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포함되고 있다.
이사야는 ‘기쁨’을 창출해내는 ‘구원’의 개념을 좀 더 형상화하기 위해
장님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을 한다고 한다.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6절). 이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 전체가 대상이라는 것이다.
병이라는 것은 인간의 전 신체와 지체 사이에 구조적 관계적
불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균형을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이
예수께서 하신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은
구원의 표지이며, 그를 체험한 사람들은 얼마나 큰 놀라움과 기쁨을
체험하였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복음: 마태 11,2-11: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이 예언의 말씀의 ‘기쁨’이 복음에서 다시 조명되고 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께서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는 내용이다. 놀라운 것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요한은 예수가 아직은 종말에 오실
심판자-“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마태 3,12)-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가 생각했던 메시아 역시 강력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또
나타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그 모습이 우리가 생각할
때에 나약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더더욱 강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음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5-6절).
예수의 이 말씀들은 이사야서에서 몇몇 대목들(26,19; 29,18; 61,1)
과 관련이 있으며, 그 중 한 대목이 1독서에 나타난다(이사 35,5-6).
여기서 볼 때, 예수께서는 ‘심판자’로서보다도 ‘구원자’ ‘해방자’
로서의 메시아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불의 외에도
재앙이나 불행을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듯 한, 보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 즉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가난한 이 그리고 죽은
이들까지 가까이 하신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권능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특히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일치, 구원과
동참의 행위이다. 이러한 ‘표징’들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이심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더 이상 ‘의심할’ 여지를 가지지 않게 된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한 찬사를
하신다(7-11절). 세례자 요한이 위대하다는 것은 강인한 정신력과
참회의 정신에 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나약한
사람도 아니다. 또한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가 구약에서 출애굽기
(23,20)와 말라기 예언서(3,1)에 나타나는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사실에 있다. 전자에서는 야훼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게 하시는 내용이 있고, 후자에서는
야훼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킬 사자를 당신이
오시기 전에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고귀한 사명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될 ‘하늘나라’의 일원은 아니더라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11절)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하신다(11절). 그러나 그렇다고 요한의 기쁨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명은 신랑의 오심을 알리는 것이었고 이것이 그가 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 야고 5,7-10: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요한의 기쁨은 불확실성과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다림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가끔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결과도
내지 않거나 무산되기도 하고, 그 ‘표징’의 의미가 약화되기도 하고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인내로운 기다림이어야 한다.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2독서에서 농부의 개념을 들어
그리스도인의 ‘인내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운명적
체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끈기
있게 협력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까이 접근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음에서 큰 기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이라는 것은, 또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의
것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기쁨에 대해 오늘 독서가 말하고 있는데 그 기쁨은
그냥 아무런 수고 없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구한
인내를 가지고 자신을 이기는 삶에서,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가
기쁨을 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기쁨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항상 갖춰 입어야 할 옷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 수원교구 상하 성모세 성당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서울] 대림 제3주일
2017년 나해 12월17일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 요한 1,6-8.19-28
연일 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변에 추위를 이겨내기 힘든 분들은
없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분, 몸이 아픈 분,
혼자 외롭게 지내는 분, 채무가 있는 분들에게는 더욱 춥게 느껴질
것입니다.
‘앵무새 죽이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써야했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이가 누명을 쓴 것을 알면서도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익명성
뒤에 숨어서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폭행을
일삼았던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행위로 판단해야 합니다. 사람의 죄는
행위로 정해지는 것입니다. 소설은 사람의 인격이 피부색에 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죄는 피부색에 의해서 정해지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노동을 하지만
먹을 것은 늘 부족했습니다. 아이를 낳아도 제대로 키울 수
없었습니다.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집트의 신들은 그런 사람들을 외면했습니다. 이집트의 신들은
제사장들과 권력자들과 가진 자들에게 축복을 주는 신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병든 이들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의 이름은
‘야훼’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신만이 유일한 하느님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난한 이들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하느님, 아픈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신분, 피부, 혈연, 세대, 계층,
이념의 벽을 허물어 주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산은 평평하게 깎아 주시고, 깊은 골짜기는 메워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바로 그런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이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응답송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과 예수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랐던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픈 이들이 고통에 함께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외로운 이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집트의 신을 섬기는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한 신학생이 제게 작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청소년들이
지내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늘 남이
입던 옷을 입는 아이들 생각이 나서 보세 옷가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옷 가게에는 평소에 입고 싶었던 옷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옷을 살까, 아니면 평소에 입고 싶었던 그 옷을
살까! 통장에는 200,000원 밖에 없었습니다. 큰맘을 먹고 아이들을
위해서 옷을 사서 사회복지 시설로 갔습니다. 아이들은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설에 계시는 수녀님께서 신학생에게
선물을 하나 준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토록 입고 싶었던 가벼운
패당 잠바였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학생은 보세 옷가게를 다시
찾았습니다. 수첩을 놓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옷가게 사장님이
신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아이들을 위한
옷과 양발을 한 보따리 주셨습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던 학생은
그날 저녁에 본당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본당 신부님께서
성탄을 축하한다고 하시면서 봉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봉투에는
그날 자신이 사용한 금액인 200,000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신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눔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은 보다 안전한 곳에 나의 것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좋아하셨고,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노래가 생각납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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