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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묵상글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 나의 꿍꿍이속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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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30 03:51
- 나의 꿍꿍이속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어저께 대천사 축일을 맞아 치품천사(세라핌 천사)를 주십사고,
그리고 저도 치품천사가 되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오늘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환대를 거절한 사마리아인들을
불살라 죽이려는 얘길 들으니 즉시 불을 어떻게 써야 하나 그것과 연결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늘의 불은 엉뚱한 데 써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불사르는 데 써야 올바로 쓰는 것이지요.
분노에 쓰지 않고 사랑에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불을 사랑에 쓰면 성령의 불이 되고,
분노에 쓰면 악령의 불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불을 분노에 쓰라고 주님께서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걸 보며 느낀 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는 것은 야고보 요한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우리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해 화가 납니다.
그리고 앙심을 품고 어떻게든 앙갚음하고 싶습니다.
이것도 문제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약점이라고 봐줄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주님도 자기들과 같으실 거라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가르침은 이빨도 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6장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라,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기껏 가르치셨고, 당신 말씀을 꼭 실행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그 가르침이 이들에게 하나도 먹히지 않은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과 같은 9장에서 그러니까 지난 주간 복음에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신 다음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며
“귀담아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도 하나도 먹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에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라고 하는데
죽으려고 예루살렘에 가시고 하늘에 오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신다고 아무리 수난 예고를 해도 그 말씀이 조금도 먹히지 않습니다.
다 자기식대로 이해하고 자기 꿍꿍이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님은 죽으러 그리고 하늘에 오르려고 예루살렘에 가시는데
그들은 거기서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꿍꿍이속입니다.
주님과 꿍꿍이속이 다른 우리는 아닌지,
주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먹히지 않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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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루살렘에의 여정
“파스카의 여정, 십자가의 길”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시편1,2-3)
오늘 루카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긴 여정(9,51-19,28)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파란만장한 여정이 펼쳐지는 지요. 파스카의 여정이자 십자가의 길이요 우리의 복잡다난한 파스카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현자 다산의 말씀입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며 돌아볼 줄 모른다면 돌아올 수도 없게 된다.”
이래서 미아(迷兒)가 되지 않기 위해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파스카의 여정, 회개의 여정을 사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각자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과 영적 예루살렘에의 여정에 동반자들입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우리 삶의 궁극 목적지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의 진술이 장엄하고 의미심장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9,51)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오를 부활과 승천까지 내다보고 계신 주님입니다. 목적지 예루살렘은 십자가의 죽음과 동시에 부활, 승천의 장소가 되고 새로운 시작의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지가 됩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실현될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의 그날을 내다보는 즈카르야 예언자의 말씀이 고무적입니다. 이런 영광스런 그날에 대한 희망이, 비전이 예수님을 자발적 기쁨으로 파스카의 여정에 오르게 하셨음을 봅니다.
‘많은 민족들과 강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에서, 만군의 주님을 찾고,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러 오리라. “자 가서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자. 나도 가겠다.” 말하리라, 그때 저마다 우리의 옷 자락을 붙잡고,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하고 말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향한, 파스카의 여정중인 예수님은 이런 영광스런 희망의 미래를 내다봤음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이 우리에게 상징하는바 내 몸담고 있는 파스카의 교회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예루살렘을 찾듯이 무수한 사람들이 영혼의 본향집같은 수도원을, 교회를 찾습니다.
이런 영광스런 희망을 앞당겨 살기에 파스카의 여정도 아연 활기를 띠게 됩니다. 빛을 향한 여정이기에 결코 우울하고 좌절감에 싸인 어둔 분위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중에도 이런 영광스런 희망이 예수님을 용기백배하게 했을 것이며 지칠줄모르는 샘솟는 열정을 가능하게 했을 것입니다.
잠시 감동적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느 자매님이 제 세권의 책을 거금을 들여 찾는 이들에게 선물하라 많은 양을 제본해 택배로 보내 줬고 이어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처음 신부님 책 봤을 때, 가슴뛰는 설레임이 좋았습니다. 지금 역시 강론 말씀 볼 때 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나도 순수와 열정으로 충만한 자매님을 보면 가슴이 두근두근 뜁니다.”
격려성 사랑의 덕담입니다.
“아버지, 찬미영광 영원히 홀로 받으소서.”
정말 이런 순수와 열정으로 충만할 때, 파스카의 여정도 기쁨과 행복의 여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 고마운 분이 있어 배한박스 선물로 보냈고 주고받은 메시지입니다.
“배맛이 웬만한 책맛보다 훨씬 낫지요! 하느님의 살아 있는 작품이니까요. 그래서 책내고 싶은 생각이 말끔히 사라졌답니다. 잘 잡숫고 힘내세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잘 먹고 건강할게요.”
세상에 하느님 아닌 그 누구가, 그 무엇이 이런 생명의 먹거리 맛있는 배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지요?
그래서 더욱 길이자 진리요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빛나는 주님의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않는, 또 태풍을 미풍으로 만드는 분별의 지혜, 사랑의 지혜입니다. 길을 막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불같이 분노하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묻는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처신이 참 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가셨다.’
지도자의 분별력의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사실 사도행전(8,4-25)에서 보다시피 사마리아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박해로 피신했을 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불필요한 충돌을 자초함으로 문제를 확대시키는 것,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는 것 만큼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부활과 승천의 영광스런 앞날에 대한 비전이, 희망이 예수님의 분별의 잣대가 되었음을 봅니다. 이런 분별력의 지혜는 모든 덕의 어머니가 되고 본말전도, 주객전도의 어리석음을 예방합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파스카의 여정’중에 있습니다. 파스카의 여정에 빛나는 모범이 성인들입니다.
오늘 9월30일 우리는 성 예로니모 학자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인은 341년 달마티아(현재의 크로아티아) 스트리드에서 태어납니다만 활동 반경은 로마, 시리아, 콘스탄티노플, 베들레헴등 참으로 광범위했습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파스카의 여정을 살았던 성인은 그가 세운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419년 9월30일 72세로 선종합니다.
성 예로니모는 까칠하기가 사막의 선인장같은 성인이었습니다. 사제품을 받았지만 미사를 드린 적은 한번도 없었으며 그를 시중드는 상류층 열심한 자매들이 동행했습니다. 성인은 결코 온유하거나 다정한 분이 아니었고 적들도 많았으니 성격으로 자초한 것입니다. 새삼 성덕의 잣대는 착함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한결같은 열렬한 사랑에 있음을 봅니다.
성 예로니모의 주님 사랑은, 교회 사랑은, 성경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인이 얼마나 성경을 사랑했는지 다음 말씀도 감동적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경을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감싸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의 혀는 그리스도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들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인의 불후의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히브리어 원문에서 직접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 성경입니다. 불가타 성경 말고도 엄청난 분량의 서간과 저술이 있고, 라틴교부들중 가장 박학했으며 성 아우구스티노만이 성인을 능가할 정도 였습니다. 그리하여 성 예로니모는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4대교부에 속하며, 신학교의 수호성인,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성인들은 물론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을 따라 파스카의 여정,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공적 파스카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예레15,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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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 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을 굳히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는 말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했던 그리짐산을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고자 하시기에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이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이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걷는 길이 비록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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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성소 국장으로 있을 때 만났던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했습니다. 일도 만족했고, 급여도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직장생활인데 늘 마음은 허전했다고 합니다. 사제가 되고 싶은 열망이 좋은 직장을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다시 공부하여 신학교에 입학했고, 드디어 그토록 소망했던 사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만났던 신부님은 말이 없고, 차분했습니다. 그렇게 8년간 사제 생활을 하던 중 몸에 이상이 있어서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당장 사목을 그만두고 쉬라고 했습니다. 1년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병원에서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차 안에서 신부님은 3시간을 울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하느님께 대한 원망도 있었다고 합니다. 좋은 직장도 그만두고 사제가 되었는데 하느님께서 큰 시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구장님의 배려로 미사만 드릴 수 있는 곳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쉬면서 병원에 다녔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 고생했습니다. 기억력이 나빠져서 사제관에도, 성당에도 적어서 붙여 놓았습니다. 다행히 신부님의 사정을 잘 아는 주방 자매님이 신부님을 위해서 식단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치료받으면서 기적적으로 몸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지난번 인사이동으로 이제 새롭게 본당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처음 저는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련이 있었기에 2년 동안 열심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기쁘게 떠납니다.” 선한 눈망울의 신부님을 생각하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사목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야 할 때를 알았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갈 뜻을 굳히셨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고, 제자들에게 3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는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주셨고, 갇힌 이들을 풀어 주셨고, 억눌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사람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배를 저어가는 선원입니다. 직책이 다를 수 있고, 하는 일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배가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와 교만’은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과 분노’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배가 방향을 잃게 만듭니다. 무엇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순탄하게 노를 젓게 할까요? ‘겸손과 사랑’입니다. ‘친절과 온유’입니다. ‘용서와 화해’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예로니모 사제는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성경을 라틴어로 옮겨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접하게 한 분입니다. 우리도 성 예로니모처럼 말씀 안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속에서 힘과 위로를 받고, 말씀 속에서 겸손과 사랑을 배우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노 저어 가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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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프란치스칸들의 대안적 정통성(정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29일 월요일- 마흔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프란치스칸 증거와 실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예수님이 이론이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따르고 살아내야 할 분이셨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그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중시하던 것들과는 다른 가치에 주목했습니다. 마침내 복음적 삶에 대한 그의 예언적 증거와 강조는 프란치스칸 전통을 통해 "대안적 정설"이 되었습니다. 리처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프란치스코의 삶에 관한 가장 초기의 이야기들 중 하나를 보면 프란치스코는 초기 형제들에게 다음의 지침을 주었다고 전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행하는 것만큼만 알 뿐입니다." [1] 행동하지 않으면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인 것이지요. 행위와 실천, 그리고 삶의 양식에 대한 그의 강조는 그 시대에 혁신적이며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다주었으며, 프란치스칸 대안적 정통성의 심장부에 고스란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그의 가장 가까운 영적 친구인 클라라에게는 예수님이 이론이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따르고 살아내야 할 분이셨습니다.
그때까지 그리스도교 영성 대부분은 대개 금욕적이고 수도승적인 훈육이나 기도의 이론, 혹은 학문으로서의 신학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종종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낼 수 있는 실천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바른 믿음"이나 전례 책자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단순히 예수님의 신성을 경배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닮고 사랑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전적인 전환이었던 것입니다.
역사를 거치면서 프란치스칸 학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더 커다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볼 때 주류가 아닌 소수자의 입지를 취해 왔지만, 단죄되거나 이단으로 간주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 사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의 가르침과 삶은 정통적인 가르침과 삶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프란치스칸 학파는 단순히 새로운 시각과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다른 가르침에 강조점을 두었던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육화가 지닌 함축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칸들에게는 육화가 단순히 예수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현현되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한 대로, "온 세상이 우리의 수도원입니다!" [2] 프란치스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를 단지 역사적 사건이나 특정 인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즉 육화는 단지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교리적 선언을 넘어서, 하느님이 세상과 인간의 고통에 깊이 참여하신 사건이며, 그 결과로 세상 전체가 거룩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시작점은 인간의 죄성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이었고, 예수님 안에서 그 고통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점이 가톨릭 교회의 다른 교의나 체제와 전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의 그리스도는 한편으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우주적인 분이셨고, 그의 대성당은 창조된 세상 그 자체였으며, 그는 위쪽보다는 밑바닥을 선호하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내부자 집단보다 외부자들에 대한 포용을 강조하였고, 도덕주의자라기보다 신비주의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프란치스코는 개인적 완벽함보다 자아의 가난(에고를 비우는 일)을 선호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분의 가난으로 인해 부유하게 되었다"(고린도후서 8:9)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프란치스코가 제삼의 길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언자이자 신비주의자로서의 창조적이고 용기 있는 역할을 강조하는 길입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모든 예언자가 말하는 바를 반복했습니다. 즉,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단순히 말로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하거나 제한하는 대신 그 전달 방식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내용(메시지)보다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전달 방식)에 더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달 방식'은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는 복음을 말로 설명하거나 교리적으로 정리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말로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흔히 '사제의 역할'이라 여겨지는 것인데, 사실 프란치스코는 절대 그런 역할을 원치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말로 하는 올바른 가르침(정통 교리)보다 행동으로 하는 올바른 실천(정통 실천)을 우선시했으며,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병행이었습니다. 예언자는 언제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왜 실천하지 않습니까?”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가 일곱 살 되었을 때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저는 중산층의 삶을 살다가 수피리어 호수 근처에 있는 숲속으로 이사를 가 거기에서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가난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 한적한 숲에서 거니는 것이었고, 또 다른 동료 피조물들과 동등한 존재로서 하느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순간과도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식물들과 동물들과 대화하는 놀라운 감수성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람쥐와의 동행은 외로움과 상처를 치유하는 영적 치료의 통로가 될 정도였습니다!
—Sean K.
References
[1] Paraphrase of “A person is only as learned as his actions show; and a religious is only as good a preacher as his actions show.” See The Assisi Compilation, 105, in Francis of Assisi: Early Documents, vol. 2, The Founder (New City Press, 2000), 210.
[2] The Sacred Exchange Between Saint Francis and Lady Poverty, no. 63, in Francis of Assisi: Early Documents, vol. 1, The Saint (New City Press, 2001), 552.
Adapted from Richard Rohr, Eager to Love: The Alternative Way of Francis of Assisi rev. ed. (Franciscan Media, 2024), 81–84, 86, 87.
Adapted from Richard Rohr, Eager to Love: The Alternative Way of Francis of Assisi rev. ed. (Franciscan Media, 2024), 81–84, 86, 8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Tom Swinnon,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낡고 오래된 식탁은 프란치스코의 삶의 방식, 즉 그의 단순성과 겸손함, 그리고 연대로서 살아내는 가난에 대한 겸허한 예언을 상징합니다. 이 식탁은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가난한 이들과의 친밀함과 삶의 단순함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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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의 고통을 직면할 수 있는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단자들’로 간주했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후, 이방 민족과 혼합된 종교와 관습이 자리 잡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이 사마리아 지역을 자기들 '민족의 오점'처럼 여겼고,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순수한 신앙을 훼손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북쪽 갈릴래아에서 남쪽 유다 지방 사이에 사마리아 지역이 위치해 있었기에 유다인들은 갈릴래아에서 유다 지방으로 갈 때 사마리아를 거쳐 가는 길이 가장 짧은 지름길이었지만, 대개 두 배나 걸리는 우회길을 택했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지역을 거치게 되면 겪어야 할 갈등과 위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름길을 택하신 이유는 시간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는 그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겁니다. 바로 가는 길이었으니까요....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자연스러운 길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 삶에도 우리가 가장 약하고, 혼란스럽고, 상처받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도 반드시 마주해야 할 '사마리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엉망인 부분'은 단지 고통의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 은총이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그곳을 외면하지 않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마주할 때, 진정한 치유와 변화가 시작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폭풍은 길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을 닦아 주기 위해서 옵니다."
그리고 철학자 니체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우리를 죽이지 않는 고통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모두가 동의할 진리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헤쳐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당장의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고통을 직면할 수 있는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 삶을 동반해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되뇌는 토마스 머튼의 묵상 글을 나누겠습니다. 일전에도 한두 번 나누었던 내용입니다만, 오늘 다시 한번 나누고 싶습니다.
"저의 주 하느님,
저는 지금 제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제 앞에 놓여 있는 길을 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이 길이 어디서 끝나는지도 알지 못하며
저는 저 자신도 알지 못하고
제가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도
제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제가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바람(소망)은
실제로 당신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저는 제가 하는 모든 일 안에서 그 희망을 견지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 희망을 저버리게 하는 어떤 것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압니다.
제가 이렇게 한다면
저에게 어떤 길이 펼쳐질지 모를지라도
당신께서 저를 바른길로 이끄시리라는 것을.
그러므로 비록 제가 길을 잃고 죽음의 그늘 밑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저는 항상 당신을 신뢰할 것입니다.
저는 두려워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늘 저와 함께 계실 것이며,
제가 겪는 위험 속에 저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니 힘이 나지 않습니까?!!
오늘도 용기를 내어 이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오늘, 지금, 이 순간이라는 선물을 감사로이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여정에 늘 동반해 주시는 이 주님은 우리 곁에 이 여정을 기꺼이 함께할 도반(道伴)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도반들이란 우리 가족이고 우리 친구들이고 우리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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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루카 9,52-53)
복음을 선포하고 거부당하는 경험을 통해 성숙하는 제자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베풀어진 은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장차 온 세상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온갖 고을과 마을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악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 그들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에 몹시 분개할 때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그들을 꾸짖으신 것은 모두 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복된 소식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 오래 참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함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심부름꾼은 적대하는 자들에게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거리를 해서는 안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제까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려 하거나 내 것이 되려 하지 않던 것들이 더 이상 모습을 감추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지혜와 힘이 넘칠 것이고, 만물은 그분과 하나가 되어 똑같아질 것입니다. 시온은 진정한 선각자, 곧 “하느님을 본 자”를 뜻하는 “참 이스라엘”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 안에서는 어떠한 것도 감추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사람은 하느님께로 인도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것들이 하느님 안에서 내게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면, 내 안에서 어떠한 상도 열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은 우리에게 신성이나 하느님의 본질을 활짝 열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이나 닮은 것이 여러분 안에 남아 있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거든, 안으로든 바깥으로든 간에 상이라는 것이 여러분 안에서 드러나지 않게 하십시오. 이 말은 여러분 안에 감추어진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478)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X.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을 거슬리는 것들에 대하여
둘째 항목.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있어 미지근함(
묵상
“네가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 요한 묵시록 3장 16절
“주님의 일을 태만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 예레미야서 48장 10절
이는 하느님의 일을 미지근하게 하는 자들에 대한 무서운 책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은 응답을 요구하십니다.
적용
성심께 대한 진정한 신심과
영적으로 나태한 상태는 결코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자리를 내어줘야 합니다.
내가 뜨거운 열심을 원하고,
내 영혼을 은근히 마비시키는 영적 무기력을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실질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매달 첫 금요일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한다.
기도 사도직에 가입하고,
매달 발행되는 “10일 소책자”와
“성심 메신저”를 읽는다.
→ 이는 우리의 성심 신심을 꾸준히 유지하게 도와줍니다.
성심회가 본당에 있다면 가입한다.
소책자에 나오는 ‘성심의 3단계’를 실천한다.
이 네 가지를 실천하면, 당신의 삶은 지금과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애정과 결심
“주님, 성심에 대한 신심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저도 제 안에서 실현할 수 있게 해 주소서:
‘미지근한 자는 뜨거운 열정의 사람으로 변할 것이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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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지난주에 프랑스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순례를 떠나기 전, 순례에 함께할 사람들에게 ‘프랑스’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제일 많은 대답이 ‘에펠탑’이었습니다. 그만큼 전세계의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에펠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랑받던 에펠탑은 아니었습니다.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주년과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해서 건립한 에펠탑은 건립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시민의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고풍스럽고 예술적인 건물들로 가득한 파리라는 도시에 딱딱하고 차가운 대형 철골 구조물이 들어서는 게 전혀 아름답지 않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에펠탑은 점점 파리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명실상부한 파리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에펠탑 효과’라고 합니다. 처음에 싫어했던 대상도 자꾸 보다 보면 호감도가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싫어하는 대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신 보지 않겠다’라면서 안 보면 될까요? 이런 방법도 있겠지만, 더 좋은 방법은 더 자주 보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며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창조 목적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대표 작가인 기 드 모파상은 에펠탑이 너무 꼴 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에펠탑 밑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파리에서 에펠탑을 볼 수 없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싫다고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가까이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들어가려 합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오랜 갈등과 적대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짐 산을 성소로 여기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시려고 하므로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도 배척의 마음입니다. 심판과 응징으로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반대편에 있는 폭력과 보복의 논리를 거부하십니다. 그래서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시면서, 자비와 인내의 길, 사랑의 길을 선택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계속되어야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가 있습니다. 정말로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앞선 말씀드린 ‘에펠탑 효과’를 이용해 보세요. 그런 노력에 주님께서도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진정으로 기쁨을 누리는 길은 스스로 훌륭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겁니다(스티브 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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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대중적인 라틴 말로 불가타 성경을 번역한 사제 학자 교부 /
성 예로니모는 347년경 현재 보스니아의 그라호보의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12살 무렵부터 로마에서 수사학과 고전 라틴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지식은 물론 고대 학자들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 업적으로 명성을 얻고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은 후,
오늘날 독일의 트리어에서 정부 관리로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 주교가 유배를 와 전파한
동방 수도생활을 접하고 크게 감동해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철저한 수덕생활을 실천하려는 중 375년 사순시기에 꾼 꿈속에서
재판관이신 주님을 뵙고 삶의 결정적 전환점인 회심을 하였다.
그 후 사막으로 가 은수생활을 하며, 성경 언어 연구 매진하였다.
379년 봄에 그는 안티오키아의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는 로마로 돌아와
교황 성 다마소 1세의 비서로 임명되어 교황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교황은 그에게 신구약 성경 모두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당시에도 이미 여럿 라틴어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성 예로니모에게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경본을 다시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다.
한편 성인은 번역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영적인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팔레스티나로 간 그는 386년 여름부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여러 수도원을 세우는 데 경제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리고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도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도 맡았다.
그 뒤로 성인은 베들레헴에서 34년 이상 성경 번역 활동에 몰두하며
당시 몇몇 이단적 가르침을 반박하는 글도 발표하였다.
성 예로니모의 가장 큰 업적은 교황 성 다마소 1세의 명을 받은 때부터
405년 완역 때까지 계속된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신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고,
구약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였다.
이 성경이 ‘대중적’이라는 뜻인 ‘불가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성 예로니모 당시가 아니라 13세기경이었다.
이유는 성인의 번역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할 뿐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가타 성경을 통해서 중세 유럽인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성찰하는 법을 배웠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16세기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 번역본을 교회의 공식적인 라틴어 성경으로 인정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성인은 406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번역 일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도 남겼다.
420년 9월 30일에 성 예로니모도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성인은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박학한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동시대 사람 중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탁월한 인물로,
신학교의 수호성인은 물론, 수덕 생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은 그물과 같다.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올려, 좋은 것은 모으고 나쁜 것은 던져 버린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성인은 ‘이사야서 주해’ 서문에서,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과 같다.’ 라고 기록했다.
그는 암브로시오, 그레고리오,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방교회 4대 성인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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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큰 사랑으로 참고 기다리고 넓디넓은 예수님 마음 /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서는 사흘 정도 걸리는데 사마리아를 질러가야 했다.
그런데 그 지방은 과거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렸을 때 북에 속해 있었다.
이 지역은 일찍이 아시리아 침공 이후 혼혈 지역이었고,
혼합 종교를 신봉하던 터라 유다인들은 그들과 상종하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사마리아 지방인들은 주님을 섬기는 장소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그리짐 산이었기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 일행을,
그리 반갑게 맞을 수가 없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정하시고는 심부름꾼들을 당신에 앞서 미리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위해 사마리아인의 마을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에.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마을로 돌아서 갔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러모로 의기양양하였다.
그동안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하고 능력을 보았기에.
그들은 그분과 함께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임금이 되시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시대가 오리라는 기대마저 가졌을지도.
그런데 ‘예루살렘 가는 그 길’이,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막힌 거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들른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그리 달갑게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장차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의 그 왕림을 거부하였던 거다.
우리의 영적 여정 중에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오는지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믿음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하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는 사마리아인들의 그 태도에 “저들을 불살라 버립시다.”라고 예수님께 물었지만,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당신의 길을 다른 길로 가셨다.
그것은 유다인들의 일반 정서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에게까지 아무런 차별이나 편견을 가지지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을 그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거부하자 제자들이 격분한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힘과 세력을 느낀 제자들은
이번 기회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고 싶었으리라.
가뜩이나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마리아인들이
여느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을 막으니,
그들을 혼내 주는 게 마땅했을 게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다른 이방인보다는 조금 더 가깝게 생각했어도,
절대 동족으로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방인으로 멸시하였다.
거기에 들어서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냉대 받는다.
이에 화가 난 제자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 사람들을 불살라 버리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것은 그분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러 오셨고,
세상을 벌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에.
예수님의 길은 정의를 내세워 폭력으로 누르고 뚫고 가는 길이 아니다.
사랑의 길이 당당히 아니면 돌아서 가는 것이 그분의 여정의 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다리고 참으며 끝내 사랑하는 것이 그분이 지니신 마음이다.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잠재된 분노와 폭력성이 정의라는 탈을 쓰고 종종 그 얼굴을 드러낸다.
이런 예수님의 큰마음을 우리는 언제 배울 수가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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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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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슬로우 묵상] 다른 길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루카 9, 56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마음을 굳히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그분의 결단 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었다. 종교적, 정치적 권력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구조적 불의가 집약된 곳으로 향하시는 예언자적 행보였다.
그런데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이 짧은 설명 속에 긴 역사의 아픔이 담겨 있다. 사마리아인들의 눈에 예수님은 그저 또 한 명의 유다인일 뿐이었다. 수세기 동안 쌓인 차별과 멸시, 종교적 배제의 상처가 그들로 하여금 방어적 거부의 벽을 쌓게 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며 우리 일상의 모습들이 겹쳐진다. 부서장이라는 직함 하나만으로 부서원들에게 거부당하는 상황들, 앞에서는 예 하면서도 뒤에서는 험담하는 모습들. 아무리 선의로 다가가도 좋게 보지 않는 시선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교회 이야기만 나와도 고개를 돌리는 모습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구조가 만들어낸 상처의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거부당했을 때 느끼는 분노와 보복의 충동, "배은망덕하다", "저들이 몰라서 그래"라며 상대방을 단죄하고 싶은 마음.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신다.
이 꾸짖음 속에 깊은 지혜가 담겨 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거부가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깊은 상처에서 비롯된 방어기제임을 아셨던 것이다. 그들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 거부 뒤에 숨은 아픔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계셨다. 그래서 폭력으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다른 마을로" 향하신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나에게 깊은 가르침을 준다. 거부당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는 현존의 영성을 실천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는 의도를 내려놓고, 그들의 고통과 상처 앞에 온전히 머무르는 것. 판단하지 않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무조건적 현존 말이다.
상처받은 치유자로서의 자세도 중요하다. 우리 자신의 상처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나도 거부당한 경험이 있고, 나도 상처받았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완벽한 치유자가 아닌, 함께 치유받아가는 동반자로서 존재하는 것.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설명보다 함께 있어줌이 더 큰 치유의 힘을 갖기도 한다.
기다림도 필요하다. 상대방의 마음이 열리는 하느님의 시간을 존중하고, 우리의 시간표가 아닌 그들의 내적 리듬을 인내롭게 기다리는 것. 이는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무력함에서 진정한 힘이 나온다. "내가 그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일하실 공간을 만들어드리는 것이다.
일상의 작은 친절함들도 소중하다. 진심 어린 인사, 따뜻한 관심, 진정한 질문들이 조금씩 쌓여서 마침내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기비움의 모습처럼, 내 입장과 명예, 내가 옳다는 주장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 할 때 진정한 만남이 일어날 수 있다.
결국 무엇을 "하기 doing"보다는 "되기 being"에서 답을 찾게된다. 완벽한 답을 가진 사람이 되려 하지 말고, 함께 길을 찾아가는 순례자가 되는 것. 사마리아인들의 거부를 받으시고도 폭력으로 응답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다른 길을 찾으신 예수님처럼, 거부당하는 아픔을 이해하고 그 상처를 껴안으며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것.
오늘 이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묻는다. 거부당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분노하고 보복할 것인가, 아니면 그 거부 뒤에 숨은 상처를 이해하고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걸어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 이 짧은 문장 속에 담긴 깊은 지혜를 오늘도 묵상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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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찼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수난이 가까이 왔음을 드러냅니다.
갈릴래아에서 전도 여행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지리상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사마리아는 목적지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가기 위한 경유지라는 이유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보다는
예루살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래서 사마리아는 무시하시는 것처럼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에
자신들에게 머무시면서
많은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무너지자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이에 야고보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에게 벌을 줄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대접을 받으시는 것이 부당하다고
야고보와 요한은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겉으로 드러난 방식만 다를 뿐
사마리아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
막강한 힘을 가지신 왕으로
사마리아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것은 기적으로 드러나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화려한 왕으로서
다윗성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꾸짖으신 것은
그리고 그분을 거부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가시는 것은
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화려한 영광이 아니라
수난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심을
당신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의 기대, 화려한 왕에 대한 기대에 미치지 못해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그 오해가 죽음을 불러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방식이 지금 당장은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선택은
항상 우리를 위한 것임을 생각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그 방식에 잠시 머무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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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30.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9,51-56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오늘 복음은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는 말씀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감히’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을 향해 큰 분노를 터뜨리며 보복하려고 드는 걸 보면 말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고 여기는 그들의 독선을, 자신과 다른 입장과 생각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편협함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의 선택을 존중하시며, 멀고 힘들어도 다른 길로 돌아가는 쪽을 택하십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신 것이지요.
당시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한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를 적대시하며 배척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민족들의 침략과 유배라는 슬픈 역사 때문이었는데, 어느 새 그 아픈 기억은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미움만 남았지요. 또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은 데에는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전례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전례는 그들이 유일한 구원의 도성이라 여기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비해, 사마리아인들은 솔로몬이 직접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이민족들의 침략으로 완전히 부서져 그 기능을 상실했으니, 이제는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순명을 통해 번영을 약속받은 그리짐산을 중심으로 전례를 거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고 하시니 그분 일행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모든 전례가 그리짐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신들의 원칙을 거스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런 모습을 보고 크게 분노하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겉으로는 자기들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배척당하신 것에 화를 내는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충정에서 우러나온 분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지요. 이방인과 어울려 사는 부정한 놈들이 감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들 전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듯한 모습에 화가 났던 겁니다. 물론 예수님도 때때로 분노하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는 그들의 분노와는 결이 다릅니다. 그분께서 성전 상인들을 쫓아내신 것은, 위선에 빠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당신 말씀을 따르지 않는 세 고을 사람들을 보며 탄식하신 것은 그들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시는 선의와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의 분노는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굴복시키려드는 교만과 독선에서 우러나왔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신 것이지요.
혹여 우리도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편협한 마음을 지니고 있지는 않은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방을 굴복시켜 내 뜻을 따르게 만들려고 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대한 믿음 안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사랑과 포용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여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뤄나가야 할 참된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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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62
9월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연중 제 2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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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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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의정부교구 오재우 미카엘(목동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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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의 방식은 철저하게도 사랑과 자비, 인내와 용서, 헌신과 봉사였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슬슬 활기찼던 공생활 기간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준비를 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각만 해도 살 떨리고 치가 떨리는 고통과 수난,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이니, 그 길을 묵묵히 올라가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셔야 했으므로. 당신에 앞서 선발대를 보내셨습니다. 숙소도 알아보고, 식사할 장소도 알아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주 냉정하게 일언지하에 예수님과 그 일행의 숙박을 거절합니다. 당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개와 고양이 지간이었습니다. 서로 쳐 죽여야 할 족속들이라고 불목했습니다.
선발대 제자들 가운데 유독 불같은 성격이었던 두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야고보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냉대 앞에 그야말로 완전 빡쳤습니다. 두 제자는 씩씩대고 길길이 뛰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사실 예수님으로부터 기적과 치유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사마리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능력을 소유한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폭력성이 아직도 남아있는 야고보와 요한을 크게 꾸짖으십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노선은 철저하게도 비폭력, 평화주의였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인류의 구세주 예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이 세상의 왕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 얼마나 큰 위로요 기쁨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그 방법이 총과 칼, 핵무기와 미사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 인내와 용서, 헌신과 봉사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방식은 어떤 것입니까? 원수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이웃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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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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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 9장 51-56절을 통해 예수님의 참으로 인상 깊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말씀은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합니다. 하루로 치자면 저녁, 곧 삶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잠이 죽음과 같듯이, 예수님은 당신 삶의 마지막, 죽음과 부활이라는 큰 목적을 향해 단호히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 하셨을 때,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려 하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은 분노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루카 9,54)
그들은 작은 일에 쉽게 분노하고, 감정에 휩쓸려 무모한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셨지만, 이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룻동안 얼마나 자주 작은 일에 감정의 노예가 되고, 일희일비하며 평화를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오늘 이 강론을 통해, 우리가 하룻동안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예수님처럼 의연하게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서른아홉 살 젊은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려 하반신이 마비되는 절망적인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의사는 그에게 남은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할 것이며, 정치 경력은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앞날이 창창했던 한 청년의 꿈과 희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이 그를 덮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상상하기도 힘든 고통과 좌절감에 사로잡힐 만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루스벨트는 여기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미국 국민을 위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굳건한 신념은 단순히 개인적인 강인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뉴욕 주지사 시절부터 '작은 사람들을 위한 큰 정부'라는 명확한 정치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아마비로 고통받으며 스스로 약자의 입장을 경험한 것이, 그를 더욱 확고하게 '모든 시민의 복지를 책임지는 정부'라는 대의명분에 헌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국가의 위기 극복과 국민의 삶 안정'이라는 명확한 최종 목적을 향해 의지를 굳건히 하며 흔들림 없는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수많은 비난과 역경에 직면했지만, 그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육체적 고통이나 당장의 언론 비판, 정치적 공격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국민을 구하고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목표에 집중했습니다. 개인의 감정이나 불편함에 휩쓸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삶은 개인의 고통과 외적인 역경에도 불구하고, 더 큰 목적을 위해 감정을 통제하고 나아간 지도자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명확하고 굳건한 목적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매일의 감정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의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다 27년간의 긴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부당함과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그는 감옥 안에서도 분노나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틈틈이 공부하고 운동하며 '자유로운 남아공의 대통령'이라는 확고한 최종 목적을 향해 자신을 단련했습니다. 그가 출소 후 자신을 억압했던 간수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도, 개인적인 복수심보다 '남아공의 화합과 용서'라는 더 큰 대의명분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굳건한 의지는 당장의 감정을 초월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이제는 노인이 된 라이언이 전우들의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아내에게 묻습니다. "나... 잘 산 것 같아?" 그리고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는 평생을 고생하며 가족을 위해 살다가 늙어 아버지가 입던 옷을 껴안고 독백합니다. "아버지... 저 잘 살았죠? 그런데 억수로 힘들었어요..." 이 두 장면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묻고 답합니다. 그들의 삶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라고 하신 말씀과는 다르지만, 그들 나름의 충실한 삶의 마무리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마지막'이 있었기에, 그들은 살면서 겪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 그리고 당장의 감정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최종 목적이 명확했기에, 지금의 고통이나 분노가 그들의 길을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마지막'이라는 목적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이 모든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의 감정에 너무나도 쉽게 휘말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야고보와 요한처럼, 작은 분노에도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적들을 없애버리려 할 만큼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은 '마지막'이라는 목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끓어오르는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삶의 궁극적인 목적, 곧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마지막을 향해 마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이 마지막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의 감정에 너무나도 쉽게 휘둘리고, 작은 일에도 분노하며, 평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대학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문제집 몇 문제 틀렸다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삼습니다. 마지막 시험이 있다는 말은 사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루엔 잠이고, 일생엔 죽음입니다. 이 시험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은 오늘 감정에 휘둘릴 시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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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성소 국장으로 있을 때 만났던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했습니다. 일도 만족했고, 급여도 충분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직장생활인데 늘 마음은 허전했다고 합니다. 사제가 되고 싶은 열망이 좋은 직장을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다시 공부하여 신학교에 입학했고, 드디어 그토록 소망했던 사제가 되었습니다. 제가 만났던 신부님은 말이 없고, 차분했습니다. 그렇게 8년간 사제 생활을 하던 중 몸에 이상이 있어서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당장 사목을 그만두고 쉬라고 했습니다. 1년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병원에서 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차 안에서 신부님은 3시간을 울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하느님께 대한 원망도 있었다고 합니다. 좋은 직장도 그만두고 사제가 되었는데 하느님께서 큰 시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구장님의 배려로 미사만 드릴 수 있는 곳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쉬면서 병원에 다녔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 고생했습니다. 기억력이 나빠져서 사제관에도, 성당에도 적어서 붙여 놓았습니다. 다행히 신부님의 사정을 잘 아는 주방 자매님이 신부님을 위해서 식단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치료받으면서 기적적으로 몸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지난번 인사이동으로 이제 새롭게 본당으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처음 저는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련이 있었기에 2년 동안 열심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기쁘게 떠납니다.” 선한 눈망울의 신부님을 생각하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사목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야 할 때를 알았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갈 뜻을 굳히셨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고, 제자들에게 3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는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주셨고, 갇힌 이들을 풀어 주셨고, 억눌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사람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이형기 시인의 시 ‘낙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배를 저어가는 선원입니다. 직책이 다를 수 있고, 하는 일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배가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와 교만’은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과 분노’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배가 방향을 잃게 만듭니다. 무엇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순탄하게 노를 젓게 할까요? ‘겸손과 사랑’입니다. ‘친절과 온유’입니다. ‘용서와 화해’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예로니모 사제는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성경을 라틴어로 옮겨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접하게 한 분입니다. 우리도 성 예로니모처럼 말씀 안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속에서 힘과 위로를 받고, 말씀 속에서 겸손과 사랑을 배우며, 하느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노 저어 가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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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예고하신 대로 고난과 죽음을 겪으실 것입니다. 억울한 죽음을 향한 여정이기에 슬프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루카 9,51)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영광으로 건너가실 것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기에 희망에 차 있습니다. 동시에 하느님 계획 안에서 이 죽음과 영광이, 그때가 자리매김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해서 신뢰에 차 있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운명을 느끼시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9,51). 이 구절을 굳이 루카 복음사가가 표현한 글자 그대로 우리말로 옮기자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기로) 얼굴을 고정하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 얼굴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곳을 보시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께 맡기신 사명만을 보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이 표현이 히브리 말 표현이고 루카 복음사가의 신학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이사 53장 참조) 모습을 지닌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50,7)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한 덕분에 당신의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주님의 종의 모습은,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예수님 마음속 숨겨진 힘을 우리에게 밝히 드러냅니다. 그분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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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51-56: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굳게 나아가시는 모습을 본다. 이는 곧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향한 결연한 걸음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거절을 만나신다. 이때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분노하며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망시키기를 원하십니까?”(54절)라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신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제자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 차이이다. 제자들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응징을 원했지만, 주님은 오히려 인내와 자비로 응답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복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거절당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다.”(In Matthaeum homiliae 54,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여정에서 반드시 마주할 거절과 냉대를 미리 체험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복수나 앙갚음이 아니라, 온유와 인내,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사실 우리 삶 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많다. 내가 선의로 다가갔을 때, 누군가가 나를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 또 때로는 나의 선입견과 편협한 판단으로 인해, 정작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내가 거절할 수도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경고한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말하면서도, 정작 그분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따른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2,5)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거절과 냉대를 당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는 주님의 은총을 내 기준에 맞추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는 중요한 교훈이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언제나 세상으로부터 환영만 받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비난과 거절, 심지어 박해까지 경험한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은 앙갚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전투적인 군대가 아니라, 상처 입은 이들을 싸매는 야전병원”이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주님은 당신을 거절한 이들을 불로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이는 포기의 길이 아니라, 더 많은 이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길이다. 우리도 삶 속에서 복음을 거부당하거나 무시를 당할 때, 분노나 실망 대신 주님의 온유와 자비를 배워야 한다. 또한 내 기준에 주님을 가두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한다. 오늘 미사 안에서 우리가 모두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신 예수님”(마태 11,29)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하여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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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이 갑니다>
루카 9,51-56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살림이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5-56)
살림이 갑니다
살림으로
첫걸음부터
마지막걸음까지
살림이 갑니다
살리기 위하여
죽으러
살림이 갑니다
죽으러 걸어도
살리러
살림이 갑니다
살아도 죽은 벗
살리러
살림이 갑니다
살림에 맞서도
살리고
살림이 갑니다
마지막걸음까지
첫걸음부터
살림으로
살림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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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접대하는 일.>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1)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바로 뒤에 나오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이야기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가 아니라, 당신의 실제 처지를 표현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중이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의 거부와 배척은 십자가 수난의 서막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부름꾼들을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보내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행의 숙소와 음식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마을의 사마리아인들이 맞아들이지 않은 것은, 당시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유대인 순례자들에 대한 반감과 적대감 때문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몹시 화가 나 있었던 것을 보면, 여기서 ‘맞아들이지 않았다.’라는 말은, 못 들어오게 막았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박해하고 모욕하면서 쫓아냈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심부름꾼들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그들은 자신들이 박해받고 모욕당한 것은 곧 예수님이 박해받고 모독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더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2)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는, “저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또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립시다.”입니다. 아마도 두 사도는, 사마리아인들이 메시아이신 분을 모독하고 박해한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한 일이라고 해도, ‘천벌 받아 마땅한 죄’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에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과 반감, 그리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과 업신여김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서 사람들에게 천벌을 내린 일은 엘리야 예언자가 한 일입니다.(2열왕 1,10-12) 두 사도가 그런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어떻든 두 사도가 몹시 화가 나서 어떻게든 앙갚음을 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것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모습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3) 우리는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예수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구세주’로 오신 분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과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는 이유로, 아무 때나 곧바로 천벌이 내렸다면? 용서와 자비가 없는 구세주는 구세주가 아닙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5ㄴ)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일은, 나중에 제자들도 겪게 될 일의 예고편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사도들이 선교활동 과정에서 거부당하고 배척당할 때마다 맞서 싸우고, 저주하고, 천벌이 내리기를 청했다면, 그러면 가는 곳마다 전쟁터가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면서 전쟁만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꾸짖으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4) 예수님께서 다른 마을로 가신 일은, 힘이 없어서 무기력하게 피하신 일도 아니고, 그 마을을 ‘버리신 일’도 아니고, 그 마을의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일종의 ‘무언의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낯선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접대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성경에 있습니다.(히브 13,2)>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는, 나중에 심판 때에, “우리는 그분이 메시아이신 줄 몰랐다.” 라고 변명할 텐데, 몰랐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마태 25,42-45) ‘사랑 실천’은 아는 사람에게만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친하든지 안 친하든지,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모든 사람에게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여서 숙소와 음식을 제공했다면, 그들은 ‘복음’을 전해 받았을 것이고, 그리고 만일에 그곳에 병자들이 있었다면 ‘치유의 은총’도 받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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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품을 키워야 합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기에 앞서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셨고,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요한 4,9)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에서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신명 11,29)
그리짐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니 야단을 맞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카 6,32-33)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 3,17) 예수님께서는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루가 19,10) 그리고 사도들도 역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꾸짖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 맞서지 않고 그저 당신의 일을 찾아가실 뿐입니다. 순리를 따라가십니다. 우리도 주변 여건,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기쁘게 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활동을 하다보면, 가끔은 이런저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향한 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이 먼저 커지게 되고,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다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에 화만 쌓이게 되고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먼저 품을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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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경로>
오늘 복음으로서 예수님의 전교활동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된다. 루카는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진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결심한 시점을 근거로 갈릴래아 활동기(루카 4,14-9,50)의 막을 내리고, 예루살렘 상경기(루카 9,51-19,28)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예루살렘을 향한 새로운 여정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9,44) 직후에 시작된 것은 사람의 아들은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필히 죽어야 하며, 이곳에서 필히 부활해야 함을 암시한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에 이르기 전까지 펼쳐질 예수님의 새로운 선교여행을 예고하는 것으로서, 분량으로 볼 때 루카복음의 1/3을 차지한다.
여행의 목적지는 분명 예루살렘이지만 이 여행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지도를 놓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경로를 설정한다면, 당연히 갈릴래아 호수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직선경로, 즉 갈릴래아->티베리아->사마리아->세겜(그리짐산 근처)->베델->라마->예루살렘의 경로를 택할 것이다.
예수님의 일행도 같은 노선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선발대를 먼저 사마리아 지방으로 보내어 묵을 곳을 찾게 하신다.(52절)
그런데 의외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을 노골적으로 거부한다.(53절) 사마리아 지방이 어떤 곳인가? 솔로몬의 통치 말기, 기원전 933년경에 히브리의 단일민족국가는 북쪽의 이스라엘왕국(수도: 사마리아)과 남쪽의 유다왕국(수도: 예루살렘)으로 쪼개진다.(1열왕 12,19)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의 침입으로 패망한 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히브리족의 정통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곧 야훼신앙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혼혈족이 되어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짐산에 새 성전을 세워 혼합종교를 신봉하였다. 따라서 정통성을 고수하는 유다인과 변질된 사마리아인 사이가 좋을 리 없다. 서로 냉대하고 적대시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예수의 일행을 거부한 처사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했던가?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냉대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늘에 청을 드려 불을 내리게 하여 저들을 불살라 버리자는 것이다.(54절)
이 대목은 구약의 엘리야가 북쪽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신을 섬긴 것 때문에 오십인 대장과 오십인 부대를 두 번씩이나 불살라 죽인 사건을 떠올려 준다.(2열왕 1,10-12)
제베대오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그들에게 붙여진 "보아네르게스"(천둥, 또는 폭풍의 아들들)라는 별명답게 다혈질적이고 강한 질투심과 명예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성격답게 이왕 가는 길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결판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두 차례의 수난과 죽음예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성공적인 상경과 예루살렘에서의 영광과 왕관이 번득이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이 두 제자의 야박한 마음과 잘못된 생각을 꾸짖으신다.(55절) 이 꾸짖음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경로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다.(56절)
실제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바로 관통하지 않고, 당시 데카폴리스 지방과 사마리아 일부 지방, 베레아 지방을 두루 지나(17,11) 예리고를 거쳐(19,1)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어떤 경로를 택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길을 가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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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병환 요한 신부님]
<폭력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예수께서 수난이 얼마 남지 않은 과월절이 다가오자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정하시고 제자들을 앞서 보내셨다. 제자들이 먼저 사마리아에 가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반대하였다. 왜 반대하였는지 그 이유는 말하지 않고 있다. 다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예수님을 맞아들임으로써 유다인(이스라엘인)들에게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예수님은 같은 동족인 유다인들과 극한 대립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기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다인들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역사를 보면 기원전 935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나서, 사마리아(북부 이스라엘 수도)가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먼저 멸망하였다.
멸망 당시 아시리아는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고, 훗날에는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사마리아에 들어와 같이 살게 되었는데 이로써 사마리아는 혼종이 된 이방인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후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고 적대시하였다. 그런 연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인 예수님을 꺼려했고, 또한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들어오심으로써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유다인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보복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극단적 행동을 하려고 하였다.
당시 제자들은 파견되어 갈 때 예수께 받은 신적 권능으로 그러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이 폭력으로 쓰여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폭력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적인 모든 박해와 방해를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여건과 어려운 환경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성실하게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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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당신이 보낸 화해의 손짓이 거절당했을 때>
살아가면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다툼이 생긴다거나 오해가 생겨서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지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많은 경우 속으로 그 갈등을 삭이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 또 용기를 내어 상대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절당했을 때 우리는 무척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해서 상대방에게 그 전보다 훨씬 더 미운 감정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아마 우리들의 일반적인 감정일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마음의 갈피를 잡아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해보면 그 답이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 사도는 몹시 화가 난 모습입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복음 9장 54절)
천벌이라도 내려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태워 죽이겠다고 흥분하고 있지요.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신 길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못 가게 막은 데에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름길에 위치해 있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거쳐 예루살렘을 가시고자 하셨는데 그 말을 전해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길을 막고 예수님 일행을 오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기네의 지름길을 이용하지 못하게 한 데에는 또 그만한 시대적 배경이 있습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아주 부정하게 생각했고 그들과의 접촉 자체를 거부하였으며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도 지름길인 사마리아의 길을 놔두고 우회하여 돌아갔고, 그들과 부딪히기라도 하는 날이면 부정을 탔다고 몹시 꺼려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이토록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원 전 937년 솔로몬이 죽은 후에 유다 왕국은 두 나라로 분열이 되지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이고 남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기원 전 870년쯤 북 이스라엘 왕국 제 5대 오므리왕은 왕국의 수도 자리를 물색하다가 세메르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해발 440m 정도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을 사게 됩니다. 이 산 정상에다가 길이 180m, 폭 90m의 왕궁을 건설했지요. 그리고 소유자였던 세메르의 이름을 본따 “사마리아”라고 했으니 이때부터 약 150년 동안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북이스라엘은 기원 전 721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망하게 되는데 이때 아시리아의 강요에 의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혼인을 맺고 그들의 신을 모시는 등 유다의 전통과 종교를 순수하게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에도 그들은 성전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베텔에서 따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남유다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방 종교를 받아들이고 이방인들과 자기네 핏줄을 혼합해버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들로 치부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요한 복음 4장에는 이러한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청하자 이런 대답이 나오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4,9)
이렇게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은 감정의 골이 아주 깊었습니다. 유다인이었던 예수님께서 이런 감정의 골을 모르실 리가 없지요. 너무나 잘 아셨기에 예루살렘으로의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가시면서 사마리아인들의 굳은 감정을 풀어보시려고 나름대로 이런 화해의 손짓을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사마리아를 거쳐가겠다. 함께 화해를 하면서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러한 화해의 손짓을 예수님께서 보내셨는데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흥분을 하며 불같이 화를 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정한 그들에게 그렇게까지 마음을 열어 보이셨는데 그럴 수 있는가 하며 하늘에서 불이라도 내리겠다고 야단을 떱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판단을 하셨는지 사마리아인들을 더욱 증오하며 화를 내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함께 길을 돌아서 가셨다고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맺을 수는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무엇이든 때가 있으며 그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또한 깨닫습니다. 특히 화해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화해를 제의하였다가 거절당하게 되면 더욱 더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불같이 화를 내고 그 전보다 더 그를 미워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사태는 더욱 악화되지요.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넓은 마음,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한 일을 했는데도 상대방이 준비가 되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나쁜 결과가 있을 수도 있음을 깨닫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입니다.
누군가와의 갈등으로 마음에 부담을 담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어렵고 힘이 들수록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 보여주신 예수님의 넓은 마음을 닮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면 좀 더 지혜롭고 은혜로운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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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 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을 굳히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는 말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했던 그리짐산을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고자 하시기에 더더욱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이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이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걷는 길이 비록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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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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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의 꿍꿍이속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어저께 대천사 축일을 맞아 치품천사(세라핌 천사)를 주십사고, 그리고 저도 치품천사가 되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오늘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환대를 거절한 사마리아인들을 불살라 죽이려는 얘길 들으니 즉시 불을 어떻게 써야 하나 그것과 연결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늘의 불은 엉뚱한 데 써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불사르는 데 써야 올바로 쓰는 것이지요. 분노에 쓰지 않고 사랑에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불을 사랑에 쓰면 성령의 불이 되고, 분노에 쓰면 악령의 불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불을 분노에 쓰라고 주님께서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걸 보며 느낀 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는 것은 야고보 요한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우리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해 화가 납니다. 그리고 앙심을 품고 어떻게든 앙갚음하고 싶습니다.
이것도 문제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약점이라고 봐줄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주님도 자기들과 같으실 거라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의 가르침은 이빨도 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6장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라,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기껏 가르치셨고, 당신 말씀을 꼭 실행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그 가르침이 이들에게 하나도 먹히지 않은 겁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과 같은 9장에서 그러니까 지난 주간 복음에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신 다음 두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며 “귀담아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도 하나도 먹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에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라고 하는데 죽으려고 예루살렘에 가시고 하늘에 오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신다고 아무리 수난 예고를 해도 그 말씀이 조금도 먹히지 않습니다.
다 자기식대로 이해하고 자기 꿍꿍이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님은 죽으러 그리고 하늘에 오르려고 예루살렘에 가시는데 그들은 거기서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꿍꿍이속입니다.
주님과 꿍꿍이속이 다른 우리는 아닌지, 주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먹히지 않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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