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
(7:1-24)
1)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7:1-5)
(1) 노아의 의(1절)
저자가 앞에서는 노아의 온전함을 소개했는데(6:8, 9, 22), 이제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노아를 소개하신다(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니라-1절). 이 구절은 6장 5절, 6장 12절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이 두 곳에서 뭔가를 "보신다" 앞에서는 세상의 악과 부패를 보시고, 여기에서는 땅에 있는 한 명의 의인을 보신다. 두 번째로 노아는 "의인"으로 소개된다. 그는 당대의 모든 사람들과 대조된다. 이 반복을 통해 저자는 "악인의 심판과 의인의 구원"이라는 기본적인 신학적 모티프를 강화해 간다.
(2) 정결한 짐승 보존 명령(2-3절)
이제 노아는 수많은 조롱 속에서 방주를 완성하였다. 그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최종적이며 보다 세부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앞에서는 짐승의 한 쌍을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암수 일곱 쌍을 데리고 가라고 명하신다. 우리는 이런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문서가 다르다고 하지만, 앞에서의 한 쌍은 최소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여기의 "일곱"이 문자 그대로 "일곱 쌍"인지 혹은 "여럿"인지도 분명치 않다(삼하 2:5; 왕하 4:35; 뒤에 나오는 7:13-14 주석을 보라). 여기에서 정한 짐승이 더 많이 필요한 이유는 홍수 이후에 그들이 스스로 번성해야 할 뿐 아니라, 번제로 사용되어야 되었기 때문이다(창 8:20).
(3) 하나님의 홍수 예언: 홍수 7일 전(4절)
노아는 한 주 전에 경고를 받는다. 여기에서 "비를 내리다"는 계절 비를 가리키며, 맹렬한 소나기가 아니다. 이 폭우가 무서운 이유는 40일 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의 숫자는 문자적일 수 있고 또 비유적일 수 있다. 문자적으로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을 지내며(출 24:18), 예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것처럼 비가 40일 내렸다(마 4:2). 비유적으로 본다면, 노아가 "사십 주야" 동안 폭우 속에서 산 것 같이(7:4), 후에 이스라엘은 40년 간을 광야에 산다. 이렇게 보면, 여기의 40주야는 이전에 한 번도 없었던, 가장 파괴적인 기간으로 제시된다. 폭우와 광야는 같은 이미지를 지닌다(창 1:2).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고 주님은 심판 말씀을 반복하신다(6:7). "쓸어 버리리라"(mahah)는 단어는 강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최후의 말씀이다. 그는 약 1년 후 홍수가 끝나자 다시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4) 노아의 순종(5절)
다시 한번 더 노아의 순종이 강조된다(5절). 저자는 지치지 않고 노아의 순종을 부각시키고 있다. 노아의 삶은 "침묵"과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신 "침묵정진"이 노아의 삶이었을 것이다.
2) 홍수(7:6-24)
저자는 방주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노아의 나이, 비가 오던 달과 날, 물이 어디서 나오는지, 동물의 종류와 수를 말한다. 그는 노아의 구원에 중심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기사의 마지막 부분으로 와서야 비로소 방주로 피하지 않았던 자들의 운명을 언급한다. "그들은 다 죽었더라"(7:22).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7:23).
(1) 홍수 시작과 40일 주야 동안 비가 땅에 쏟아짐(6-12절)
이제 하나님께서 파국적인 심판을 집행하신다. 모든 죄인의 세대를 다 죽게 하여, 다음 세대로 장차 올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경고를 받게 한다. 방주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닫아 넣으셨고, 방주 밖에 있는 자는 모두 죽었다. 노아는 새 시대를 향하여 심판의 물결을 가르고 항해한다. 홍수의 파국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가지신 뜻은 노아를 통해 이어질 것이다.
(2) 주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심(13-16절)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16절)고 말한다. 그 동안은 "하나님"이 계속 주어로 나타났는데(6:12, 13; 7:9; 8:1 등), 왜 갑자기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가 여기에 나타나는가? 저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은 노아에게 명하시지만, 구속주 여호와는 노아 방주의 문을 닫아주시고 그를 보호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정통적인 문서설에 따르면,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간 것을 묘사하는 두 개의 중복된 기사는 다른 문서에서 나왔다고 한다(7:7-9[P]; 16-16[J]; 조화선, 이용걸 편 <성서와 함께> 128-9쪽을 보라). 그러나 케슬러(Kessler)는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을 잘 제시한다.
① 두 기사 모두 동물들을 네 개의 범주로 나눈다.
② "정과 부정"은 두 곳에서 모두 반복되며, 제사문서의 전형적인 표현인 "암수" 역시 두 기사에 다 사용되고 있다.
③ 두 기사는 동물들이 "노아에게로 오다, 방주로"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순종 형식으로 마무리 된다.
④ 두 번째 기사는 첫 번째 기사 보다 더 상세하게 발전되며,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⑤ 두 기사는 모두 소위 "제사 문서"(P)로 여겨지는 창세기 1장의 어휘들, 즉 "땅"(1:25), "짐승"(24절), "암수"(27절), "종류"(12절), "기는 것"(24절)들을 문자 그대로 빌려온다.
⑥ 이 두 기사는 열거형식의 문체를 따른다.
따라서 두 기사는 서로 상충적인 것이 아니며, 저자가 "의도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본다. 그는 유사한 기사를 번갈아 가며, 중복하여 씀으로써 마치 히브리 시의 특징인 평행법을 따라 진술해 가는 것 같다(Kessler, "Rhetorical Criticism" 8-9).
(3) 40일 간의 홍수와 산들이 다 잠김(17-20절)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자 말자, 무서운 홍수가 터진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방주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방주 밖의 상황만 묘사되고 있다. 저자는 폭풍과 폭우가 쏟아지지만, 방주는 침몰하지 않았음을 관찰하고 있다(18절). 노아는 바벨론의 홍수 기사에서처럼 항해사를 태우고 있지 않다. 그는 식구들만 태웠고, 항해를 위한 장비도 없었다. 노아가 살아날 수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이다. 물은 높은 산을 모두 덮었고, 또 물이 더 불어나서 15규빗, 즉, 45피트 더 높아졌다(19-20절).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다.
(4) 모든 생물들이 다 죽음(21-23절 상)
저자는 모든 짐승들이 다 "망하고, 죽고, 쓸어버림을 당하였다"고 한다. 홍수는 너무나 방대하고, 너무나 오래 지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모든 짐승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창2:7). 이제 세상은 원죄로 저주를 받았고, 자범죄로 모두 심판을 받는다. 사람들의 죄의 무서운 영향으로 모든 짐승들이 다 죽는다.
(5) 오직 노아 식구들만 생존함(23절 하)
반복을 통해 저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한다. 홍수에서 살아남은 자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자들이었다(6:22; 7:5, 9, 16).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여기에서 노아는 순종과 구원의 모범이 된다. 후에 아브라함(창 21:4)과 이스라엘 사람들(출 12:28)도 같은 교훈을 따르라고 말한다.
(6) 물이 150일 동안 땅에 넘침(24절)
어디를 보아도 물 밖에 보이지 않는다. 노아는 다섯 달 동안이나 방주를 타고 다닌다. 이 기간동안 그와 그의 가족들은 마른 땅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방주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옛 친구들을 그리워하였을까? 그들은 홍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고 믿었을까? 그들은 어떤 구원의 희망을 가졌을까? 이 세상은 정말 끝장인가? 아니면 새로운 출발이 있을 수 있을까? 새 출발의 기회가 온다면, 정말 새롭게 살 수 있을까?
명상
우리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읽으면서 뭔가 새로운 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마지막까지 다 읽고 보면 이 이야기도 성경의 다른 이야기들과 별로 다를 바 없이 같은 패턴 속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타락하고 하나님은 후회하시고 세상을 심판하려고 결심하시며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와 그의 식구들과 여러 짐승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하신다. 이런 긴 과정은 성경의 어느 이야기에나 나타나는 패턴처럼 느껴진다. 방주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도 저자는 길고도 상세하게 그 규격을 지루하게 묘사하며 노아가 600세 되던 해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치지도 않고 150일 동안이나 온 세상을 덮어 가는 과정을 지루하게 묘사해 가고 있다.
"왜 저자는 이렇게 도 지리멸렬하게 홍수 심판의 과정을 묘사했을까?" 현대의 성급한 독자들은 온 세계가 철저하게 망하고 소수의 사람들과 다수의 짐승들이 1년 동안이나 방주 속에 갇혀 사는 이야기조차 단숨에 읽어 버리려고 하는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저자는 이 깊은 지루함과 적막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믿음을 우리에게 키워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