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회와 침례교회 우리는 한가족입니다.
김관성 목사
두 해 전, 단양의 감리교 지방회에서 연합 부흥회를 인도했을 때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한 목사님께서 조심스레 다가오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희 교회는 아주 작고 작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꼭 한 번 부흥회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통 그런 요청은 그저 인사처럼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작은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기란 쉽지 않습니다. 재정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합니다. 현실이 녹록지 않으니 많은 경우 말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하는 말씀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초청이 왔습니다. 2025년 1월.
약속은 지켜야 했습니다. 저는 길을 나섰습니다.
작은 교회, 그리고 한 사람
예배당은 아담했습니다. 성도님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근 교회에서 함께해 주셔서 자리는 조금 더 채워졌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저보다 한 살 어리셨습니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이곳에 부임하셨고, 그 뒤로 지금까지 한결같이 이 작은 교회를 지켜오셨습니다.
그리고, 예배당을 직접 지으셨습니다.
헌금할 성도도 없었고, 건축 헌금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막노동을 하셨습니다. 대출까지 받아가며, 벽돌 하나하나 손수 올려 교회를 완성하셨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고되었을까요.
몸이 버티지 못했습니다. 심장이 두 번이나 멈췄습니다. 그대로 쓰러지셨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셨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덤덤하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몸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다만… 스트레스가 너무 심합니다.”
그럼에도, 목사님께서는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청년들, 그리고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청년들을 마음 다해 섬기셨습니다.
평일이면 뿔뿔이 흩어졌다가도, 주말이 되면 하나둘 다시 교회로 모였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함께 예배하며 교회를 지켰습니다.
요즘 세상에 이런 청년들이 또 있을까요?
목사님과 사모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어주시며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조용히, 묵묵히. 청년들은 그 사랑에 화답하듯,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시골 교회를 지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다시 모여, 주일까지 함께 지냈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다가 두 번이나 울어버렸습니다.
고마워서.
가여워서.
귀해서.
그리고, 너무도 행복해서.
돌아오는 길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혹시 졸음운전을 할까 봐 울산에서 올라온 최 목사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일관아, 오세훈 목사님이 진짜 목사야.
나는… 정말 목사도 아닌 것 같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겠다.
그래도… 정말 가슴이 뛴다.
우리, 부름받았던 그때를 기억하며 신실하게 걸어가자.”
그 순간, 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의 결심이 솟아올랐습니다.
‘노동교회의 빚을 갚아야겠다.
감리교, 침례교 그게 뭐가 중요한가.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지 않은가.’
기적 같은 일
그날 이후, 저는 만나는 사람마다 단양 노동교회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설교에서도, 간증 속에서도. 노동교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번 주, 노숙자들이 중심이 된 등대교회에서도 노동교회 이야기를 살짝 언급했습니다. 낮은담 예배에 온라인으로 참석하셨던 한 집사님께서 예배 후 조용히 봉투를 건네셨습니다.
“목사님, 노동교회에 전해 주세요.”
봉투를 열어보았습니다.
천만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순간, 아무 말 없이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셨구나.’
이제 낮은담 교회의 시간입니다.
창립 3주년 되는 날, 노동교회 모든 식구들을 우리 교회로 초대하려 합니다. 오세훈 목사님의 설교를 함께 듣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빚을 갚으려 합니다. 노동교회와 함께 빚쟁이가 되려는 어떤 교회도 환영합니다. ㅎ
“하나님, 감사합니다.
홀로 영광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