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6월의 그 새벽, 6월의 이 밤
筆 華
73년 전, 1950년6월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일어난 그 전쟁은 참혹을 극하였다.
교복차림, 학모를 착용한 체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3년, 4년 선배 K형, L형 U형은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9월 중순, 후퇴했던 국군과 UN군이 수복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UN군은 GMC 트럭을 타고 이동했는데, 우리 국군은 일본 토요타 트럭에 군수물자와 같이 실려 이동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북진 트럭 위에서 국군들이 부르던 이 陣中歌謠 “전우야 잘 자라”를,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지금도 이 노래의 가사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허밍(humming)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때 병사들에게 지급된 담배는 필터가 없는 화랑담배였다. 달빛이 은은한 고개 중턱에서 마지막 나누어 피운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져간 전우의 시체를 묻을 겨를도 없이 넘고 넘어 그렇게 국군은 북진해 간 것이다.
아군은 38선을 돌파하고 평양을 탈환하였다. 더 올라가 평안북도의 압록강, 함경북도의 두만강 유역까지를 압박하였다.
그해 늦가을 한국군 병사가 야전수통에 압록강 강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보도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통일을 눈앞에 둔 그 겨울, 뜻밖에도 중공군이 불법으로 침략하여 전쟁은 확전 되었다. UN안전보장이사회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전선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북위37도선까지 내려갔다니 아마도 평택, 삼척 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죽령 재 그 넘어에서 새삼 대포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그 추운 겨울, 창문도 없는 가교실에서 책걸상도 없이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그래도 수업은 계속되었다.
다시 전선은 북상하여 38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다가 3년 2개월 만에 전쟁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으로 쉬게 되었고, 엉거주춤한 휴전상태는 70년간 이어오고 있다.
전후(戰後)의 삭막했던 농촌과 도시의 정경은 처참하고 살풍경하였다.
학교길 신작로 가, 논 가운데 인민군 탱크가 포신이 찢어진 체 기울여져 서 있었다. 탱크 앞에 운전병으로 보이는 인민군 전사가 쓸어져 있었다. 논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체 죽은 시신은, 몇날 며칠이 지나도 치우는 사람이 없어 그대로 썩어가고 있었다. 함경도 어느 농가 집 귀한 아들이 아니었을까.
그보다 앞서 1950년 가을 추석이 내일모래쯤 다가올 무렵, 썰물이 빠지듯 인민군의 후퇴 대열이 북쪽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가 피난길에서 묵고 있던 농갓집에 인민군의 한 무리가 들어와 우물물을 길러갔다. 1개 소대쯤 되는 병력이, 집 앞 밭둑에 쉬면서 딱딱하게 굳어빠진 야전식(野戰食) 비스킷을 먹는데 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인솔자인 인민군 군관이 마당가에 서 있는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20대 후반쯤 되는 그가 나에게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고향에 나 또래의 중학생 족하가 있다고 했다. 병사들은 삭발을 했는데 머리를 기른 그 군관은 인상도 좋았고 교양이 있어 보였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소대와 약간 떨어진 풀밭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야전식 비스킷을 나에게도 1개를 주는데, 손바닥 반 정도의 정사각형에 구멍이 뻐끔뻐끔 뚤려 있었고, 씹을 수가 없을 정도로 딱딱할 뿐 아니라 아무런 맛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 난다. 약 10분 동안 짧은 대화에서, 후퇴 길에 쫓기는 그 군관은 이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하고 다시는 이런 전쟁이 없어야 한다고 귀엣말처럼 나직하게 그러나 힘주어 말했다. 「남조선 해방전쟁」이라는 김일성 교시에 반하는 말임을 직감했다. 그들은 수통에 물을 채우고 비스킷을 씹으면서 곧 떠나갔는데, 그는 다시 작별의 악수를 청해왔다. 군관은 나에게 전쟁이 끝나고 좋은 세월에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눈가에는 우수가 서려 있었다. 고향집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눈빛이라고 느꼈다. 그의 따뜻한 체온과 강한 악력(握力)을 통해, 이 전쟁에서 꼭, 같이 살아남자는 다짐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지리에 설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후퇴 길에서 낯선 남쪽 중학생의 손을 잡고, 살아남고 싶다는 생명애(生命愛)의 독백을 토로한 인민군 군관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나는 그가 살아 남아 주기를 빌었다. 그들은 포장되지 않은 신작로 길을 도보로 후퇴하였는데, 이튿날 그들이 북상한 그 길로 트럭을 타고 뒤쫓아 간 국군보다 더 빨리 전선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사히 북쪽으로 갔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기약 없이, 모르는 사람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다시 기약 없이 헤어져, 잊히지 않는 추억만 남기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죽고 행방불명되었다. 전후에 상이군인, 고아와 미망인이 헤아릴 수 없이 거리를 해멨다. 인적피해의 단편적인 기록을 몇 가지만 들어본다. 남북한 전투원 희생 44만 명/민간인 양민학살(남한) 13만 명/피랍자 8만5천명/행방불명자 30만 명/전쟁미망인(남북) 발생 29만 명/전쟁고아 발생 4만 명 등이다. 거의 모든 가정들이 전쟁의 참화로 몰락과 불행의 길을 걸었다. 우리 집도 그 전쟁으로 참담한 비운을 경험했다.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전쟁의 참화(慘禍)를 모른다. 따라서 평화의 진가(眞價)도 알지 못한다.
나는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다. 그런데 전쟁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수긍자요. 참여자다.
유비무환은 唐나라 현종 때의 재상 장구령(張九齡673~740)이 남긴 말이다.
그 원문은 이렇다.
「有備無患 忘戰必危」 (유비무환 망전필위)
준비가 있으면 후환이 없고,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험 이 온다는 뜻이다.
전쟁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전쟁을 준비해야 된다는 아이러니다. 역사는 이런 반어적(反語的)인 아이러니를 통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경고를 발한다.
60년대와 70년대에 압축성장으로 근대화를 이끌었던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좌우명(座右銘)처럼 「유비무환」을 강조하였고, 강한 의지력으로 실천하여 자주국방(自主國防)을 실현하였다.
현대전은 군인들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너무나도 총체적이다. 전 국민이 상무적(尙武的)인 기풍을 진작하고 안보의식을 가다듬어야 하며, 군비확충에 이견(異見)이 없어야 한다. 군은 부단한 훈련으로 정예화 하여 강군(强軍)이 되어야 한다.
나는 1년에 두세 차례 서울 현충원을 순례한다. 동작동 현충원, 나의 순례 코스는 충혼탑→채명신 장군 묘(그는 장군묘역을 사양하고 월남 참전 사병묘역에 묻혔다)→6.25참전 장병의 드넓은 묘역→독립 유공자 묘역→건국 대통령과 근대화 대통령의 유택이다. 현충원의 한 부분을 이렇게 돌아 내려오는데 약 4시간이 걸린다.
전쟁으로 산화한 호국의 영령들과 진한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지극히 사랑하는 부모님들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앵두같이 예쁜 색깔과 고운 마음으로 무사하기를 비는 어여쁜 소녀도 있었을 것이다.
파란 구름위에 젊은 뜻을 띄워두고 비호처럼 비상(飛翔)하려는 청춘의 꿈과 야망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6월의 그 전쟁에서 모든 것이 바람처럼 날아갔고, 허허로이 공중에 흩어졌다.
전쟁터 이름 모를 골짜기. 잡초가 무성한 언덕위에, 그들은 하늘을 향해 누워 영원히 잠들었다. 흙투성이가 된 전투복에는 피가 엉켜 있었다.
북쪽 출신 젊은이들의 원한도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인민군 군관이 남긴 말,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하고, 다시는 이런 전쟁이 없어야 한다.” 그 인상 좋은 군관이 후퇴 길에서 전사했다면 민족상잔의 전쟁 유발자들에게 피맺힌 원한을 품지 않았을까. 기록에도 남기지 않은 체. 논바닥에 얼굴을 묻고 썩어간 탱크 운전병의 영혼은, 무턱대고 전쟁터로 몰아넣은 그들의 지배계층에 천추의 한을 품고 갔을 것이다.
현충원의 6월은 빨간 장미가 만발하다. 그 장미 빛은 피아간의 공방(攻防)이 거듭된 전쟁터에서 젊은이들이 한을 품고 흘린 선혈(鮮血), 허공을 향해 분출된 핏빛이 옮아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70여년이 지나 연륜이 쌓였지만, 아직도 전쟁의 기억이 생생하다. 6월의 그 새벽에 일어난 전쟁은 젊은이들의 청춘을 앗아갔고, 6월의 이 밤에는 그 전쟁의 회억(回憶) 때문에 잠마저 빼앗긴다. (‘23.6.25.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