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22)-3
후임공사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9월1일, 그는 예비역 중장으로, 자작(子爵)이었다.
미우라 고로는 어떤 경위로 주 조선공사에 임명되었던가----. 미우라를 추천한 것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였다. 오이소(大磯)의 병상에 있는 무쓰(陸奧)는 이 인선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외쳤지만 쵸슈벌長州閥)에 눌려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쵸슈(長州)출신인 미우라의 기용은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 有朋)의 쵸슈출신 3거두에 의하여 결정하였다. 이 3거두와 미우라와의 사이에서 진행담당을 맡은 내무대신 노무라 야스시(野村 靖)도 쵸슈출신이다.
처음으로 교섭을 받았을 때의 미우라는, “저는 군인이고, 외교나 정치에는 초심자라서” 하고 사양하였으나, 그는 쵸슈벌의 한 사람으로서 일찍부터 정치에 관여하였으며, 정계의 흑막적 존재였다. 주 조선공사를 뽑는데 있어서는 러시아공사 베벨과 서로 겨루는 외교판의 민완가를 요구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나, 이때 각계에서 바라는 것은 “강의과단(剛毅果斷/의지가 굳세고 과단성이 있는)의 인물”이었다.
미우라에게는, 1881년(명치14년)의 「사장상주사건(四將上奏事件)」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라는 경력이 있다. 이것은 서남전쟁(西南戰爭) 후의 국회개설운동, 혹카이도개척사(北海道 開拓使) 관유물 불하문제에 분개한 도리오 코야타(鳥尾 小弥太), 다니 칸죠(谷干城), 미우라 고로(三包 梧樓)의 3중장과 소가 유우준(曾我 祐準)소장 등 4사람이, 천황에게 상주하여 재단(裁斷)을 바란 사건이다. 현역군인이 정치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육군당국과 대립하고, 군기를 어지럽힌 네 사람을 처벌해야 된다는 의견이 강했으나, 당시 군 형법에는 이를 벌해야 한다는 조항이 없어, 그대로 넘어갔다. 사건 후, 이 4사람에게는 “강의과단(剛毅果斷)”의 레테르가 붙었다.
주 조선공사 취임의 교섭을 받은 미우라는, 정부에 조선정책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이것을 참고로 기본방침을 결정하여, 부임 전에 보여주도록 요청했다.
미우라의 의견서는 3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제1은, 「조선을 독립된 동맹국으로 하고, 장차 일본 한 나라만으로 조선 전토의 방위 및 개혁을 담당한다」 제2는, 「열강과 공동보호의 독립국으로 한다」 제3은, 「어느 1,2강대국과의 분규와 소요를 면할 수 없다고 예측된다면 차라리 1개 강대국과 조선을 분할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이들 안은 특별히 미우라가 발안한 것은 아니고, 제1, 제2는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일청전쟁 직후 각의에서 무쓰(陸奧)가 제출한 4개 안 중에 있으며, 제3의 일러 양국으로 조선을 분할점령하자는 안도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3개안을 제출한 미우라는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고, 신명을 조선 땅에 바칠 결심이다. (중략) 3개안의 어느 것을 채택하는가에 따라서, 은혜적인가, 협박적인가, 묵종적인가의 정책이 필요하게 되고, 이쪽의 태도도 전부 이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고 소신을 서술하였다.
미우라의 요청에 대해, 정부에서는 아무런 회답도 없었다. 미우라는 공사 취임을 사퇴했다.
아타미(熱海)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미우라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 有朋)와 만나게 한 사람은, 내상 노무라 야스시(野村 靖)였다. 야마가타는 “삼대정책, 사안이 중대하여 더욱 숙고를 요한다. 어떻든 무엇인가의 결정을 보일 것이니, 여하간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조선으로 건너가 주기 바란다”고 고했다. 서울의 이노우에 가오루로부터도 성화같은 재촉이 있고, 드디어 미우라는, 「정부 무 방침인 상태로 조선으로 건너가는 이상은, 임기응변, 스스로 자유로이 할 수 밖에 없다고 결심」 하고 부임했다고, 훗날 그가 썼다.
일본 각계가 조선에 거는 기대를, 미우라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에 부응하는 길은 왕비암살 이외에는 없다고 이때 그는 마음을 굳힌 것이다.
미우라를 위하여 제국호텔에서 각료 전원이 참석한 성대한 송별연이 열렸으며, 부임도상인 시즈오카(靜岡)역에는 타니 칸죠(谷 干城)가 나와서 그를 격려했다. 함께 「四將上奏事件」을 일으킨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이미 미우라의 “결의”는 이야기가 나누어지지 않았을까.
서울 착임 후의 미우라는 스기무라 준(杉村 濬) 서기관에게, 「보증된 결심은 곧, 일신을 희생하는 결심」이라고 말하고, 「도쿄를 출발할 때에, 조만간 사변발생을 예기 한 것도, 명년(1896년) 1,2월경 까지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또 민비암살사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무라사키 시로(紫 四郞/四朗이라고도 쓴다), 츠키 나리미츠(月 成光)는 서울 재류 방인이 아니고, 미우라가 부임할 때 동행한 사람들이다.
무라사키(紫)는 정치평론을 주로하는 문필가였다.
신임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 梧樓)는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를 따라 신임장 제정을 위해 왕궁으로 갔다.
“저는 오랫동안 군적에 있으면서, 군공을 세우지도 못한 무능한 군인입니다”하고 미우라는 국왕에게 말했다. “이때에 공사로 부임해 왔습니다만, 외교 같은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금후에는, 국왕폐하의 부름이 없으면 관저에 틀어박혀, 사경(寫經) 같은 것을 하면서, 이 나라의 풍월을 즐길 생각입니다. 그 사이에 관음경(觀音經) 한 부를 청서(淸書)하여, 왕후폐하께 올리려고 생각합니다.”
미우라가 한 말은 이 뿐으로, 정치라든지 외교문제에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이노우에의 다변과는 정반대로 과묵한 그의 무인다운 풍모나 겸손한 태도는, 왕과 그 뒤 병풍 안에 있는 왕비에게 호감을 준 것 같다.
민비는 이날 미우라의 인상을,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사는 금강산의 스님같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섬뜩한 무서운 감도 든다”
이 말로 미루어, 감이 예민한 민비는 이미 자기의 목숨을 빼앗게 되는 사내의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고 하나, 후년 누군가의 창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미우라는 주위에, 빈틈없는 민비를 칭찬했다. “왕비는 대단히 재능이 넘치는 분 같았다. 내가 국왕과 알현 중, 뒤의 어렴(御簾)을 살짝 펼치고는 왕에게 무엇인가 조언을 하셨다. 그리고 통역을 시켜서 나에게, 이 나라의 습관으로 외국사신과 정식 대면을 할 수 없으나,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고 전해왔다, 매우 붙임성 있는, 현명한 왕비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미우라는 왕에게 말한 대로, 공사관 2층 거실에 틀어박혀, 독경(讀經)으로 날이 밝고 해가 지는 나날을 보내고, 주위에서 “독경공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외출도 하지 않았으며, 정부요인이나 각국 외교관과도 만나지 않고, 일본공사로서의 직책은 일체 포기한 생활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미우라의 태도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던 조선 측도, 얼마 안 되어 그를 경시하였고, 곧 무시하게 되었다. 민비에게 있어서 이런 좋은 여건이 없다. 일본공사는 부재나 다름없다. 그녀는 누구에게 거리낄 것 없이, 점점 러시아공사 부처와의 친밀의 도를 깊게 하고, 한편으로는 왕의 이름으로 일본세력이 차차 억제되어 갔다.
이노우에 가오루 전 공사는, 미우라 착임 후에도 아직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왕과 약속한 300만 엔 건을 반드시 실현시키려고, 본국정부를 상대로 필사적인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것이 성공하지 못하고 끝나면, 오늘까지의 일본의 대조선 정책 일체가 수포로 돌아간다」는 이노우에의 비통한 전보에 대하여, 드디어 외무대신 임시대리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로부터 「단념하는 것이 좋겠다」는 답전이 왔다. 이 무렵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는, 정부공격에 거칠어진 국회대책에 부심하고 있었다. 도저히 조선에 대한 300만 엔 차관을 승인 받을 수 있는 형세가 아니었다.
이노우에도 이런 일본의 사정을 잘 알았지만, “빼도 박도 못하는 입장”이었던 그는, 마지막까지 들러붙었을 것이다. 9월 중순 이노우에는 귀국했다.
일본의 300만 엔 기증이 공수표라는 것이 알려지자, 러시아, 미국 등의 일본 공격은 점점 격화되었다. 그것을 배경으로 민비파는 한층 세력을 굳혔다.
9월28일, 민씨 일족의 빛나는 전도를 상징이라도 하듯이, 민영환(閔泳煥)이 주미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29일, 조선정부는 일본의 내정개혁에 의해 결정한 조정 신하들의 복장을, 다시 본래의 한식으로 바로잡는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위신을 크게 손상하는 도발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