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구병모의 <아가미>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책인데 오랜만에 또 한번 읽고도 여운이 깊게 남아서 추천하러 왔어
등장인물은 아가미를 지닌 소년 곤과, 강하, 노인, 해류, 이녕.
영화화되면 좋을 것 같은 소설 중 하나 ㅠㅠ
읽으면서 한참이나 곱씹었던 구절들 스포가 크게 되지 않는 부분 내에서 적어두고 갈게!
1.
나는 말이죠. 당신의 등하고 허리에 불규칙하게 돋아난 비늘이 사문암 같은 무늬를 그리고 있다는 걸 알아요. 흰빛과 연보랏빛이 섞여서 얼마나 신비하고 예쁘게 빛나는지, 보지 않았어도 알아요.
2.
물에 닿을 때마다 아이는 점점 싱싱하고 신선해졌다. 콧물 한 번 훌쩍거리는 일 없이 아이는 한겨울에도 틈만 나면 고무 대야에 온몸을 담그거나 최소한 머리라도 거꾸로 넣고 있었다.
3.
정작 강하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결코 자신의 손에 닿을 수 없는 호수의 바닥, 그 깊이였다. 자신이 가지 못하는 곳에 곤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거리감과 언젠가는 곤이 정말로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다른 물고기 떼들 사이로 깊이깊이 헤엄쳐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예감에서 비롯되는 분노와 질투였다.
4.
강하는 곤의 머리카락을 잡아 일으켰다.
“그렇게 물귀신이 되고 싶으면.”
그대로 질질 끌고서 강하는 곤의 머리통을 변기에 밀어 넣었다.
“아주 그냥 처박고 살아. 나오지 말고.”
세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변기 속에 맑은 물에 머리를 처박힌 곤은 강하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발버둥질했다. 그 물은 오히려 호수보다도 깨끗할 터였고 곤은 숨도 쉴 수 있었으니 장소가 주는 불쾌감 외에는 별로 문제 될 게 없었으나, 눈 한 번 깜박일 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이어지는 폭력에 곤은 자신의 신체적 특성을 망각하고 그대로 익사할 것만 같았다.
5.
“성질 건드리면.”
“이 집에다 팔아넘긴다.”
“머리부터 자르고 뼈까지 발라내서 씹어 먹히는 거지.”
곤은 강하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고 다만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정신없이 강하의 다리를 잡고 일어섰다.
6.
심각한 중량 및 규격 초과로 접수 불가 도장이 찍힌 소포처럼 강하는 주소와 이름이 적힌 메모 한 장을 손에 쥔 채 혼자서 이내촌으로 왔다. 일곱 살 아이에게는 무거운 옷가지 배낭을 지고 있었는데, 그 배낭 속에는 속옷과 얄팍한 돈 봉투 외에도 강하가 이녕의 아들임이 틀림없으니 외할아버지가 이 아이를 받아줘야 한다는 요지의 가족관계 증명서를 비롯하여 그녀의 최근 사진이 들어있었다. 노인은 할 수 없이 강하를 받아들였으나 딸의 사진은 찢었다. 그 뒤에도 그녀는 아이가 먼 길을 잘 도착했는지 아버지에게 연락해보지 않았으며 강하가 자라는 내내 그랬기 때문에 노인은 오래전부터 딸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한 참이었다.
7.
들어간 김에 곤 자신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나 가끔은 물속에 잠겨 있던 동전들을 수거하여 강하의 비상금 상자에 말없이 넣어두기도 했다. 강하는 자기 상자가 얼마나 무거워졌는지를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늦은 밤이나 새벽 집에 돌아올 때마다 집 안 공기를 감싼 보유스름한 습기와 농후한 물 냄새는 알아차리는 듯했다.
8.
당신이 이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강하가 당신을 특별히 좋아하고 아꼈다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싫어'라는 건 반드시 증오만을 가리키는게 아니에요. 달리 표현할 말이 마땅치 않아 싫다는 것뿐이지 그건 차라리 혼돈에 가까운 막연함이에요.
9.
그녀는 작은 탁상 거울을 앞에 두고 목걸이를 걸어보았다. 아무리 빛나도 생기가 다 꺼져가는 자기 얼굴하고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귀금속에 대해 전혀 모를 아이가 보고도 그냥 지나칠 걸 일부러 주워 와서 머리맡에 놓아주었을 장면을 생각하니 힘내서 몸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10.
“너 참....”
그녀는 자신이 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늘 조우하기 직전 사라져버리는 거대한 물고기를 환상 속에서 본 적 없다면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일이라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놀란 나머지 헹군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곤에게 이어서 말했다.
“예쁘다.”
그러자 곤은 한 마리의 생선이 되어 도마 위에서 토막 나지 않도록 자신의 살과 내장에서 간유를 짜내고 그 찌꺼기가 어박과 어분으로 분리되어 어느 짐승의 입에 들어가지 않도록, 어딜 가든 감추는 데 급급해온 자신의 몸이 누구도 들려준 적 없던 그 말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
11.
그녀는 내려다본 아이의 잠든 옆모습이 예뻐 보여서 적어도 이 정도쯤은 되는 고급품으로 덮어줘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단 말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어차피 강하에게 자신의 상태와 정신세계를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2.
곤이 두어 걸음 더 따라가려고 했을 때 강하는 이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상대는 친한 친구라도 되는 듯 그 내용은 잠깐만 너희 집에서 눈 좀 붙이자는 일상적인 부탁이었는데, 휴대전화의 수신음이 최대로 올라가서인지 수화기 너머에서 한 여자가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울렸기에 곤은 발걸음을 멈춘 채 그 울림이 멀어지는 소리를 듣고 서서 하려던 말을 몸속에 붙들어버렸다.
13.
“후드 셔츠로 입어. 가릴 수 있는 만큼 가려.”
후드를 씌운 뒤 꽈배기 목도리까지 둘러 묶어주는 강하의 손을 내려다보며 곤은 순간 그걸로 자기 목을 조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강하는 그러지 않았다.
“날이 차니까 이렇게 싸고 다녀도 아무도 의심 안 해.”
“기다려.”
영문 모르고 강하가 하는 대로 가만있다가 곤은 비로소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14.
강하는 곤의 후드를 벗기고 아가미가 달빛 아래 드러나도록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이게 있는 한 네 마지막 행선지는 감옥이 아니야. 잘 생각해봐.”
15.
“조끼 지퍼는 꼭 채우고 다녀. 지나가다 불쌍한 사람 보인다고 벗어줘도 안 돼. 뺏겨도 안 되고.”
강하는 다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 했지만 그 어수선한 손놀림에 라이터 부싯돌이 딸깍거리며 긁히는 소리만 계속 날 뿐 불꽃이 일지 않았다.
16.
“날 죽이고 싶지 않아?”
“.......물론 죽이고 싶지.”
작은 불꽃이 그대로 사그라지는 바람에 곤은 그 말을 하는 강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곤한테 다시 후드를 씌운 뒤 조임줄을 당겨 머리에 단단히 밀착시키고 강하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17.
곤, 당신 이름 있잖아요. 그거 할아버지 아니고 강하가 지어준 거래요. 그렇게 부르기도 기억하기도 쉬운 단 한 글자뿐인 이름을, 막상 자기가 붙여놓고 부르지도 못했대요.
그 무렵 강하는 장자를 어린이용 다이제스트 판으로 엮은 학급문고 도서를 읽고 있었대요. 장자에 첫 장에는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 그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강하는 당신의 아가미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으로서 이거야말로 이 아이한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대요. 하지만 그래 놓고는 당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 거의 없었죠. 그건 그다음 장에 있던 한 줄이 일종의 예언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이 물고기는 남쪽 바다로 가기 위해 변신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그의 등은 태산과도 같이 넓고 날개는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과 같으며 한번 박차고 날아오르면 구만 리를 날아간다고요.
언제 어떤 일로 떠날지 모르는 아이였잖아요. 오랜 기간 이내촌에 머물긴 했지만 실제로 당신은 불의의 사고로 떠나왔고요. 강하는 그 이름을 일상적으로 부르는 것조차 두려웠던 거예요.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한 글자가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마침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곤, 왜 그래요? 고개 좀 들어봐요. 잠깐, 어디 가는 거예요? 또 그렇게 무턱대고 물에 들어가지 말고요. 저기 사람들 있잖아요.
첫댓글 와 마자 이거 존잼
새벽에 읽었다가 후루룩 다 읽었는데 아 기분 묘해 존나 축축한 기분..
곤이랑 강하 전래 사랑한다.. 이야기 소재 자체가 넘 판타지 요소인데 풀어낸건 넘 현실적으로 풀어내서 기분 나빠.. 진짜 저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서..ㅠㅠ 칭찬임.. 그만큼 묘사가 잘 됐다는 뜻! 작년 여름에 어쩌다 읽었는데 아직도 그 느낌이 생경함.. 눅눅 축축.. 나한테도 아가미며 비늘 돋은 기분에 물기 머금고 축축해지는 기분.. 여름에 재탕해야게따ㅠ
헐 나 이거진짜 재밌게봣는데 ㅜㅜㅜ 구병모작가님 위저드베이커리보고 완전 울고 이것도 봣어 존나좋아 이작가님 ㅜㅜㅜㅜㅜㅜ
나 이책 진짜 좋아해서 구병모작가님꺼 다 읽었어ㅠ 아가미는 브로맨스도 강해서 좋아ㅎ 문장이 엄청 잘 읽히고 인물부터가 홀린다하나.. 그래서 몰입도가 진짜높아ㅠ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음ㅋㅋㅋ사실 서사자체는 별거 없다고 느껴지는데 인물이랑 설정때문인지 너무재밌어ㅠㅠㅠㅠㅠ 책 평소에 안 읽는 여시들한테 특히나강추함
인생책 중 하나임...
오와 봐야지ㅠㅠ읽을책 목록 추가
꼭 읽어야겠다 고마워!
구병모작가님꺼 책 다좋아ㅋㅋㅋㅋ
구병모작가님 문체 존나내스탈이야ㅠㅠㅠㅠ
아가미ㅠㅠㅠ반가운 이름에 얼른 들어와서보구 댓글에 공감하구가!!
이거좋아
좋은 책 추천 고마워 주말에 사러 가야겟다!!!
어제 자기전에 본다는걸 까먹었어ㅜㅜ다시봐야지
재밌다 읽어봐야지
이 글 읽고 바로 도서관에서 읽었는데 두세시간 후딱 지나가더라! 책 완전 재밌게 잘 읽었어!!
이거좋아