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7-42 베드로의 증언을 듣고 마음이 찔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며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하며 구부러진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으라고 하자 믿는 자가 하루에 삼천명이나 늘어났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나누는 것과 주의 만찬을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집중했다.
이전 말씀에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과 비교하며 너희가 십자가에 달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도록 만드셨다고 명절에 성전에 모인 모든 유대 사람들에게 증언했다. 이어지는 말씀은 마음이 찔린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고 해서 구원 받은 사람이 삼천명이나 늘어났다는 내용이다.
37절에 보면 이 말을 듣던 사람들은 마음이 찔렸다. 마음이 찔렸다는 말은 완전히 라는 말과 날카로은 것에 찔렸다는 말이 합쳐진 말이기에 완전히 관통했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전하는 말이 저들의 심장을 완전히 관통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또한 함께 서 있던 나머지 사도들에게 "남자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물은 것이다. 이것도 베드로가 말을 잘 전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베드로와 120명 제자들에게 쏟아 부어진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할 말을 주셔서 전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전한 말씀이 저들의 심장을 완전히 관통하게 하신 것도 성령님의 역사이다.
38절에서 베드로가 대답한 것은 먼저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란 단어의 본래 뜻은 생각이나 목적을 바꾼다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는 생각을 바꾸셨다고 할 때 많이 썼다(렘 4:26; 18:8, 10; 암 7:3, 6; 엘 2:13, 14; 욘 3:9, 10, 4:2; 슥 8:14). 개역은 예레미야 18:8절에서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도 뜻을 돌이키겠다고 번역했다. 한글 번역만 보면 돌이킨다는 말이 똑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칠십인역 구약성서를 보면 그 민족이 돌이킨다고 할 때는 악에 등을 지고 돌아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킨다는 말은 생각을 바꾼다는 뜻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말한 회개도 생각을 바꾸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나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 행위를 소홀히 한 적이 없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최고로 열심히 믿는다 하면서 세상 부귀영화와 세상 쾌락도 사랑하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양다리였기에 구약에서 계속해서 간음하는 음란한 여인으로 비유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도 저들은 모두 그랬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양다리였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성령님을 쏟아부어 주신 것을 보고 들었으니 이제 생각을 바꾸라는 뜻이다. 이제 형식적으로 하나님 사랑을 사랑하는 척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진짜로 사랑하도록 생각을 바꾸라는 뜻이다.
두번째는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 침례를 저들의 죄를 용서하게 하는 침례이다. 용서한다는 말은 빚을 탕감해 준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죄의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수치이고 굴욕인 것이다. 모든 성도들 보는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죄인임을 공동체 앞에서 고백하고 죄사함에 이르게 하는 침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39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왜 그렇게 회개하고 침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면 바로 여러분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것이다. 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주신 약속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란 베드로와 당시 사람들에게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유대인들을 먼저 불러서 그들을 통해 또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40절에서는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말로 증언하고 비뚤어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그들에게 권하였다" 고 했다. 베드로가 한 말은 여기에 다 기록하지 못하고 그 핵심만 기록했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성령께서 주신 모든 말씀들을 저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비뚤어졌다는 말은 구부러졌다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 앞에 완고하고 반역하며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세대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시 78:8; 신 32:5). 시편 78:8절을 보면 완고하고 패역하며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고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구부러진 세대라는 말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완고하고 반역하며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사도행전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구부러져 있었다. 믿는 척하면서 사실은 몰래 우상을 섬기던 구부러진 세대들로부터 건짐을 받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들의 탐욕을 따라 자기들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던 구부러진 세대에서 빠져 나오라고 권한 것이다.
41-42절은 이렇게 베드로가 말씀을 전한 결과를 말한 것이다. 그 결과는 두가지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 41절은 한편으로는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하루에 삼천명이나 더해졌다는 것이다. 초점은 하루에 일어난 놀라운 일에 있다. 이것은 놀라운 성령님의 역사이다. 복음을 온 세상에 퍼져나가게 하기 위해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 뿐만 아니라 명절에 각처에서 유대인들이 몰려온 때에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42절은 또 다른 측면을 말한 것이다. 이들은 네가지 일에 몰두했다고 했다. 몰두했다는 말은 계속 인내하며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말에 앞으로라는 말을 덧붙인 말이다. 계속 네가지를 단단히 붙잡고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 초점은 하루가 아니라 계속되는 나날들에 있다. 그날에 제자들의 무리에 가담한 사람들은 단순히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단단히 붙잡았다. 사도들이 가르쳐 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을 항상 단단히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서로 사귀는 일을 단단히 붙잡았다. 사귀는 일이란 원어에서는 코이노니아 라는 말인데 공동으로 함께 나눈다는 뜻이다. 물질을 나누어주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말씀을 단단히 붙잡고 살면서 체험한 것을 함께 나누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이어 나오는 빵을 떼는 것과 기도를 뜻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공동으로 함께 나누는 일을 단단히 붙잡았다는 뜻은 말씀을 배운 것과 연결해야 하고 뒤에 나오는 주의 만찬과 기도를 포함하는 말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 이를 두고 물질을 나누면서 종교적인 경험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서로 물질을 나누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도 역시 연결된 네가지의 논리적 순서에 맞지 않는다. 맨 먼저 사도들의 가르침을 단단히 붙잡았다면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을 붙잡고 살면서 경험한 하나님을 모두 함께 나누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요한1서 1:3절에서도 사귐이라고 번역된 코이노니아 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라고 했다.이는 성부 성자 성령을 공동으로 나눈다는 뜻이다. 말씀을 배운 뒤 그 말씀을 가지고 서로 나누면서 영적인 교제를 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논리상 타당하다.
셋째는 빵을 떼는 일을 단단히 붙잡았다는 것이다. 빵을 떼는 것은 단순히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식사라고 보기도 하고 주의 만찬이라고 보기도 한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주의 만찬은 훨씬 후대의 교회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Stott는 이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식사라며 주의만찬의 초기형태라고 했다(Stott, 161). 베드로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눈 것처럼 함께 유대인들 방식의 식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식사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함께 빵을 떼면서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하신 말씀을 나누었을 것이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빵을 떼면서 서로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나눈 것이다. 앞에서 사귐이 하나님과 사귐을 형제 자매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라면 이번에 빵을 떼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따라 빵을 나누어 준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단단히 붙잡았다. 여기서 기도는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함께 모여 기도한 것을 뜻할 것이다. 첫째로 한 일인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은 것이라면 마지막에 함께 모여 했던 기도는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다. 첫째와 넷째는 하나님과 주고 받은 것이라면 둘째의 교제와 셋째의 빵을 떼는 것은 형제 자매들 간에 서로 주고 받은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형제 자매들과 교제를 했던 것이다. Stott는 이 네가지를 배우고 사랑하고 예배한 것으로 요약했다(Stott, 117-23). 빵을 떼고 기도하는 것을 예배에서 주의 만찬을 나누고 기도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 말씀을 배운 뒤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 사랑을 나누는 영적인 교제를 하고 주의 만찬을 나누며 이웃 사랑을 나누며 기도하게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