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어구이:동서양 공통의 여름 보양식
장어는 힘이 무척 센 물고기다. 생명력도 강해서 잡아도 잘 죽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어를 보며 강한 생명력을 느꼈고 장어를 먹으면 그 힘이 자신의 몸으로 전해질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장어는 한국, 일본, 중국 삼국에서 공통으로 여름 보양식으로 발달했다. 추어탕이 농민들의 여름 별식이었다면, 장어는 중산층의 하절기 보양식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여름 장어를 즐겨 먹는다. “여름에 장어를 먹으면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속설까지 있을 정도다. 특히 우리가 복날에 삼계탕을 먹는 것처럼 일본 사람들은 복날 장어덮밥을 먹는다. 일본 고전인 《만엽집》에도 보이니까 여름 보양식으로 장어를 먹은 역사가 꽤 깊다.
중국에서도 장어는 여름 보양식이다. 송나라 때 《태평광기》라는 책에 “어느 여름날 전염병에 걸려 죽어가는 여인이 있었다. 며칠 동안 장어를 고아 먹였더니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태평광기》는 전하는 이야기를 모아 적은 책이다. 중국인들이 장어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영양이 풍부한 여름 장어를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는 보양식으로 보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여름 장어는 어떤 음식과도 견줄 수 없는 영양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더위에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게 해주는 식욕 촉진제 역할을 했다. 숙주와 고사리를 넣고 끓인 장엇국을 먹고 나면 다른 것은 맹물에 조약돌 삶은 국 맛이 난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니 그 이상으로 입맛을 당기는 음식을 찾기가 어렵다.
장어구이는 고려 때부터 왕실에서 즐겨 먹었다. 옛날에는 임진강 장어가 유명했다. 고려시대에는 임진강에서 다양한 물고기가 풍부하게 잡혔는데 이 중에서도 여름에 잡히는 장어는 가장 먼저 송도의 왕궁으로 보내졌다.
임진강 장어는 근대까지만 해도 계속 명성을 유지했다. 경성의 어시장에서 팔리는 임진강 장어는 조석 간만의 차이가 큰 곳에서 잡혀 진미와 풍미를 모두 갖춘 덕분에 일류 요릿집으로 팔려 나갈 정도로 이름값이 높았다. 옛날만큼 명성이 드높지는 않지만 아직도 임진강 하류의 파주와 강화도 일대에 장어를 파는 집이 많은 이유다.
오늘날 장어로 유명한 고장은 전북 고창이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고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커서 힘이 좋고 맛있는 장어가 많이 잡힌다. 다산 정약용도 〈탐진어가〉라는 시에서 봄이 되면 물 좋은 장어가 많아 어선이 푸른 물결 헤치고 나가 장어를 잡는다고 했으니 다산이 귀양을 살던 순조 무렵에도 고창과 영광 일대의 칠산 앞바다에서 장어가 많이 잡힌 모양이다.
장어는 남자에게 특히 좋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옛 문헌에는 오히려 여자에게 좋다고 나온다. 선조 때 차식이라는 송도 사람이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의 무덤인 후릉의 관리를 맡았다. 평소 초라했던 능을 정성껏 돌봤더니 정종이 꿈에 나타났다. 정결한 음식을 제물로 바친 뜻이 가상하다면서 “네 어미가 지금 대하병(대하증)을 앓는다고 하니 내가 좋은 약을 주겠다”고 했다. 꿈에서 깨니 마침 매 한 마리가 날아가다 큰 생선 한 마리를 하늘에서 떨어뜨렸다. 길이가 한 자가 넘는 힘이 펄펄 넘치는 장어였다. 꿈속 일이 생각나 장어를 집으로 가져와 어머니께 드렸더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한국과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장어 이야기의 공통점은 장어를 먹어서 병이 나았고 그 주인공은 모두 여자라는 점이다. 옛날 의학서를 보면 하나같이 장어는 전염병과 부인병에 좋다고 했다.
흥미로운 것은 서양에서도 여름이면 장어를 먹는다는 점이다. 보신이라는 개념이 동양과는 다르니까 특별히 보양식이라고 규정짓기는 어렵겠지만 독일 북부 함부르크 지방에서는 여름 별식으로 알주페라는 음식을 즐겨 먹는다. 독일어로 알(Aal)은 장어, 주페(Suppe)는 수프라는 뜻이니까 장어수프로,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장어탕에 다름 아니다. 독일 사람들도 장어를 먹으면 힘이 솟는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사실 유럽에서는 독일 이외에도 여름 별식이나 해장 음식으로 훈제 장어를 먹는 나라가 여럿 있다고 하니까 동양이나 서양이나 장어를 바라보는 느낌은 비슷한 것 같다.
글 윤덕노
# 오늘의 재미난 고사성어
주마등(走馬燈) - 두 겹으로 된 틀의 안쪽에 갖가지 그림을 붙여 놓고 등을 켠 후 틀을 돌려 그림이 바깥쪽에 비치게 만든 등을 말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주마등’은 사물이 덧없이 빨리 변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출전
「정월 보름에 등 시장을 열어 소나무 잎을 모아 사거리로 통하는 곳의 울타리에 엮어 놓고 그 아래에 화려한 등을 건다. 등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안에 종이로 만든 사람과 말을 걸어 놓고 불을 회전시키는 것을 일러 주마등이라 했다.(正月上日作燈市, 採松葉結柵子於通衢, 下綴華燈, 燈有諸品. 其懸紙人馬於中以火運, 曰走馬燈.)」(《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중국은 고대부터 정월 보름날에 각양각색의 등을 다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마등이다. 등(燈) 위에 둥근 원반을 올려놓고 원반의 가장자리를 따라 말이 달리는 그림을 붙인 후, 밑에서 촛불을 밝히면 등 내부의 공기가 대류현상을 일으켜 원반을 돌게 하는데, 원반이 돌면 마치 말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주마등’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주마등’은 세월의 빠름이나 어떤 사물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용례
졸업한 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모교를 찾아가 보았는데, 옛날에 친구들과 같이 뛰어놀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 오늘의 추천곡
오늘의 음악은 변진섭의 우리의 사랑이야기 입니다.
즐감하세요~~^^
깊은 밤이 찾아오면
서늘한 달빛
창가에 머물고
희미한 기다림은
안개속에 사라지네
밤하늘을 바라보다
그대 생각에
온밤을 지새고
메마른 가슴으로
아침햇살을 기다리네
밤이여 기쁨이여
내 사랑이여
온 세상을 비쳐줘요
우리의 사랑얘기
저 바람속에
흰 물결위로 띄워요
밤이여 기쁨이여
내 사랑이여
온 세상을 비쳐줘요
우리의 사랑얘기
저 바람속에
흰 물결위로 띄워요
* 여러분의 신청곡 받습니다. 밴드에 계신 분들과 같이 듣고 싶으신 노래가 있으심 댓글에 올려주세요. 신청 받는 순서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조선풍속사◇1
#조선풍속사
1. 녹 잘 스는 청동-백동거울, 반짝반짝 새것으로
《조선시대라고 ‘사농(士農)’, 선비와 농민만 살았으랴. 오늘날 정도는 아니라 해도 수많은 ‘공상(工商)’이 살았다. 조선의 진면목은 낮과 궁(宮)뿐 아니라 밤과 저잣거리에도 있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신 젊은 연구자들이 사료의 짧은 기록을 추적해 그들의 세계를 조명한다. 다양한 직업을 조명하는 기고를 매주 1회 연재한다.-동아일보》
경대 앞에서 매무새를 다듬는 여인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그림. 서울대박물관 제공
“13일 마경장(磨鏡匠) 15명을 대령하라 했는데, 하지 않았다. 공조와 상의원 해당 관원을 국문하라!”(연산군일기 1504년·연산 10년 1월 14일)
마경장이 뭐하는 사람이기에 연산군은 15명이나 찾았을까?
조선 후기까지 거울은 지금 흔히 보는 유리 거울이 아닌, 청동이나 백동으로 만든 금속 거울이었다. 금속 거울은 쉽게 녹슬었다. 녹을 벗기고 갈고 닦아 맑고 선명한 빛을 다시 살리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를 담당했던 사람이 거울 가는 전문가 마경장이다. 낡고 녹슨 거울은 마경장 손끝에서 새것으로 거듭났다.
훗날 작성된,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사당)에서 제사 지낼 때 쓸 물건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경모궁악기조성청의궤’를 보면 마경장이 거울을 닦는 데 썼던 도구가 나온다. 강려석, 중려석, 연일려석과 법유이다. 강려석은 거친 숫돌, 중려석은 중간 거칠기 숫돌, 연일려석은 포항 연일 특산의 고운 숫돌을 말한다. 법유는 들기름이다.
도구가 단출한 편이라 공정도 단순해 보인다. 그러나 무조건 부지런히 간다고 잘하는 게 아니다. 숫돌 세 종류를 고루 잘 써야 한다. 또 청동, 백동 등 거울 재질에 맞춰 연마 강도도 조절해야 한다. 여기에 들기름 적당량을 발라야 광택도 얻고 녹스는 것을 막는 효과도 볼 수 있다. 작업 과정에 숙련도와 전문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전문성은 거울을 만드는 ‘경장(鏡匠)’에서 또 다른 직업인 마경장이 일찍이 갈려 나온 이유다.
연산군은 조바심 내며 마경장을 찾았다. 거울 수집가 연산군? 아니다. 마경장이 손본 거울은 연산군을 모시는 기녀들이 썼다. 기녀가 많은 만큼 치장에 쓰이는 거울도 많았고, 그만큼 마경장도 많아야 했다.
그런데 마경장이 부족했다. 마경장이 부족해 거울이 불량했고, 기녀의 꾸밈 역시 불량했다. 흥이 깨진 연산군은 다음 날 불호령을 내렸다. ‘내가 마경장 15명을 대령하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호색한 연산군은 거느린 기녀가 늘어날수록 마경장이 절실했다.
윤두서가 애용한 백동거울 공재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거울이 부착된 경대(위 사진). 거울은 일본 에도시대에 제작된 백동경(白銅鏡)으로 전남 해남 녹우당에서 소장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거울 뒷면. 윤형식 씨 제공
마경장이 긴요했던 또 다른 이도 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1668∼1715)다. 윤두서 자화상은 여느 그림과 마찬가지로 붓, 물감, 종이로 그렸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재료가 하나 더 있다. 깨끗한 거울이다. 천재 화가는 거울 속에서 머리카락 한 올까지 찾았을 터. 윤두서의 거울을 갈고 닦던 마경장은 혼신의 힘을 다했을 법하다. 마경장 덕분인지, 윤두서 자화상은 잡티 하나, 수염 한 올도 놓치지 않았다.
고전소설 ‘최고운전’에서 최치원은 승상의 외동딸 나 소저를 보기 위해 남루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마경장 행세를 한다. 거울 간다는 외침을 들은 나 소저는 유모를 통해 낡은 거울을 맡긴다. 마경장은 숫돌과 참기름을 지고 ‘최고운전’의 최치원처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골목을 누비며 거울을 갈았을 것이다.
18세기에도 마경장은 조선의 골목을 누빈다. “떠오르는 달을 보면 거울 가는 법을 깨닫게 된단 말씀이야.”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이 ‘추재기이’에 기록한 절름발이 마경장의 말이다.
마경장과 비슷한 직업으로 마광장(磨光匠)이 있다. 마광장은 옥새부터 악기까지 온갖 물건을 빛나게 하는 광택 전문가였다. 경장, 마경장, 마광장은 다른 듯 닮았다. 세 직업은 조선을 누비며 방방곡곡을 오래도록 빛나게 했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