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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진동 (바로크 미술_렘브란트, <명상 중인 철학자>)
단순한 듯 보이지만 그 속에 무한한 우주가 들어있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의 작품들이 그렇지요. 렘브란트의 그림은 공통적으로 빛과 어둠이 서로를 품고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빛과 어둠은 카라바조( 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 처럼 강렬하기보단 포근하면서도 인자합니다. 빛은 사물을 따스하게 비춰주고 어둠은 사물을 편안하게 감싸줍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림은 무한히 깊어지지요
렘브란트의 그림 중에서도 <명상 중인 철학자>
(1631)는 비교적 작고 간단해 보이지만, 단순한 공간적 깊이를 넘어 무한한 정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림을 보면 창가에 앉아 있는 철학자로 보이는 노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은 따스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창가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 채 앉아 있습니다. 무언가 깊은 사색에 빠진 것인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아무런 미동도 없어 보이네요
화가명 : 렘브란트
작품명 : 묵상중인 철학자
제작년도 : 1632
작품재료 : 판에 유채
작품크기 : 28x34cm
소장위치 : 루브르 미술관
철학자 뒤로는 작은 문이 보입니다. 허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기에 어딘가 비밀스럽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화 <장미의 이름> (1986)에서 보았던 미로 같은 비밀 도서관이라도 나올 것 같습니다. 책들의 무덤을 뒤로하고 철학자는 그 앞에서 문지기처럼, 혹은 명상에 잠긴 것처럼 가만히 앉아있습니다.
어쩌면 철학자는 책에서 본 내용에 자신의 경험을 대입해보는 상상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죽은 지식이 아닌 살아 있는 지식을 찾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삶에 풀어내는 지혜를 만들기 위해 그는 태양빛 아래에서 고민합니다. 이때 철학자를 비추는 햇빛이 상징적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신의 빛이 아니 라 자연의 빛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의 빛을 분석하는 인간 이성의 빛이기도 합니다
왼쪽 하단에 보면 철학자의 늙은 아내로 보이는 사람이 화롯가에 불을 때고 있습니다. 사색에 빠진 상대방을 배려해서, 아니면 대신해서, 둘만의 보금자리를 따뜻하게 지키려고 하고 있네요. 상대적으로 아내의 모습은 오른편 끝에,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그려져 있어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지 쉽습니다. 그렇다는 뜻은 그림의 주인공은 온전히 철학자라는 것을 말해주지요. 그림은 철저하게 생각에 잠긴 철학자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뜻도 되겠네요.
나선형 계단은 철학자와 아내를 가르고, 이를 통해 사유의 세계와 물질의 세계를 또 한 번 가르고 있습니다. 또 나선형 모양을 통해 무한으로 뻗어가는 철학자의 정신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계단은 얼핏 끝없이 연결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보이기도 하고, 빛-어둠-빛-어둠의 반복을 보여주고 있어 무한한 에너지를 지닌 운동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건 바로 사색이라는 정신의 운동이지요. 물리적 운동처럼 철학자의 정신은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나선형 계단은 철학자의 머릿속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며, 이것으로 인해 그림의 밀도가 깊어짐과 동시에 감상자의 정신으로까지 가닿는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렘브란트의 <명상 중인 철학자>가 보여주는 것은 정신의 고요한 진동입니다. 이 진동은 물 위에 끊임없이 동심원을 만들어내며 뻗어가고 있습니다
그림은 사색에 잠긴 인간의 모습을 고요하면서도 리듬감있게, 유한한 듯하면서도 무한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반된 듯 보이는 요소를 동시에 품은 이 작은 작품이 결코 작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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