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2)-2
박영효가 일본에 망명한 이틀 후인 7월9일, 국왕은 각의석상에서 “지금까지의 칙임(勅任), 칙령(勅令)은 전부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금후는 짐이 친정을 할 것이다”라고 결의를 표명했다. 이어서 13일, 일본이 내정개혁에 근거를 둔 신제도, 신 법령에서 모순이 있는 것은 재검토한다는 취지의 조칙(詔勅)이, 관보에 발표되었다.
여기까지 왕이 당차게 된 이면에는, 러시아공사의 강한 일본 비난이 있었다. 러시아는 “내정개혁은, 조선의 독립이라는 약속에 반한다”고 비판하고, 일본에 압력을 걸어온 것이다. 미국공사도 또한 일본을 비난하는 태도를 밝히고 있었다. 왕의 성명은, 이제까지의 일본의 내정개혁 일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그것은 일본의 지배권 부정에 다름 아니다.
당연하지만, 일본정부는 이러한 정보를 하나하나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정부와 협의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이노우에 공사는, 그때까지의 내정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해온 방침을 일변하여, 손바닥을 뒤집듯이 국왕부처와의 친선정책에 전력을 기울인다.
7월25일, 이노우에는 귀임인사를 위해 부인을 동반하여 왕궁에 갔다. 먼저 이노우에가 6.000엔 상당의 물건을 왕에게 헌상하고, 그의 처는 3.000엔 상당의 물건을 왕비에게 바쳤다. 당시로서는 상식 밖의 값비싼 헌상 품이다.
이노우에는 아내를 먼저 돌려보내고, 왕 부처를 향해서 그 일류의 장광설을 늘어 놓았다. 박영효 망명사건이나 앞에서 말한 왕의 성명 등 난처한 이야기는 일체 언급을 피하고, 올해 천후 불순에 따른 피해의 위안 같은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점차 재정문제로 옮겨갔다. 이 해 조선은 긴 한발 다음에 호우가 덮쳐 농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북부에서 발생된 콜레라가 서울까지 만연하여, 이미 수천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재정문제를 이야기 하는 중, 이노우에는 말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일본은 조선정부에 300만 엔을 기증하고, 그 재정재건을 원조한다----고.
민비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이노우에는 300만 엔 중, 50만 엔을 왕실경비의 기본금으로 충당한다고 까지 말한 것이다. 러시아에 기울어진 민비 지만, 대국 러시아라고 해도 이런 거금을 조선에 제공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노우에가 이때 “300만 엔 기증”을 입에 올린 것은 아무래도 경솔했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일본정부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돈으로 조선을 끌어들이자는 이노우에의 제안을 받아들여, 임시국회에서 승인을 얻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부터의 일로, 당연하지만 아직 미결정이었다. 또 이노우에는 “기증”이라고 했으나, 일본정부는 처음부터 「외채차관(外債借款)」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에 귀임할 때의 이노우에는, 머지않아 그의 공사시대가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길을 장식하여 면목을 유지하고, 가슴을 펴고 일본으로 귀국하고 싶다---고 바랐을 것이다. 이노우에는 그때까지의 강압정책을 버리고 왕 부처와의 친선외교에 힘썼으며, 민비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까지도 인정하여, 현지 일본인들을 격분시켰다. 이노우에의 이런 태도표변과, 6월4일 각의에서 「일본의 대 조선정책」이 무관하게 결정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陸奧 宗光(무쓰 무네미쓰)는 일청전쟁이 일어나자 바로 1904년(명치27년) 8월17일 각의에서, 일본의 대 조선 방침에 대하여 갑, 을, 병, 정의 4개 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토도, 무쓰도, 아직 확고한 견해가 없었던 이때, 각의는 아무런 결론도 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서울의 이노우에로 부터 이 결정을 요청받은 무쓰는, 6월4일의 각의에서 지난해의 4개 안 중 갑안 「조선의 내정불간섭」을 제출하고 이토와 같이 이를 결정했다.
이것은 무쓰가 요양을 위해 오이소(大磯)에 칩거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 무쓰가 없어진 정부 내에서는, 이 각의결정은 중요성을 잃었으며, 대 조선 방침은 백지와 같은 상태에서,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중장을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선정하게 된다.
귀임 후 이노우에의 태도변화는, 내정개혁의 강요는 혼란을 증대시킬 뿐이고 효과는 오르지 않으며, 또 여러 외국으로부터의 비난을 받는다는 실정을, 새삼 인식한 것에 따르기로 했을 것이다. 그는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심경이었을 것으로 상상된다.
이노우에와는 대조적으로, 러시아공사 베벨의 태도는 시종 일관했다. 그는 일찍부터 왕실과 정부와의 관계를 잘 알고, 이노우에가 민비에게 “못을 박는다”와 같은 감정을 역이용하는 동안에도, 오로지 왕 부처의 비위를 맞추어 갔다. 일본의 억지에 대한 불만을 가슴이 담고 있는 정부요인들과도, 몰래 손을 잡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3국 간섭」을 계기로 러시아 세력 확대에 성공하지만, 그 그늘에는 민비에게 환심을 사서 그 마음을 잡은 베벨 부인의 “내조의 공”도 있었다.
내가 읽은 자료의 범위에서는 민비와 만난 일본 여성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 부인 타케코(武子)뿐이다.
1876년(명치9년)부터 거의 1년간, 남편과 함께 구∙미에서 보낸 타케코는 영어를 배우고, 구∙미의 메너를 몸에 익혀 귀국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가 「조약개정」을 위한 이면공작의 한 가지로 1883년(명치16년)에 창립한 로쿠메이칸(鹿鳴館)에서, 구∙미 외교관들을 상대로 멋진 “여주인”역할을 했다. 주 조선공사 부인이었던 1895년(명치28년)의 타케코는 만 45세, 민비보다 한 살 위였다.
타케코 라면 베벨부인과 같은 “내조”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왕 부처에 대하여 강압적인 태도를 계속해 온 이노우에는, 아내에게 그것을 바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타케코는 민비에 대해서도, 또한 공사부인의로서 참석했을 왕궁의 연회나 원유회(園遊會)에 대하여도, 아무것도 써서 남기지 않았다.
조선 이외의 나라 여성으로 민비의 인상을 써서 남긴 이는, 영국왕실지리학회 회원 이사벨라∙버드∙비숍 여사다.
「왕비의 눈은 냉정한 빛을 띠고, 기민한 머리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당연할 왕비의 생활은 투쟁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비는 우아하고, 붙임성 있게 우리를 대해 줬다. 대화는 언제나 편안했다」
민비는 사람을 피하지 않는, 사교에 능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왕비는 호리호리한 몸매로, 언행은 우아했다. 언제나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머리는 칠흑이며, 화장에 진주 분을 쓰기 때문에,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언제나 창백하게 보였다」
나는 진주 분 화장료에 대해서 알고 싶어, 그 방면의 한국자료를 찾았으나 발견되지 않았고, 우연한 기회에 중국잡지에서 알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과 청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민비가 청국의 화장료를 쓰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인민중국(人民中國)』 1986년(소화61년) 4월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고대로부터 중국여성들의 화장법의 한 가지에, 의약용 진주 분말 사용이 있다. 이것과 벌꿀을 섞어서 얼굴에 바르면, 살결이 하얗고 매끄럽게 되며, 나이가 들어도 소녀처럼 보인다. 의학의 연구에 따르면, 한방약인 진주에는 아미노산, 담백질 기타 각종 미량의 원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피부에 영양을 보급하고, 표피세포의 활력을 증진하는 것이 실증되었다」
일본인의 수기에, 살해되었을 때의 민비는 40대였으나, 25,6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왕궁의 위병교체문제가 원인이 되어 박정양이 사직한 후, 후계자 결정은 난항이었다. 일∙러의 역학관계는 왕비를 끌어들인 러시아의 압도적 우세가 계속되고 있었으나, 이노우에 공사의 귀임 이래 풍향이 바뀌었다. 300만 엔이 일본에서 흘러들어온다면, 재정적으로 언제나 쪼들리는 조선정부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는 경우의 러시아나, 미국의 반격은 엄청날 것이다. 이런 시기에, 나가서 내각수반의 중책을 짊어질 사람이 없었다.
김홍집(金弘集)은 몇 번이나 교섭을 받았으나, 고사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청국, 일본, 러시아 같은 강국들의, 대항의 폭풍우를 빠져나가, 왕실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든 조국을 지키려고 오랫동안 부심해온 그였으나, 이제는 정권을 담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출진을 종용하는 교섭은 집요하게 계속되고 왕의 강한 희망도 전해졌다. 김홍집 이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여러 외국과의 절충도 많은 이때에, 더 이상 책임자가 없는 불안정한 상태를 이어가는 것은 허용될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영의정 자리에 앉는 자는, 우리나라가 이제까지 경험한 적도 없는 수라장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불가사의는 아니다. 전보다 목숨을 걸 각오가 없이는---->
전 가족이 반대하는 가운데, 드디어 그는 일어섰다. 제3차 김홍집 내각의 성립은 8월24일이었다. 이 내각의 면면을 보면, 친일파는 군부대신 단 한 사람이고, 다른 거의 대부분은 민비 파가 점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하현강(河炫綱)은 논문 「옥호루의 참극--을미사변」에, 「제3차 김홍집 내각의 구성은, 이노우에(井上) 공사의 실패가 들어낸 한 가지」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선근(李瑄根)저 『대한국사(大韓國史)』에는, 이노우에가 이미 민비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 카무플라주를 위하여 친일파 입각을 삼가 했다고, 쓰여 있다.
이노우에 공사는, 국왕을 비롯하여 조선 측이 기분 나쁠 정도로 계속 호의를 보였다. 그는 민씨 일족 대부분이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알면서, 내각에 요청하여 다시 그들을 특사 방면 시켰다.
“대원군 선풍”에 날리어 멀리 베이징(北京)에 도피해 있던 민영준(閔泳駿)도 돌아왔다. 다시 주위를 놀라게 한 것은,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까지가 특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준용은 조부모가 기다리는 공덕리의 아소정에 돌아왔다. 아소정은 극히 간소한 건물로, 대원군은 민비파가 파견한 경리(警吏)들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외부와의 연락을 끊기고 있었다. 게다가 일가는 생활비조차 어려워, 대원군의 장기인 난 그림을 남모르게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준용은, 가만히 눈물을 닦으면서, 조부 곁에서 먹을 갈았다.
이노우에 공사의 「300만 엔 기증」이라는 말을 들은 이래, 조선정부는 그 실현을 고대하고 있었다. 꿀떡같이 욕심이 나는 돈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 오는가. 조심조심 공사에게 물어봐도, “머지않아”라고 할 뿐 요령부득이다. 조선 측은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초조해 지는 것은 조선 측뿐 아니다. 이노우에 공사도 안달하면서 본국정부로부터의 「차관결정」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식은 없는 체로 그는 귀국할 때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